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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205화 (205/210)

205화

잘못된 생각이었다. 짧고 단순한 접촉으로 만족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그녀와의 만남에 의의를 두려고도 해 봤다.

그런데 도무지 안 되겠다.

닿고, 만질수록 제 불행에 일조한 갈망이 비웃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잊고 있던 사실을 꼬집으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자신이 착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녀의 삶을 위해서 양보했던 욕망이 죽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녀의 곁에서 살고, 그녀의 곁에서 죽고, 그녀의 무덤을 제 손으로 지어 줄 거라는 욕망은 사실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의 쉬운 소망조차 들어주지 않는 신에게나 어려운 일이었지.

일평생 기도하지 않았다거나 신을 저주한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원망하지 않고 그의 상황을 받아들이며, 해벗 종족으로서는 드물게도 상대를 놓아주고 축복했다.

한데도 손을 잡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단 말인가.

내가 무얼 그렇게 잘못했다고.

어미를 잃고 고아가 되었을 때 신은 무엇을 했나. 그가 길거리를 떠도는 개보다 못하는 신세가 되었을 때 신은 무엇을 했나. 선택지가 없어 파르난에 들어가게 한 것은 바로 그 신이었다.

애초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해벗 종족으로 태어난 것부터 불행의 시작이었다. 단 한 사람도 축복하지 않은 삶에서 처음으로 축복하고 싶은 여자가 생겼다고 이리 죽일 필요가 있나.

나디사의 기억에 남지 않을 쓸쓸한 죽음. 저라고 그런 걸 바라진 않는다. 그런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려나 모르겠다.

그렇다면 자비를 베풀어 손 한 번은 잡게 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지 마, 히아신…….”

손을 떨칠 자신도 없는 나디사는 그의 녹은 손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바라는 건 그녀의 다정한 시선이 저에게 오길. 그뿐이었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수비타 왕국을 포함한 대륙에서 악당의 노릇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면 그건 자신들이었다. 신에게 대항한 파르난이 세상을 지배한 후에는 상상도 하기 싫은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을 거다. 잘 알고 있었다. 이게 옳다는 것은 안단 말이다. 하지만 신이 벌인 일들이 전부 다 괜찮다는 뜻은 될 수 없었다.

“나디사.”

괜찮지 않았다. 사는 내내 빈곤했던 그에게도 꿈이 있고, 사랑이 있었다. 사실 그녀가 저를 바란다면 신이 꺼내 줄 줄 알았다. 그런 동화도 있지 않은가. 저주받은 동물에게 공주가 입을 맞추면 깜짝 놀랄 만큼 멋진 왕자가 된다는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여기는 동화가 아니고, 그녀는 공주가 아니고, 무엇보다 자신은 저주에 걸린 왕자가 아니었다. 그는 못된 짓을 하다가 이제야 합당한 벌을 받는 한 죄인일 뿐이었다. 가져 보지 못한 사랑 앞에서 맴도는 남자일 뿐이기도 하고. 그게 다였다.

“서럽게 들리겠지만 잘 들어.”

“히아신, 제발 손, 놔. 응?”

“죽고 싶어, 나디사.”

“…….”

“매 순간 죽고 싶어. 그리고 무서워. 이대로 너한테 잊힐까 봐. 이대로 나의 죽음은 뭣도 아닌 게 될까 봐. 마지막 순간에 눈을 감을 때 혼자일까 무서워. 아니, 혼자겠지. 정해진 것 중에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게 무서워.”

이 말만큼은 가슴에 묻고 가져 가야지 멋지고 괜찮은 남자겠다. 너를 사랑한 것만으로 두려운 것도 없고, 무서운 것도 없다고. 그러니 너는 먼 훗날 나 없는 세상에서 행복하기만을 바란다고. 하지만 손을 잡는 것조차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그에게 두려움도 내비치지 말라는 건 너무한 처사였다. 나디사는 이 결정을 원망하겠으나 그는 최후를 정한 후였다.

“그래서.”

“……그래서?”

“나디사, 나 말이야. 네 옆에서 죽고 싶어.”

“안 돼.”

