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빛의 장벽을 만들 때 쓰인 세 사람의 피. 파르난의 힘을 받은 히아신과 라드와 연결된 나디사, 그리고 신관인 란의 피.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록의 편지를 받고 생각을 바꾼 나디사는 곧 유력 귀족 가의 방문이 있다는 시녀의 만류에도 장벽 앞으로 왔다. 그에게 주고 싶은 것, 자신이 줬다는 것을 알 만한 걸 생각하다가 포장된 땅콩사탕을 골라왔다. 저 안에서 무얼 먹고 사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은 생선 때문에 그다지 좋은 추억은 없었다. 히아신이 이 사탕을 먹고서 적어도 자신을 만날 생각을 가져 주었으면 좋겠다.
고독을 부추기는 바람이 불었다. 완연한 겨울이 오기 전에 그를 만났으면 했다. 결심을 굳힌 나디사는 엄지를 깨물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식어 버린 사탕 봉지 위에 작은 핏방울 하나를 떨어트렸다.
이런 것으로 가능할지 모르겠다. 눈빛은 의심이 가득했지만 사탕 봉지를 옮기는 손길은 망설임이 없었다.
장벽으로 다가간 손이 약간 머뭇거리다가, 다시 힘을 받고 전진했다. 그녀의 핏방울이 묻은 사탕 봉지는 저를 가로막는 장벽 앞에서 조금의 실랑이를 했다.
이런 방법으론 안 되는 건가 싶을 그즈음이었다. 그녀의 피 맛을 본 깐깐하던 장벽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피가 묻은 사탕 봉지만 허락한 장벽은 그녀의 손을 퉤 뱉어 냈다. 파르난의 구역으로 떨어지는 사탕 봉지를 보며 나디사의 뺨은 상기되었다.
성공했다.
이 작은 사탕 봉지를 계기로 그에게 연락할 수도 있을 거였다. 한 가닥 희망을 접한 나디사는 힘 빠지게 울지 않기로 다짐했다. 탄성이 나오는 입술을 손등으로 틀어막고 작게 웃었다.
히아신이 한 번만 이곳을 지나가 준다면, 이 땅콩사탕의 향을 기억해 준다면. 그곳에 앉아 장벽 너머로 넘어간 땅콩사탕에게 소망을 전한 나디사는 해가 지고 나서야 떠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돌아왔을 때.
그 땅콩사탕은 없어지고 난 후였다.
* * *
나디사는 통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오전에는 다 나은 아트리스와 그리사의 퇴원을 축하하러 가서, 두 사람과 오붓하게 다과 시간을 가졌다. 묽은 것밖에 먹지를 못하는 두 남자는 뜨거운 차만 마시는 신세였지만, 그래도 그 지긋지긋한 병원에서 탈출한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나디사. 들었어?’
‘마벤이 라드군을 그만둔다는 이야기만 하고 정신을 어디에 두는 거예요?’
그래.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마벤이 여는 파티가 기대된다는 이야기 뒤에 나디사는 저만 아는 이야기를 더 덧붙였다. 그런 주제를 갖고 한창 떠들던 두 남자는 정신이 딴 곳에 팔린 나디사를 염려스러워했다.
‘왜 그래, 나디사. 무슨 일이 있어?’
‘혹시…… 히아신 때문에 그래요?’
두 사람은 히아신이 파르난의 사람이라는 것을 대충은 알고 있고, 저 장벽이 파르난의 사람들을 데려갔다는 것도 안다. 적당히 둘러 대답을 해야 할 상황에서 나디사는 또 한 번 넋을 놓았다.
‘난 가 봐야겠어. 두 사람, 더 쉬어.’
히아신이 정확히 어쨌는지는 두 사람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히아신이 없어진 상황에서도 인간적인 쓸쓸함만 느꼈겠지. 사정을 다 아는 나디사만이 미쳐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가까운 시장으로 달려가 보이는 달콤한 사탕과 과자를 쓸어모았다. 종류의 상관없이 사기만 하는 그녀에게 적지 않은 상인들이 달라붙었었다. 들고 온 양을 보니 조금 과하다 싶었지만 반드시 실험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하루는 땅콩사탕 말고 다른 과자를 두었다. 다음 날 가 보니 그 과자가 사라져 있었다.
