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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207화 (207/210)

207화

시신도 남기지 않고 죽는다는 건 파르난의 사람들의 자부심이고 자랑이었다. 죽어서도 신이 허락한 나라에도 가지 않고, 그저 소멸해 버린다는 게 파르난답다면서. 치기 어린 시절 히아신도 그런 말을 동경했었다. 세상을 우롱하듯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난다는 것이 무언가 멋져 보였다.

그녀의 손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묻게 하지 않아서 다행인가.

하지만 바람이 시신을 쓸어 주어 아무런 소식도 전할 수 없는 삶은 전혀 멋지지 않았다. 나디사에게 남겨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건, 그녀의 마음에도 남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신의 허락하에 그녀의 손길을 느꼈다. 남을 해치기만 한 자신을 버리지 않고 안아 주었다. 얻어 가기만 한 자신에 비해 그녀는 손해만 본 셈이었다. 유언은 없지만 전할 수만 있다면 그 말을 해주고 싶다. 제 삶의 하나뿐인 관계로 남아 주어 고맙다고.

“이제 가려고요.”

그녀의 앞에선 보여 줄 수 없었다. 의지로 붙들고 있었던 무언가를 놓자 손끝 감각부터 무뎌지기 시작했다.

밤에 떠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둠에 익숙한 삶이었지만 나디사와 닮은 해를 보며 떠나게 됐다.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으면 많이 울게 될까. 그렇겠지.

바람이 제 몸을 분해하는 것 같아 기분이 과히 나쁘지 않았다. 자유로운 나디사는 라드를 타고 날아다니니까. 신이 허락한다면 그녀가 죽기 전까지 라드를 이끄는 바람이 되고 싶었다.

시간이 흘러 바람의 말을 배워 그녀에게 말도 걸어 볼까. 그 여자는 아마도 그게 무어냐며 질색하겠지.

죽음이라는 건 순식간에 끝나 자기 자신조차 의식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그의 죽음은 미련이 많은 듯이 서두르지 않는다.

죽음을 기다리던 히아신은 가까스로 눈을 떴다. 한 계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맑은 하늘로 이어진 끝도 없는 계단이.

“아…….”

나디사의 눈물이 묻은 풀은 그의 손에 잡히지 않는다. 죽은 자에겐 허락되지 않은 감각이었다.

천천히 일어나 자신에게 준비된 계단으로 걸어가는 그때였다. 그리운 향기를 데려온 바람이 그의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을 예감한 히아신은 계단에 발을 올린 자세로 멈추어 섰다.

“히아신!”

없어진 자신을 애타게 찾는 나디사가 언덕 위를 뛰어오르고 있었다. 의사를 태우고 오는 것을 실패했는지 그녀 혼자였다. 답할 수 없는 그녀의 부름에 죽은 사람의 가슴이 나무토막인 양 지끈거리며 부러졌다.

죽어도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구나.

자신의 이기적인 선택으로 그녀의 가슴에는 상처가 더 많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상처를 보듬어 줄 사람이 제가 아니란 사실이 마지막까지 자신을 괴롭혔다는 걸 알아주기를.

죽어 없어지면 더는 이런 고통은 없다고 믿었는데. 신은 생각보다 얄궂은 이여서 그의 완전한 파멸을 허락해 주지 않는다.

설마 평생을 서서히 말려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죽을 때까지도 그녀를 못 잊을 사람이니 육신을 소멸시킨 김에 기억도 소멸시켜 주었으면 했다.

“히아신! 어디 있어!”

저 목소리도 부디. 신의 축복으로 계절을 무시하고 자라난 들풀들이 그녀의 발에 무참히 차였다. 목이 쉬도록 제 이름을 부르며 언덕을 뛰어다니는 그녀의 걸음이 느려지기 시작할 즈음 히아신은 눈을 돌렸다.

그의 앞날은 이제 이 계단에 달려 있었다. 안아 주지도 못하고, 달래 주지도 못하는 여자는 그가 먼저 놓아주어야 했다.

“히아신!”

귀를 막았다. 하지만 유령은 소리를 듣지 않는 것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나 보다. 끝없는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들려오는 거라곤 그 목소리밖에 없었다.

마음을 울리는 소리를 듣지 않고 싶어 빠르게 올라간 탓에 어느덧 끝이 보였다.

