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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208화 (208/210)

208화

공주의 궁은 아침부터 쇳조각 부딪히는 소리에 버금갈 만큼 소란스러웠다. 공주를 모시는 아랫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공주의 처소는 본래 왕이 쓰던 곳이었다.

빈 궁을 공주의 취향에 맞게 단장을 하고 들어온 지 꽤 되었다. 왕이 쓰던 왕궁답게 조용함이 철칙인 곳이 시끄러워진 건 즉위식과 결혼식이라는 두 개의 경사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왕궁의 주인인 공주는 사병의 수가 1만에 다다르는 대귀족 가문의 아들과 약혼까지 마쳤다. 셈이 빠른 공주는 정석적인 왕실 실세의 길을 걸으려 했다.

공주의 새로 뽑은 시녀들도 유력 귀족 가문의 딸들로 채웠다. 이것만 보아도 그녀의 살림살이가 얼마나 나아졌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리스 경은 정말 다정하세요. 매일 같이 꽃을 보내신다니까요.”

“부러워요, 경과 같은 약혼자가 저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시녀들의 아부 섞인 칭찬을 들으며 공주는 꽃잎에 맺힌 새초롬한 이슬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약혼자인 리스 가문의 차남은 정성을 다하고 있지만 그건 왕이 될 사람에게 보내는 예의에 더 가까웠다.

리스는 비옥한 영토를 가진 것에 그치지 않고 사병을 키워, 서부에서 리스에게 빚지지 않은 가문이 없다는 말을 퍼뜨릴 정도의 위력을 가졌다. 그리 영민한 리스의 가주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단 조건을 들고 와 이 혼인을 성사시켰다. 남부는 그녀의 외가 가문이 있으니 조심할 테고 동부는 애초에 돈도 안 되는 왕권에 관심이 없었다. 남아 있는 북부는 아직 혼란스러운 듯하나 그녀가 리스 가문과 혼인을 함으로써 다스리면 그만이었다.

금을 두들겨 만든 왕좌에 오른다고 안심할 수 없었다. 저를 지킬 발판은 되도록 많이 마련해 두는 것이 좋았다. 그런 면에서 리스 경은 최고의 남편감이었다. 그 속내까지는 모른다만 책보단 꽃을 좋아하고 평화를 사랑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공주님.”

코제나 공주는 장미 꽃잎을 쓸던 손을 우아하게 내렸다. 공손한 인사와 함께 나타난 시녀장이 눈짓으로 문간을 가리켰다. 오늘 오기로 약속된 손님이 누구인지 기억해 낸 공주는 다정한 미소로 시녀들을 내보냈다.

“너희들은 가도 좋아.”

“네.”

“네, 공주님.”

곁에 서 있던 시녀들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열린 문가 쪽을 바라봤다. 떠나는 시녀들의 발걸음이 느린 것으로 보아 손님의 얼굴을 보고픈 모양이었다. 시녀장이 엄중한 표정으로 재촉하지 않았더라면 그 걸음은 손님이 들어올 때까지 떠나지 않았을 터다.

공주는 또래 소녀들의 그 호기심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지금 들어오는 손님은 무척 각별하여 아무나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어서 오게, 경.”

소수 민족 출신에, 그녀가 쓰던 별관을 내어 주었음에도 거만 떨지 않는 성품 또한 흡족했다. 즉위식이 다가오는 이날까지 의견을 표출하지 않았던 나디사가 면담을 청하기에 그녀도 기대하던 차였다.

“여기…….”

그런데 시녀장의 안내를 받으며 나타난 나디사 마로닌의 얼굴은 달라져 있었다. 별관에서 자중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건 공주인 저를 위해 바깥과 접촉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력 좋은 그녀에게 줄을 대려고 극성인 귀족들도 있으니 말이다.

“경, 얼굴이.”

“조금 아팠습니다.”

“그런 말을 못 들었는데.”

살이 빠진 탓에 그 장미꽃처럼 발그레하던 뺨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나디사에게 특별히 신경을 쓰라고 말한 것이 민망하게 어디 감옥에라도 보내 놓고 온 얼굴이었다. 황당해하는 공주의 심경을 모르는지 나디사는 인사를 마친 후에 조용히 착석했다.

차를 따르는 하녀가 물러갈 때까지 나디사 마로닌은 꺼진 눈빛으로 찻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온다고 준비한 맛있는 간식들은 눈에 들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 있나?”

