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새벽이 물러가며 언덕 아래 피어 있는 소담한 들꽃이 고개를 든다. 나디사는 푸른 망토를 풀어 그의 어깨 위에 덮어 주었다. 그는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 간신히 붙어 있는 듯이 고요한 잠을 청했다.
나디사는 불안이 기어나가 자신을 지배할 때마다 그의 심장에 귀를 댔다. 주인을 살리려고 애를 쓰는 듯한 그 기특한 소리를 듣고 있자면 그의 녹은 손가락이나 창백한 피부 같은 것은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히아신은 반드시 살아날 수 있어. 그리고 몇 번이나 그랬듯 나에게 돌아올 거야.
“그렇지?”
참을 수 없는 순간에는 잠든 그를 붙잡고 물어보곤 했다. 그의 대답은 없었다. 가쁜 숨소리를 내며 꿈쩍 않는 그에게 대답을 바라지도 않는다. 나디사는 더는 그에게 무얼 바라지 않으려 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다.
“히아신.”
잠을 너무 오래 재워도 문제가 된다. 지독한 불안감에 시달리던 나디사는 그의 어깨를 살살 흔들어 깨웠다. 잠투정 부리듯이 눈을 찡그린 히아신의 얼굴이 잘 보일 수 있도록 잔머리를 넘겨 주었다.
“일어나.”
“……조금만 더.”
일어나지 않겠다며 히아신은 그녀의 배를 보는 방향으로 돌아누웠다. 상처 난 손으로 저를 끌어안는데 어떠한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선이 고우던 그의 손이 너무 헤졌다. 드러나는 손만 해도 이런데 보이지 않는 곳은 얼마나 망가졌을까.
짤막하게 내쉬는 숨에 그가 걸어온 고단한 길이 보이는 듯했다. 그의 잠을 방해하는 시린 바람조차 막아 줄 수 없는 나디사는 가슴이 아려 왔다. 사방이 막혀 조용하고 따듯한 곳에서 그를 재우고 싶을 뿐이었다.
“히아신, 왜 그래.”
그녀의 정신을 붙들어 주던 그의 숨소리가 세상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저를 안고 있던 그의 손이 아래로 천천히 떨어졌다. 오지 말라고 빌었던 현실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나디사는 숨을 헐떡였다.
제가 정신을 붙들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와 만날 거라는 희망 덕이었다. 설마 죽을까. 설마 자신을 떠날까. 어디로 가도 그를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이기심 덕분이었고 말이다. 그는 자신이 떠날지라도 그놈의 운명 때문에 살아서, 지독히도 살아서 자신을 만나러 올 거라고 확신했다.
“아니지. 히아신.”
운명을 믿은 자신의 잘못이었다. 나디사는 현실을 회피하듯 고개를 들었다. 히아신을 여기서 재울 것이 아니라 의사부터 찾아봐야 했다. 의학적 지식이 부족한 저로서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 말곤 해 줄 게 없었다. 다 내보내지 못한 죄책감은 굵은 눈물방울에 갇혀 흘러내렸다.
“히아신, 안 돼, 응?”
그는 한결같이 저에겐 한발 물러서 주는, 잔인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끝이 말리는 숨을 내쉰 히아신은 초점 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이 저인지 하늘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나디사는 그 불안정한 눈맞춤만으로도 활짝 웃을 수 있었다.
“다시 자지 마, 응? 내가, 의사를 찾아 올게. 아니다, 같이 가자. 라드가 있으니까, 아니, 로마랑 디디가 있으니까 금방 다녀올 수 있어. 일어나 봐.”
“나디사…….”
“자지 말고. 지금 자면 안 될 것 같아. 의사 만나면 자. 알았지? 알았으면 대답 좀 해 줘, 제발.”
“미안해서 어쩌지……. 못 움직일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진짜 미안해……. 그런데 일어나서 나랑 같이 가 주면 안 될까?”
“하…….”
절규에 가까운 애걸을 듣고도 히아신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그럼 다녀와, 나디사.”
“……나 혼자?”
“나디사가 데리고 오면 되잖아, 그…… 의사를 데려오려는 거지?”
