209화
라드군은 중간에 옷을 벗고 나오면 자신이 맡은 라드도 함께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몇 가지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한다면 말이다. 파면당하거나 죄를 지은 이들은 라드를 데리고 갈 수 없고, 혹여 라드를 데리고 간다고 하더라도 그 라드는 왕궁의 소유이기 때문에 일정한 돈을 다달이 왕궁에 바쳐야 했다. 라드가 중간에 사고가 나거나 죽기라도 한다면 엄벌을 처했으며, 집안 환경이 라드를 키우기에 열악하다면 다시 왕궁으로 보내야만 했다.
라드는 자신이 인식한 주인이 없으면 죽거나 떠나기 때문에 퇴연한 군인의 손에라도 들려 보내는 것이지만 보통의 경우엔 왕궁이 떠맡아 죽는 날까지 보살피곤 했다.
올해는 겨울이 다 가기도 전에 퇴역을 신청한 군인이 셋이나 있었다. 그중 둘은 나디사의 동기인 마벤과 시네라였다. 일전에 라드군을 그만두겠다고 고백한 일이 있었던 터라 놀라울 것 없는 소식이었다.
“나디사!”
공주는 결국 그녀가 왕실을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반납하겠다던 저택과 하인들도 보류가 되었을 뿐 거두지 않았고.
“마벤, 시네라.”
“세상에…….”
공주가 하사한 것 중에 유일하게 거부하지 못했던 것은 작은 밭이 딸린 땅이었다. 동쪽 끝자락 작고 따듯한 마을을 품고 있는 그녀만의 땅. 샤포드에서 디디와 로마만을 데리고 이곳으로 내려온 지도 벌써 삼 개월이 지났다. 그사이 공주는 즉위식을 마치고 혼인을 준비하는 듯했다.
“이제야 초대를 해? 나는 네가 샤포드로 사라져 버린 줄 알았어!”
아트리스, 그리사도 소식을 받고 지금 이쪽으로 내려오는 차였다. 동쪽으로 내려와 일꾼 하나 두지 않고 이곳의 땅을 가꾼 나디사는 부모님을 제외한 누구와도 연락하고 있지 않았다. 가끔 생사를 확인하고자 공주의 사람들이 오긴 했지만 그건 의무 같은 것이었고.
“저 집이 네 집이야?”
“응.”
“부모님은?”
“저 뒤쪽 저택에.”
초대를 받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마벤은 겨울에 언 땅을 기가 막힌 듯이 바라봤다.
“나, 나디사. 이거.”
“아…… 고마워, 시네라. 잘 먹을게.”
전쟁을 겪고 퇴역한 시네라는 가업을 이어 제빵사가 되었다. 마벤이 자신의 영지 근처에 가게를 내는 것을 허락하고 시네라의 라드인 캐럿까지 돌봐준다고 들었다. 넘치는 것은 돈뿐이라는 마벤의 말답게 그녀는 떠난 후에도 동료들의 사정을 잊지 않았다. 라드를 데리고 사는 데에 큰돈이 든다는 것을 알고 후원 형식으로 시네라를 돕는단다.
“이렇게 우리 초대하면 그 전까지 연락 안 한 걸 다 잊을 줄 알았어? 아트리스도 얼마나 너를 찾았는데.”
“…… 미안.”
엊그제 돌아가신 친모의 장례를 치렀다. 호화로운 장례를 약속한 공주에게 그녀는 제가 고른 땅에서 조용히 치르기를 부탁했다. 신관 록과 부모님이 참석한 그 장례에는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었다. 진실을 안 마로닌 부부는 눈물을 흘리며 친구의 명복을 빌었고 록은 죄인처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티사 레나이는 얼마 없는 유품과 함께 자식인 그녀의 땅에 묻혔다. 겨울 볕이 따듯한 이곳의 기후가 그녀의 마음에 맞기를 바랄 뿐이었다.