그다음 날에 둔 빵과 사탕도 어김없이 누군가 가져갔다. 나디사는 매일 그것이 없어졌는지 확인하는 기대감으로 눈을 뜨고 눈을 감았다. 상상 속에선 히아신이 그걸 가져가고 있지만 현실에선 누가 가져가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히아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가져가고 있을 가능성도 있으나 그런 불안감은 곧 편지를 전하자는 마음으로 없앴다.
내용은 대략 이랬다.
[히아신. 네가 맞다면 제발 도망가지 말고 내 앞에 나타나 줘.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7시에 여기서 너를 기다릴게.]
더 길게 쓸 수도 있었지만 나디사는 그러지 않았다. 편지를 좋아하지 않는 히아신에게는 이 정도의 간단한 쪽지가 적당할 듯싶었다.
그리고 많은 실험의 결과로 얻어 낸 것도 있었다. 한꺼번에 많은 양의 물건을 반대편으로 보내지 못한다. 또 한 번 보낸 물건은 다시 가져올 수 없었다.
시간도 얼마 없었다. 점점 물건을 받아들이는 장벽이 견고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언젠간 피를 묻히는 방법도 통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니 항시 신중하는 게 좋았다. 나디사는 곱게 접은 쪽지를 땅콩사탕 봉지에 끼워서 넣었다.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을 담아 장벽 건너편으로 보낸 사탕 봉지는 어두운 땅 위에서 창백한 별처럼 빛났다.
다음 날 일정이 있어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자리를 뜬 것이 패착이었다. 다시 오면 결과를 알게 되겠지. 안일한 생각과 기대를 갖고 나디사는 다음 날 7시에 장벽으로 왔다. 단 1분도 허투루 쓰지 않고 도착한 나디사를 기다리는 건 없어진 사탕 봉지와 나뒹굴고 있는 쪽지였다.
허망했다. 기뻐서 잠 못 이루던 나디사는 빛이 없어진 시선으로 그 쪽지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펼쳐 보지도 않은 쪽지가 저를 좀 데려가 달라고 우는 것 같았다.
지금껏 사탕 봉지를 가져간 사람은 히아신이 아니란 소리일까. 하지만 그렇다면 왜 쪽지를 가져가지 않았을까. 실망한 자신이 더 이상 간식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어쩌려고.
저 메모를 가져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히아신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자신의 망상일까. 아니면 괴로운 나머지 그렇게 믿고 싶은 걸까.
나디사는 그를 만나면 주려고 가지고 왔던 따듯하고 흰 빵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노란 천으로 잘 감싸서 온 빵을 히아신에게 주고 싶었다.
쪽지만 가져가지 않았다는 건 만나지 않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저 없이 흘러가는 삶을 살아가라 했다. 그녀가 원했던 것처럼 저도 그래 볼 테니. 거기에 동의하지 못하고 고여 있는 자신이 문제인 걸까. 언제나 한 발 느린 나디사는 알 수 없었다.
쪽지가 남겨진 것을 확인한 그날은 아무것도 두지 않고 빈손으로 돌아갔다. 그게 스스로 납득할 수 없었나 보다. 죄책감이 생겼는지 꿈을 꾸었다.
수척해진 히아신이 장벽 앞까지 왔다가 아무것도 없는 빈 땅을 보고 실망하는 것이었다. 주린 배를 붙잡고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이 안타까움을 불러왔다.
“하…….”
깨어난 나디사는 베개가 젖을 정도로 울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퉁퉁 부은 눈을 손등으로 가리려고 해 봤자 가슴에 담긴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쓸데없는 감정이었다. 히아신은 남하고 관계없이 잘 살아가 보려고 하는데 왜 자신만 이렇단 말인가.
그 꿈이 남긴 여운이 강렬해 자꾸만 뒤척였다. 배고픈 히아신이 그걸 받으러 오면 어쩌지. 잠은 오지 않고 그녀의 마음도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그를 주려고 산 간식들에서 썩어 가는 냄새가 나는 듯했다.
따지고 보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디사는 자다가 말고 옷을 챙겨 입었다. 쌀쌀해지는 날씨에 맞춰 두꺼운 옷을 껴입고 밤도둑처럼 로마와 디디를 데려왔다.
더는 기다리는 것으론 안 되겠다. 그녀는 두 눈으로 확인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