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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203화 (203/210)

203화

히아신의 하루는 단조로웠다. 이곳에서의 일은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라 그의 선에서 수습이 가능했다.

생각해 보아라. 살길이 막막한 파르난의 땅에 갇힌 사람들이 무얼 해 보겠나. 저를 여기서 꺼내 주지 않는 신을 원망하다 못해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 말곤 할 것이 없다는 걸 깨닫는 과정을 밟았다.

히아신은 누군가를 죽이기 싫고, 누군가의 손에도 죽기 싫었다. 최후를 어떻게 맞을지는 스스로 정해 둔 탓이었다.

“죽어!”

그를 쫓아다니는 살인자는 하루에 한 명씩 꼭 생겨났다. 온 땅을 이 잡듯 뒤져도 먹을 것이 없다는 이유였다. 하루, 이틀 정도는 정신력으로 어떻게 참는다고 하더라도 허기짐은 익숙해질 수가 없는 종류의 고통이었다. 무엇보다 상황을 이겨 낼 좋은 수가 없다는 생각에 피가 말랐을 터다.

왕자인 그는 따로 꿍쳐 놓은 식량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고 기대하는 게 안쓰러울 따름이다.

“윽, 억……!”

“따라오지 마. 징그럽게 왜 이렇게 따라다녀.”

죽이고 싶지 않아 잡아서 목을 눌러 주며 경고를 한다. 하지만 이래도 정신 못 차리고 그를 따라오는 자들은 그 가여운 목숨을 거두어 주었다. 다행히 오늘 따라온 자는 약간의 겁을 주자 옷도 버리고 도망쳐버렸다. 멀리멀리 달아나는 남자의 뒷모습이 앙상해 보여 히아신은 처음으로 나디사가 아닌 누군가를 동정했다.

“흠.”

장벽 근처로 와 바람을 맞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파르난의 땅은 생명의 씨가 말랐다. 잡초조차 나지 않는 땅엔 씨를 뿌려도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이 땅에 살아 있는 이들은 그 썩어 가는 물고기조차 구하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렸다. 허기에 익숙한 히아신마저도 이따금 현기증과 두통에 시달릴 정도였으니까.

이런 최후는 그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처럼 시체를 먹고 싶진 않았다.

죽은 동족을 먹어 치운 이들은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죽어 갔다. 이렇게 하나둘 죽어 파르난의 사람이 사라지면 저 장벽도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지겠지. 제 생각엔 그렇다는 거다. 죄인을 처단할 번개를 내려 처리하기도 더럽다는 양 신은 우리를 내버려 두는 거 아닐까.

그 벌레 중 하나로서 말하자면 그간 탁월한 선택이었다. 신을 택하지 않은 지옥이 어떤 것인지 사는 동안 뼈저리게 알려 주겠다는 거 아닌가.

나디사를 알고부터 독실한 신자가 된 히아신은 피식 웃었다. 다만 그의 지옥은 굶주림이 아니라 누구를 보고픈 마음에서 오지만 말이다.

“안녕, 공주님. 오늘도 너무 예쁘다.”

장벽 안으로 가져온 그녀의 어린 시절 초상화는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연필로 그린 것이라 만질수록 닳는 모양이었다. 이게 다 지워지기 전에 죽어야 할 텐데. 신의 자비가 미천한 저에게까지 닿길 바랄 뿐이다.

하루 일정이 정해진 히아신은 오늘도 저를 쫓는 이들을 따돌리고 장벽에 갔다. 사람이 없을 시간에만 찾아오는 그는 찰나의 우연을 기대하며 이곳을 방문한다. 우연히 나디사와 비슷한 실루엣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날은 운이 좋은 날이다. 하지만 그림자의 주인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는 가지 않는 게 그의 철칙이었다.

이 장벽 밖으로 나가려고 시도한 파르난의 이들 모두 잿더미가 되어 죽었다. 나가는 것에 어찌어찌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 목숨이 얼마 가지는 않을 거다. 한데도 나가 보려는 이들의 마음을 모르진 않는다. 이 저주받은 땅에서 볕도 못 보고 죽느니 사람답게 죽을 수 있는 바깥을 택하는 거다.

하지만 태양이 버린 땅에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히아시에겐 중요한 게 있었다. 마지막을 확신하는 그 때에 나디사의 얼굴을 보는 것. 신이 허락한다면, 날도 좋고, 바람은 불지 않고, 시야도 탁 트인 그 날에.

그러던 어느 날 히아신은 장벽 앞에서 정성스레 포장된 사탕 봉지를 주웠다. 비릿한 피 냄새가 나는 봉지엔 누가 보냈다는 서신이 없었다.