“안 돼.”
“이런, 나디사.”
팽팽히 맞서는 게 의미 없다는 듯이 히아신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다 문드러진 그의 손은 볼품없었지만 나디사는 따듯하게 마주 잡아 주었다. 히아신은 잠시 그 온기를 느끼듯 눈을 감았으나 나디사는 그조차 불안해 말을 멈추지 않았다.
“자지 마.”
“다녀 와.”
“싫다고!”
“와…… 나디사가 소리 지르는 거 처음 듣는 것 같아.”
“장난 말고, 히아신.”
“그 말은 많이 들었던 것 같은데.”
사람의 마음은 무게를 달아도 그 값이 나오지 않을 만큼 가벼울 것이 분명했다. 다시는 그를 못 볼 줄 알고 잔뜩 가시가 곤두세워져 있던 마음이 그의 농담 몇 마디에 부드러워졌다. 나디사는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해가 떠오르는 방향을 주시했다.
새벽녘이 지났으니 근방 마을에 가면 의사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떠오르는 해는 아무 힘이 없음에도 그녀는 무거운 의미를 부여했다. 약해진 마음은 신의 뜻을 곡해하려고 들었다. 히아신의 말처럼 그는 움직이기가 어려운 상태이니까. 당장 달려가 의사를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손에 떨어진 희망은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었으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희망이 아예 제 손을 떠났던 아까 전을 생각하면 지금은 사정이 낫지 않은가.
“그거 해 줄게, 나디사.”
힘든 티를 내지 않으려고 표정을 굳히고 있는 그의 말이 나디사의 간당간당하던 의심을 놓게 했다.
“다녀왔어, 하는 거. 내가 하고 싶었던 거. 꼭 그거 해 줄게.”
“……정말?”
히아신이 바라던 꿈은 듣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졌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반겨 주는 가족이 있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던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히아신이 저에게 거짓말할 리 없었다. 제 목숨을 담보로 걸며 거짓을 속삭일 리 없었다. 적어도 사랑은 그의 목숨과도 같은 것이니까. 나디사는 그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그의 운명에 의지하고 있는 자신에게 환멸 났다.
“잠시 이거 베고 누워 있어.”
나디사는 푸른 망토를 돌돌 말아 그의 머리를 받칠 베개로 주었다. 천천히 그의 머리에서 손을 떼어 내 눕힌 뒤에는 몰래 눈물을 닦아 냈다. 히아신은 끝까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서 자애로운 시선을 보내 주었다.
신은 그의 편이니까 급할 것 없었다. 그는 멀쩡해질 것이고, 앞으로 다시는 장벽 근처로 오는 일 없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거다.
불안은 색바랜 희망으로. 가망 없는 희망이라도 불안을 덮어 줄 수만 있다면 가져오는 법이다.
나디사는 그를 두고 일어나 로마에게로 뛰어갔다. 희망과 닮은 태양이 그녀를 비췄다. 들판 위에 앉아있는 로마의 안장을 고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햇볕을 쬐며 누워 있는 히아신은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는 둘만의 허망한 약속을.
“다녀올게.”
그에게 닿지 않을 인사를 남기고서 나디사는 로마의 등에 올라탔다. 곧 돌아올 예정이라 디디 없이 떠나갔다. 자신이 돌아온다는 사실이 히아신에게 위안이 되기를 바라면서.
그녀의 비행은 조급한 마음을 반영하듯 평소보다 거칠었다. 붉은 해를 향해 날아가는 그녀는 새로운 희망을 싣고서 힘차게 날았다.
까만 씨앗처럼 변하기 시작하는 그녀의 뒷모습은 히아신의 망막에 새로이 새겨졌다. 누워 있는 그는 손바닥으로 느릿느릿 바닥을 쓸었다. 이 흙과 풀에 그녀의 눈물이 스며 있을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그 눈물을 가져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니까.
“이제 데려가도 좋아요. 아쉽지만…….”
버티고 버티던 몸이 비명을 질렀다. 말로만 듣던 파르난의 최후가 그에게도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