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히아신.”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위태롭게 들렸다. 저 밖은 생명이 넘쳐나서 그녀를 굶기지 않을 텐데. 튼 입술이나 촉촉한 눈가나 부러질 듯 마른 팔목을 보면 가슴이 아팠다. 바깥에 무엇도 그녀의 위로가 되지 않으면 아니 될 텐데. 자신은 해 줄 수 없는 무언가를 해 줄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 어서 이 여자를 데려가 정신 차리라고 뺨도 때리고 가두어 주고, 식사도 억지로 먹여 줄 사람이 있을 텐데.
“궁금해. 다시는 나를 안 보려고 했어?”
며칠이 지났던가. 아니, 몇 달이 지났던가. 셀 수 없는 시간이 흐른 것은 분명했다. 히아신은 꽤 초라할 자신의 얼굴을 숨겨야 하나 잠깐 고심했지만 이내 그 모든 걱정이 의미 없단 생각에 웃고 말았다.
태생부터 초라했고, 빈손으로 자라나 빈손으로 죽는 것이 신의 뜻이거늘. 아무리 멋 내고 아닌 척해도 그에겐 숨길 수 없는 그분의 뜻이 있었다.
“이 사탕을 준 게 너였구나. 몰랐어.”
“몰랐다고?”
“알잖아. 나 편지 같은 거 싫어하는 거.”
“……히아신, 제발.”
그는 그녀의 끝이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시선을 내렸다. 어째서 우는 그녀의 눈가보다 손에 두른 천부터 보이는지. 하긴. 피를 내면 그 피가 나올 상처가 있어야 하겠지. 무슨 원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의 피가 장벽을 통과하는 열쇠인가 보다. 그렇다면 이 사탕도 그녀의 상처에 일조한 공범이었다.
나디사가 아직 저를 기억한다는 위안 하나 얻자고 상처를 더 늘릴 수는 없었다. 자신의 작은 위안과 그녀의 상처는 비교 선상에 놓을 수조차 없으니 말이다.
그녀의 상처가 더 늘어나기 전에 이 만남을 제 손으로 끝내야 했다. 모진 말로 상처를 주고, 다신 없을 모욕을 주고, 그녀에게 이곳에 오지 말라고 경고를 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비겁한 입술은 끝끝내 열리지 않는다. 시선은 점차 떨어지고 손끝은 미련하게도 사탕 봉지를 놓지 못했다.
네 손에 난 상처가 많아질수록 나의 가슴에도 똑같은 상처가 생기겠지. 훗날 너의 상처가 낫는다고 해도 마음에 난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문득 쑤셔 오겠지. 그 문득 생각 나는 밤이면 나는 길 잃은 아이처럼 울고 말 테고.
그런데도 저를 보러 오지 말라는 말이 입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지친 그녀가 그 말을 듣고 오지 않을까 봐. 기다린 듯이 그러자 하고 떠나는 그녀의 모습이 마지막이 될까 봐. 그것이 못내 두려웠다.
“점심엔 무엇을 먹었어?”
“……뭐?”
소리 없이 울고 있던 나디사는 마른 시선으로 그를 훑다가 머뭇거리며 되물었다.
“뭐라고 한 거야.”
“점심 말이야. 아니, 저녁이던가.”
최대한 이별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끌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진실로 그가 궁금하던 것이기도 했다. 그의 꿈속에서 나디사는 무얼 먹고 있질 않았다. 나디사의 입으로 구운 닭을 먹었다거나 구운 생선을 먹었다거나 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의 빈곤한 상상에 보탬이 될 듯싶었다. 상상에 진실을 더해서 조금 더 그녀를 가깝게 느끼고 싶었다.
“어떻게 만나서 할 말이 그것뿐인 건데.”
하지만 나디사는 양심 없는 그의 상상에 응해 주지 않았다. 현실의 나디사는 불운하고, 행복해 보이지 않지만 저가 죽고 난 뒤에는 간혹 웃기도 하겠지. 여기서 물러나 주는 건 이미 예견된 그의 숙명이었다.
상대가 덜 아파할 수 있도록 죽어 마땅할 역할을 맡는 것이다. 한데 왜 나는 늘 그런 역할만 맡을까. 만일 다른 세상 다른 남자였다면 나도 조금쯤 괜찮게 보일 수 있을까.
“저 안에서 잘 살고는 있는 거야?”
그날이 오면 너의 반대편이 아닌 같은 편에 서길 바라.
“무얼 먹고 있는지는 내가 묻고 싶어. 왜 이리 말랐어…….”