이제 하나 남은 소망을 그의 사랑이 가로막았다. 이기적으로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부정하지 않겠다. 아마도 착하고 순진한 그녀는 해결책을 찾겠다고 하겠지.

“해결책을 찾아볼게.”

이것 봐라. 해결책을 찾아올 동안 사고 치지 말고 이 땅에서 저를 기다리라고 하겠지. 하지만 그녀가 돌아올지, 안 돌아올지 피가 마르는 기분으로 저 장벽 너머만 보고 앉아 있다간 죽을 것 같았다.

혹시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해결책을 들고 오지 못할 거다. 그녀를 사랑하는 신은 그녀가 죄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 장벽을 깨트리고 죄인을 꺼내지 않길 바라기 때문에.

“넌 나를 막을 수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네가 죽지 않길 바라, 히아신.”

“그것도 막을 수 없을 거고.”

그러니 그는 신이 바라던 대로 해 줄 것이었다. 신도 마지막쯤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해 주길 바라며.

“안 돼. 히아신!”

그녀의 달콤한 비명을 한 귀로 흘리며 히아신은 손을 밀어 넣었다. 손톱을 촛농처럼 녹인 통증이 끌려 들어가는 팔에까지 전해져 왔다. 저를 녹아 없애려는 고통이 더는 싫지 않았다. 이 고통은 그에게 주어진 자유였다.

장벽 안에서 말라 죽어 가는 것을 선택한 자신의 결정이 어째서 어리석었는지 깨닫는 과정. 저 울고 있는 여자를 손에 안아 보고자 나아가는 과정에서 받는 고통. 그 만족스러운 고통을 그는 자유라고 불렀다.

“하지 마!”

절규하고 비명을 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저를 부른다. 장벽을 통과한 손끝은 깃털에 쓸리는 듯이 간질거렸다. 그녀가 손을 잡아 주는 느낌과도 같은 바람이 그를 도왔다. 그래. 이 삶은 자신의 손을 떠나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선택을 강요받았었다. 그런 그도 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하나 남아 있었던 거다.

죽음. 혼자서 맞이해 보려던 단어가 자유로 바뀌어 그에게 날아왔다. 자유. 그가 평생 바라던 자유가 눈앞에 있었다.

어깨가 장벽을 통과하는 그 순간 눈알이 빠질 것 같은 통증이 그의 머리를 찧었다. 커다란 새가 부리로 제 머리를 쪼는 것 같은 느낌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할 뻔한 순간이었다. 통과한 몸을 받아 든 나디사가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히아신, 죽지 마, 나, 어떡하면 좋지, 아, 미안해…….”

미안할 것은 없었다. 이것은 오로지 저의 자유를 향한 마지막 반항이었을 뿐이니. 마치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조심히 끌어안았다. 바람이 그녀를 인도하여 그의 가슴에 안겼다.

장벽 밖으로 나와 맞이한 날씨는 흐리고 어두웠고 그가 겪었던 어느 계절보다 추웠다. 하지만 이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게 자유의 상징이었다. 자유의 대가로 얻은 고통도 그의 몫이었다.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윽!”

쓰러지는 그의 몸을 받아 든 나디사는 힘이 빠져 옆으로 굴렀다. 다 포기하고 누운 그녀는 그 상태로 잠을 자듯이 누운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웃고 있는 그의 심장은 곧 멈출 것처럼 느리게 뛰었다.

“가지 마, 히아신, 미안해, 내가 미안해…….”

우는 것도 잊었다. 멍한 눈빛으로 일어난 나디사는 잠든 히아신을 푸르른 들판이 있는 곳에 눕혔다. 그녀의 허벅지에 머리를 누이고 그의 감긴 눈 위에 입을 맞추었다. 자유의 바람을 느끼듯 손을 올리고 있던 히아신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조금만 잘래…….”

나디사는 잠이 든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작은 심장 소리가 들려온다. 막을 수 있는데도 막지 않은 걸까. 나디사는 살려고 노력하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서러움을 그쳤다. 겨울이 오는 걸 막을 수 없듯 편히 쉬어 보려는 그의 잠을 방해하지 않아야겠지.

대신 그녀도 잠이든 그의 얼굴을 독차지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아마도 이런 순간은 다시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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