일이 너무 잘 풀려도 마음이 불안한 법이었다. 공주는 자신이 살아남아 가진 것들이 한순간 무너질 모래성만 같아 제집임에도 잠자리가 불편했다. 저를 뒷받침해 주고 있는 뒷배가 없어 혼인하게 될 사내의 집안에 기대는 이 심정은 비참함이 맞을 거다. 그나마 버티고 있어 줄 신전의 록과 라드군의 핵심 인재인 나디사 경이 그녀가 믿는 자들이었다.

“공주님.”

마르고 윤기 없어진 입술로 저를 부르는 데 천둥이 치는 듯했다. 공주는 찻잔 손잡이를 세게 쥐며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무슨 일인지 말을 해 보아.”

“저에게 주신다는 저택과 하인들, 그리고 땅을 거두어 주셨으면 합니다.”

“……뭐?”

나디사 경의 말에 적잖이 놀란 공주는 차를 흘린 것도 모르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티사 레나이 경을 아십니까.”

낯선 이름과 함께 던져진 나디사의 고백은 꾸물거리지 않고 정확히 공주의 귀로 들어왔다. 차가 식을 동안 이어진 나디사 마로닌의 말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그녀는 신관의 사생아이고 공주의 체면과 그 신관의 목숨을 위해 세상에 밝힐 생각은 없으나 돌아가신 친모의 장례는 제대로 치렀음 싶은 것이었다.

목을 치고도 남을 소리에 공주는 침묵했다. 다 듣고 나서도 꿈을 거니는 듯이 몽롱한 기분을 떨칠 수 없어서였다. 그게 밖으로 나오지 않고 별관에 틀어박혀 있었던 이유구나. 친모에 관한 진실을 듣고서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자신에게 온 것이 기특한 한편 인재치고 심약한 그녀의 마음이 걱정이었다. 앞으로도 험난한 고생길이 널려 있을 터인데 시작점부터 주저앉으면 어쩌나.

“이걸 아는 사람은 더 없고?”

“……부모님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편지로요.”

“경은 나의 목숨과 왕관을 지켜 주었어. 저기 있는 신의 장벽도 자네가 만들어 줬지.”

장벽 이야기가 나오자 나디사의 표정이 침울해졌지만 공주는 기분 탓이려니 했다.

“저택은 그대로 두겠다. 받고 싶지 않으면 받지 않아도 돼. 하지만 경을 주려고 지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기엔 그래. 내가 맡아 두고 있겠다. 경이 나중에 혼인할 때 선물로 주겠어.”

“……저는.”

“부모님 말고는 이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도 잘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진실만을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지. 친모에 대한 장례는 예를 갖추어 내가 치러 주겠어. 하지만 이 진실은 경과 나만이 아는 것으로 해 두어.”

“공주님.”

“공주가 왕이 된 사례는 역사상 두 번뿐이었지. 그 둘 모두 끝이 좋지 않았고. 아직 살아 있는 사촌들이 나의 목을 노리는 이때에 경을 놓아준다는 것도 말 안 되지 않겠어? 라드군은 왕실을 위해 존재하는 거니까.”

제 말이 잔인하게 들릴 것은 알고 있으나 이 세상에 잔인하지 않은 것들이 있던가. 두 쌍의 날개를 가진 라드가 공주를 보호한다며 사람들이 떠들어댄다. 설령 나디사 마로닌이 걷지 못하게 되더라도 그 상징성만은 가지고 있어야 했다. 계산을 마친 공주는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나디사의 마음을 부추겼다.

“쉬고 싶다는 경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 신관에게 듣자 하니 라드를 몰다가 몸도 많이 상했다지. 즉위식엔 오지 않아도 좋다. 고향도 다녀오고, 내가 내린 땅도 한번 살펴보고 와.”

떠나겠다는 말을 한 번 더 했다간 아무리 그녀일지라도 포기하려고 했다. 그만한 실력자가 아쉬운 건 사실이나 충성심이 없는 자는 곁에 둘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나디사 마로닌은 제법 현명한 여인이었다. 고향인 샤포드에 들리기 전 공주가 하사한 땅 중에 제일 작은 것을 보고 오겠다고 한 것이었다.

웃는 얼굴로 허락한 공주는 나디사 마로닌이 떠나고 나서도 그녀가 남기고 간 진실을 곱씹고 있었다.

“시녀장.”

“네.”

“즉위식이 끝나고 신관 록을 불러오도록 해, 은밀히.”

“……네, 공주님.”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그녀의 휴식을 허락할 수 없었다. 왕의 입장이 돼보니 알겠다. 그녀도 아비와 같은 왕이 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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