그도 한때는 수비교 신자였다. 신을 믿지 않고, 신을 따르지 않은 이들의 최후가 어떤지는 들어와서 알고 있었다.

이 계단을 다 끝내고 올랐을 때 다가올 고통이 어떻든 상관없으려나. 그는 저 밑에서 저를 찾아다니며 뛰는 그녀의 모습만을 간직할 것이었다.

잘 있어, 나디사.

잘 다녀왔냐는 말은 하지 못하게 됐구나. 그런 사람이 없어 나는 뜨는 태양이 아름다운 것도 모를 만큼 외로웠다. 나 못지 않게 외로운 나디사의 삶에는 그런 사람이 생겼으면 좋겠다. 하지만 너무 빠르지는 않게. 나를 충분히 생각한 뒤에.

쓸쓸히 웃은 히아신은 돌려지지 않는 고개를 바로 했다. 무거운 걸음을 마지막 계단에 올린 순간이었다.

헤진 신발코에 다른 이의 발이 닿았다. 맨발로 마중을 나와 준 이의 가녀린 발목을 보고서 히아신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일까. 죽은 아들을 마중 나오는 다정함을 그녀에게서 기대할 순 없지만, 계단에 걸쳐진 작은 발은 분명 여인의 것이었다. 상대방의 얼굴을 본 히아신은 가슴이 뛰었다. 저를 바라보는 보랏빛의 눈동자가 낯설지 않았던 터였다.

“……나디사?”

하지만 나디사가 저를 기다렸다기엔 방금까지도 그녀는 들푸른 언덕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와 다른 점들도 있었다. 얼굴에 난 점의 위치라든가 신장이 더 작다든가.

게다가 나디사는 저런 식으로 웃지 않는다. 입으로는 싫다고 말하지만 그녀의 눈엔 언제나 저를 향한 알록달록한 감정이 녹아 있었다. 이제서는 그 따듯한 관심이 전부 사랑이었다는 걸 안다.

“안녕하세요.”

그녀와 닮은 사람을 내보낸 것이 아니라면 경우의 수는 하나가 남는다.

나디사를 낳아 준 사람일 가능성 같은 것. 그러나 계단에 한 발자국 다가서려 하자 여인의 손이 날아와 그를 밀쳤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내려가는 데에는 한순간이었다.

허락 받지 못 한 히아신은 밀쳐져 계단 밑으로 추락했다. 떨어지는 그의 손과 발은 태양의 빛을 반사하듯 눈부시게 반짝였다. 처음 보니 나디사의 어머니는 저를 밀치고도 웃고 있었다.

마치 여기는 네 자리가 아니라는 듯이.

* * *

언덕에 앉아 별이 떨어지는 걸 구경하는 꿈을 꿨다. 이건 나디사에겐 악몽이었다. 잠이 깬 나디사는 이불을 거칠게 걷으며 일어났다.

“나디사 경.”

장벽이 생긴 언덕 위가 아니었다. 침대에 앉아 나디사는 망가진 머리를 손으로 빗었다.

“오늘 공주님과 약속이 있으셔서 일찍 일어나신 거지요?”

친절한 하녀의 인사에도 나디사는 웃음기 없이 신발을 신었다. 아침 해가 들어오도록 커튼을 걷고 있던 하녀는 이미 익숙한 일이라는 눈치로 제 할 일만을 할 뿐이었다.

별관의 하녀들은 어서 그녀에게 하사될 저택이 지어질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부턴가 그녀는 말을 하지도 않고, 방문하는 이를 만나지도 않고 있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경…….”

공주와의 면담은 그녀가 먼저 요청한 것이었다. 지고하신 수비교 신관들의 방문도 거절한 그녀가 오랜만에 먼저 나가겠다고 청한 건이라서 하녀들도 이날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었다.

커튼을 정리하던 하녀는 기분이 가라앉아 보이는 나디사의 옆으로 가지 않고서 다른 일을 찾았다.

새 버릇이 생겼다. 마로닌 경은 아침 해를 보면 운다더라, 같은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다. 어깨까지 흘러내린 잠옷을 추어올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우는 그녀는 사람들이 찬양하는 그 여인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오늘 공주와의 면담을 끝내고 마음을 잡았으면. 얼마 뒤 그녀의 동기가 새로 지어진 저택에서 파티도 연다고 들었다.

하녀는 얼른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리 울게 된 것도 한 달째 되는 날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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