이건 기적이었다. 녹아서 다 눌러붙은 땅콩사탕을 얻은 날 히아신은 그 자리에 붙박인 듯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신이란 분도 야박하지는 않구나.

그날의 기적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를 위해서 일어났다. 빵, 사탕, 쿠키 같은 것들이 그를 기다린 양 장벽 앞에 놓여 있었다.

히아신은 그게 저를 불쌍히 여긴 신의 선물인 줄 알았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간식 봉지들이 사라졌을 때도 당연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게 나디사가 보냈다는 걸 알기 전까진 그도 그저 감사했을 뿐이었다.

장벽 바깥에서 안쪽으로 물건을 보낼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진 못했다. 그러고 보니 매번 사람의 피 같은 게 봉투 쪽에 묻어 있어 의문이 들었었다.

어쩌면 알고도 모른 척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행운은 그녀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용서한 신이 준 것이라고. 해서 어느 날은 자비를 베풀어 저 문을 열어 줄지도 모른다고.

나디사는 영 눈치 못 채는 그를 답답해하며 짧은 서신을 보내왔다. 하지만 그는 여인의 필체로 쓰인 작은 쪽지를 다 읽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사랑하는 여인의 희생 없이 그는 달콤한 간식조차 갖지 못했다. 먹지 않고 쌓아 둔 사탕은 커다란 돌 밑에 구덩이를 파서 숨겨 두었다. 아껴 먹으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건 단순한 집착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 먹지 않고 모아 두어 기특하다고 신께서 여겨 주길 바랐다.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너나 나나.”

돌아갈 일 없는 남자를 추억하는 게 얼마나 갈까. 일 년일까. 잘하면 삼 년까지는 갈까. 그의 몸은 음식을 먹는 행위 없이도 일 년까지는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나디사가 더는 사탕을 두지 않으면 그의 마음은 일 년짜리도 못 된다. 그 어떤 날보다 좌절할 거다. 절망하고 그녀를 미워할 거다. 나를 잊었다는 사실을 기어이 알려 주는 그녀에게 증오를 퍼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여자를 놓아주고, 잊어 주는 게 그의 사랑이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녀에게 잊힌다면 그 순간 자신은 삶을 놓을 생각이었다. 이 모순적인 상황에서 그녀의 기다림과 사랑은 독이 든 성배였다. 영원하지도 않을 이 사탕에 자신이 목숨 거는 것처럼 그녀의 사랑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히아신은 그 사탕을 다시는 먹을 수 없도록 땅에 묻어 두었다. 계획을 바꿔야겠다. 나디사를 본 뒤에 죽는 것이 아니다. 사탕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그 날 죽어야겠다. 나디사에게 약속을 했으니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 땅 어디엔가에서 깨지 않는 잠을 잘 것이었다. 꿈은 신도 침범하지 못하는 그만의 공간이니까. 그곳에서 꿈을 꾸며 죽음을 기다리겠다.

하지만 사탕을 땅 밑에 묻어 버린 다음 날 히아신은 또 다른 사탕을 발견했다. 나를 잊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날이 하루가 더 늘어났다.

히아신은 웃음을 억지로 참는 얼굴로 달려갔다. 장벽 가까이에서 멈추고 허리 숙여 그 사탕 봉투를 집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의 입꼬리를 올렸다. 히아신은 일어나 자신이 묻고 온 사탕 봉투들을 생각하며 새로 온 아이는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다.

나디사는 이걸 두고서 없어지는지, 없어지지 않는지 매일 지켜보고 있을까. 그녀도 이걸로 자신의 생사를 확인하고 있는 걸까. 이게 곧 그녀의 관심이고, 그녀의 관심이 사라지면 자신도 죽어야 하는데.

이 망할 기대는 끊이지 않고 자신을 살게 한다. 이곳으로 와 그녀가 남긴 사랑을 보게 한다. 언제까지 이러고 초라한 희망에 기대어 살 수 있을까.

비웃으며 달콤한 사탕을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는데 그의 아둔한 기척을 잠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히아신.”

꿈에서 그녀의 얼굴과 눈빛은 그럭저럭 구현해 낼 수 있었지만 저 목소리만큼은 아무리 흉내를 내도 가짜 같았다. 요란하지 않게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는 저 아름다운 목소리만큼은.

“……와.”

그녀를 만날 때마다 그는 순진하고 때묻지 않은 소년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세상에는 저토록 아름다운 사람도 살아가는구나. 그리고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저를 사랑해줬다고 말했었던 걸 떠올리는 그 순간엔.

그는 그것으로 모든 게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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