시신이 삭아 없어진 티사 레나이를 대신해서 피운 불이 하늘로 올라갔다. 나디사는 장례를 다 치르고 나서야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그 때문에 부모님과 록의 가슴이 찢어질 것을 암에도.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 주던 사람들은 하늘로 가는구나.
록도, 부모님도, 정석대로라면 그녀보다 일찍 하늘에 갈 사람들이었다. 그때부터 나디사는 더 열심히, 그리고 더 열정적으로 땅을 가꾸고 내년에 무엇을 심을지 계획했다. 없는 시간을 쪼개 라드도 타면서 차근히 수명을 줄여 나갔다.
“저 집이 완성되기까지 부르기가 그래서.”
“…… 저 집을 직접 지었다고?”
“당연히 도움을 받았지.”
이곳 동쪽의 끝에서는 히아신을 죽인 그 장벽이 희미하게 보인다. 보기만 해도 식은땀이 나고 오한이 드는 그 장벽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날이 과연 올까. 실은 오늘 동료들을 초대한 것도 큰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그간 염치없어 부르지 못한 동기를 한자리에 모아 두고 식사하고 싶었다. 생사를 함께한 동료들인데 그간 너무 무심했지 않았던가.
“네가 이제야 정신이 드는구나.”
“직접 만들어줄게, 저녁은.”
“너 혼자 여기 살면 안 외롭니? 부모님하고 같이 지내지.”
“그쪽 집에도 내 방이 있어. 다만 여기서 땅을 만지고, 그러는 게 마음이 편해서.”
벽돌을 올려 지은 작은 집엔 붉은 지붕을 얹었다. 그 집에 들어와 있으면 히아신의 꿈을 이루어준 것 같아 기분이 나아졌다.
“하여간 독특하다니까.”
“그럼, 우리는 어디에, 머, 머물어?”
“부모님 집에 손님방이 많아. 거기에 있으면 돼.”
나디사는 손에 묻은 흙을 털어 내 고 두 사람을 안내했다. 빈 땅의 뒤쪽으로 빙 돌아가 들어가면 그녀의 부모님이 사는 근사한 저택이 나왔다. 원래부터 이 땅에 포함된 집이라고는 하지만 그녀가 보기엔 공주의 입김이 닿았으리라 본다. 땅값보다도 비싼 집을 이고 살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으나 부족한 부분은 그녀의 아버지인 마로닌 씨가 직접 손을 보았다.
하인들의 수도 대폭 줄여 살림의 대부분을 마로닌 부인과 솜씨 좋은 어떤 부인 하나가 맡고 있었다. 그만큼 쓰지 않는 방도 많아 손님이 온다고 할 때만 치워 두는 형편이었다.
얼마 전엔 록이 그 방을 썼었지.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던 그 남자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을 땐 감정을 숨길지 모르는 아이 같아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가혹한 운명이 그에게도 있었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다가 동정심을 허락하고 말았다. 앞으론 그 얼굴을 볼 일 없단 소리를 하지 못했다. 대신에.
‘또 봬요.’
그 말을 듣고 얼굴이 피던 록이 기억난다. 더 길게 말해주지 못한 것이 아플 만큼 그는 행복을 끌어안은 얼굴이었다.
“나디사! 이리 와 봐. 시네라가 말한 것 좀 들어보라고.”
“나,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
시답지 않은 일로 말다툼하는 두 사람의 등을 보며 나디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기.”
그녀의 땅에는 따로 사람을 두지 않아 누구든 들렀다가 떠날 수 있었다. 워낙 외지에 있는 터라 우유를 파는 잭 씨를 제외하면 방문객은 두 사람도 안 된다.
그녀를 부른 사람은 작은 소년이었다. 성큼성큼 편지통을 멘 소년이 다가와 팔을 쭉 뻗어왔다.
“편지를 전해 달라고 해서요.”
“편지?”