한 번쯤은 자랑스러운 부모님을 가져 너에게 소개도 하고 싶고.
“히아신, 내가, 방법을 찾고 있어. 그러니까 숨지 말고 나와.”
너에게 어울리는 사람은 나라는 말을 부끄럼 없이 모두에게 할 수 있으면 좋겠어.
“알았지? 응?”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에 얻은 사랑을 다음 생에도 똑같이 얻고 싶고. 내가 차마 받지 못하고 남기고 간 사랑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받고 싶어. 그래 줄 수 있을까. 몇 년만 지나도 나는 잊힌 사람이 되겠지만, 너에게는 흘러가는 사람이 되겠지만. 네가 흐르고 흘러 저 멀리서 태어난 나에게 다시 오기를 나는 기도하겠어.
“나디사.”
“응.”
나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이 모습이 내가 가져갈 수 있는 마지막 모습이라니. 그것이 몹시 못마땅하지만 어찌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보다시피 나 몸이 좋지 않아. 내일부턴 여기까지 나와서 음식을 가져갈 수가 없어. 다리도 아파서 말이야. 저 안이 얼마나 넓은 줄 알아?”
“……뭐라고 하는 거야.”
“여기 오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소리야. 이젠 네가 사탕을 백 개씩 줘도 안 와. 음…… 그러니까.”
“그러지 마.”
지금이 적기였다. 혀를 굴려 상처를 주면 아주 영영 잊지 못할 텐데.
막 열리던 히아신의 입이 닫힌 건 그녀의 손이 장벽에 닿고 말았을 차였다. 마음이 약해 울지도 못하는 그녀가 가녀린 손을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 색을 닮은 별들이 비처럼 쏟아지던 날과 같았다. 히아신은 저를 위해 흘리는 눈물 앞에서 꿈쩍을 하지 못했다.
감히 저 같은 것이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나. 가슴에 남는 상처는 낫게 할 약도 없는 것을 알면서. 사랑을 다 퍼부어도 그 상처는 못난 흔적을 남길 텐데.
상처로 그녀를 내쫓겠다는 생각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곧바로 사그라들었다. 장벽에 닿아 있는 그녀의 손이 너무도 조그맣다. 저걸 한 번만 붙잡을 수만 있다면. 이번 생에 단 한 번만 쥘 수 있게 허락해 준다면.
눈이 어두워진 히아신은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장벽에 가져다 댔다. 시린 느낌이 팔을 통과했지만 놓을 수 없었다. 나디사는 고개를 푹 수그려 저가 이렇게나 다가왔다는 사실을 몰랐다.
히아신은 그녀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심스럽게 손과 손을 맞댔다. 중간에 끼어 있는 장벽이 주는 고통도 잊고서 그녀의 손과 맞닿으려 발악했다.
의문이 든다. 과연 그녀 없이 이곳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게 나의 전부일까.
어차피 죽을 것이었다. 살기를 희망하지 않는다. 희망한다면 신이 그를 괘씸하게 여겨 더한 벌을 내릴 것 같았다. 이 일과 관계없는 그녀를 아프게 한다거나 그녀를 죽게 한다거나.
“히아신, 지금 뭐 하는 거야.”
손이 녹아내리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장벽 또한 지지 않고서 그를 막아섰다. 한데도 그는 손 한 번 잡아 보려는 소망으로 장벽을 넘고 있었다. 아직은 방법이 없다는 걸 안 나디사가 고개를 흔들며 만류했으나 히아신은 멈추지 않았다.
장벽을 지나 그의 손이 다가오고 있었다. 피하고, 뿌리쳐서 안으로 넣어야 했지만 나디사는 그의 눈을 보고 알았다. 한 번이라도, 마지막이라도 쥐고서 끝내고 싶다는 그의 눈빛이 그녀의 마음을 설득했다.
파르난의 저주가 옭아맸으나 히아신은 찡그림 한번 없이 넘어왔다. 나디사는 그의 손을 뿌리치는 대신 조금 더 가까이 장벽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끝이 부서져 내리는데도 이리로 오는 것이 좋다니. 자신의 이기심을 비웃는 나디사의 눈빛이 흔들리는 찰나에 단단한 손바닥이 마주 닿았다. 환하고 찬란한 장벽은 그를 봐줄 수 없다는 양 발광하였지만.
그는 모처럼 따듯하게 웃고 있었다.
“드디어 닿았네.”
그리고 그 접촉은 히아신 안에 어떠한 작은 바람을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