나디사는 저를 기다리고 있는 시네라와 마벤을 한 번 돌아본 뒤 소년의 편지를 받았다. 수도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록이 보내온 것인가 했다.
천천히 편지를 뜯은 나디사는 달콤한 땅콩의 냄새에 고개를 갸웃했다. 편지는 아이가 쓴 것처럼 삐뚤삐뚤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아름답고 작은 벽돌집에 사는 귀하에게 보냅니다. 저를 보러 와 주시겠어요?>
편지를 읽은 나디사는 전달책을 맡은 소년을 부르려고 했으나 이미 없어지고 난 후였다. 땅콩 향이 나는 특이한 그 편지는 말을 막 배운 이가 보낸 편지 같았다. 장난 편지거나 이곳에 살던 전 주인에게 잘못 온 편지거나. 작게 코웃음 친 나디사는 그 편지를 무시했다.
***
하지만 다음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그 소년은 어김없이 그녀의 대문을 두드렸다.
<오지 않으시는 무심한 귀하의 마음이 오늘은 평안하시길. 저는 몸이 좋지 않아 지금 움직일 수 없어요. 나를 보러 와 주시면 안 될까요?>
나디사는 반대편 의자에 걸쳐 놓은 발끝을 까닥거렸다. 이름도 없이 귀하라는 말만 꼬박꼬박 붙여 쓰는 편지가 온 지도 어느덧 일주일 째.
아트리스와 그리사가 도착하고 나서도 멈추지 않는 편지는 그새 그녀의 마음속에서 의미가 달라졌다. 이 짧고 삐딱한 편지가 주는 엉뚱함에 그녀는 푹 빠져 있었다.
“아직도 그 편지를 보고 있어?”
“아…… 응.”
아트리스와 그리사는 심장에 들어가 왕에게 충성을 다하려고 한다. 거기에 그녀가 꼭 와줬으면 한다고 설득을 하려고 내려온 것이었다. 겨울을 끝내고 올라갈 생각이었던 나디사는 조급할 필요가 없다고 여러 번 거절했다. 봄에 싹이 자라나는 걸 보고 떠나면 덧나려나. 어차피 저 없이도 세상은 풍족하고 평화로우니 참을성 있게 저를 기다려줄 터였다.
“나디사, 저 사람. 그때 그 편지 소년 아니야?”
나디사는 그 말에 후다닥 일어나 창가에 붙었다. 그녀가 정리해 둔 땅을 밟고 뛰어오는 소년의 얼굴은 기대를 안고서 있었다. 말로만 들었지 소년을 제대로 본 것은 처음인 그리사는 팔짱을 끼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가는 거 없어요?”
“없어.”
나디사는 의심 많은 그리사의 어깨를 두드리고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그녀의 걸음걸이는 요 몇 달 간 볼 수 없었던 명랑함을 담고 있었다.
“왔어?”
“어!”
기다린 듯이 문이 열리자 소년이 놀라 입을 벌렸다. 나디사는 자기 자신이 왜 이런 장난 같은 편지에 끌리는지 알 것도 같았다.
“어서 와.”
편지를 가져온 소년을 맞이하는 그녀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었다. 소년은 땀을 훔치며 품에 소중히 간직해 온 편지를 건네주었다.
“여기요.”
“고마워.”
나디사는 이번에도 편지지에서 풍기는 땅콩 향에 안심했다. 이 향기 때문일 것이다. 히아신과의 추억을 살려 주는 편지는 마치 그와 주고받는다는 듯한 환상을 견고하게 지켜줬다. 미쳐간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이렇게나마 이 땅에서 그의 흔적을 붙들고 살 무언가가 있으면 된 것이다.
헛된 설렘을 안은 편지를 소년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언제나 편지만 전해 주고 쌩하니 떠났던 소년이기에 나디사는 질문을 던졌다.
“왜 그러니. 할 말이라도 있어?”
“저…….”
“응.”
“그게 마지막 편지라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