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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201화 (201/210)

201화

록과의 불편한 식사 자리를 끝내고 별관으로 돌아온 나디사는 곧바로 침대에 가지 않고 창문 앞에 서 있었다. 이곳에 있으면 저 멀리서 빛나는 장벽을 여한 없이 바라볼 수가 있었다.

세상은 히아신이 없다고 하더라도 달라지지 않았다. 일상에 달라진 점이라고는 그들이 전년보다 행복해졌다는 것뿐이었다.

나디사는 공주의 즉위식 이후로 바빠질 테지만 당장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은 평온한 하루를 누리고 있었다. 원한다면 고향에 다녀와도 좋다는 말에 시녀들이 언제든 갈 수 있게끔 짐을 싸 두었다. 떠나기만 하면 될 일지만 샤포드에선 빛의 장벽이 보일지 미지수였다.

‘나디사 경.’

손님이 왔다고 이르는 시녀의 목소리에 나디사는 창문 앞에서 등을 돌렸다. 가을 끝 무렵일 뿐인데 손끝에 닿는 창문 살의 느낌이 시렸다.

“나디사!”

말 없는 그녀의 동의에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마벤이었다. 포상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던 말이 떠올라 그녀의 사복 차림이 이해가 되었다. 그녀다운 노란색 스커트가 잘 어울려 나디사는 오랜만에 진심으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앉아, 마벤.”

“너는 서 있게?”

앉으라는 권유를 하기도 전부터 의자를 찾아가던 마벤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디사는 자신이 창문에 달라붙어 사는 매미처럼 굴었음을 깨닫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한차례 차가운 바람이 부는 창가에서 시선을 떼고 정다운 담소를 나눴다. 정신이 들었을 땐 마벤과 마주 앉아 있는 채였다. 한껏 꾸미고 나타난 그녀가 사 온 찻잎은 예상만큼이나 훌륭했다. 깊게 우러난 찻물을 마시던 나디사는 대화에 익숙해지자 또 습관적으로 눈을 돌렸다.

“나디사.”

“응?”

“밖에 누구 있어? 왜 그리 쳐다봐?”

“……그냥 날이 추워진 것 같아서.”

마벤은 눈치가 빨라 꼬치꼬치 캐묻는 대신 새로 구워 온 쿠키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먹지도 않고 바라볼 것만 뻔히 알면서도 마벤은 포기를 몰랐다.

“나디사, 나 할 말이 있어.”

“응.”

“잘 들어.”

“응.”

“나 라드군을 그만두려 해.”

나디사는 그녀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다. 오늘도 와서 아트리스나 그리사의 소식만 전해 줄 것이라 생각해 이 자리를 가볍게 여겼다. 마벤이 군복을 벗고 귀족가 여인다운 옷을 입은 것도 기분 전환 삼아 그런 거라고 취급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번 일로 나도 깨달은 게 많아. 너 없는 사이 아트리스의 뒤에서 지내며 나 생각 많이 했어.”

“…….”

“나는 정말 군인하고 맞지 않는다고. 그리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아트리스하고도 떨어져 있는 편이 낫겠다고.”

아트리스와 그리사의 몸이 회복하면 마벤이 주최하는 파티가 있을 예정이었다. 발톱 부대 중에 그만한 추진력과 성격을 가진 사람은 마벤뿐이니 말이다. 마벤은 그 파티에서 이야기하려 했지만 미리 말한다며 쓸쓸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강한 너도 이렇게 괴로워하는데 나는 어떻겠니. 가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거, 나는 이제 힘들어서 더는 못 하겠어. 너나 그리사 만큼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네가 없으면 그리사가 많이 심심해할 텐데. 시네라는 울 거고.”

“울라고 하지. 걔도 생각이 많은 것 같더라. 고향으로 돌아가 제빵사가 되고 싶은가 봐. 생각해 보면 첫 훈련 할 때부터 나와 시네라가 하늘에서 떨어졌었지. 너는 나를 구하러 왔었고. 운명은 그때부터 정해졌는지 몰라.”

나디사는 조금 창백한 마벤의 미소가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그 어떤 설득도 통할 것 같지 않은 철벽같은 미소에 나디사는 체념하며 눈을 감았다. 자신의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집중하는 동안 마벤은 본인의 나약함과 싸워 답을 얻어 냈다.

나디사는 안 되는 것을 포기하고 앞으로 나가 보려는 그 단호함이 부러웠다. 샤포드에 살아 있는 가족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저 먼 장벽만 바라보고 있는 자신에게도.

친부인 록에게 분을 풀며 거리를 두는 것도. 그리고 그가 전해 준 책을 단 한 줄도 읽지 않았으면서 울고만 싶은 것도.

언젠가부터 제 안에서 자라나고 죽는 감정의 정체를 저 자신도 몰랐다. 히아신의 말이 맞았다. 사람들은 그녀가 강인한 영웅인 것처럼 대하지만 그건 그들이 그렇게 보는 것일 뿐일 터다. 그녀는 그저 책 한 권도 다 읽지 못하는 여인일 뿐이었다.

“나디사.”

“응?”

“잘 지내. 그리고 파티는 취소하는 거 아니니까 꼭 오고. 공주의 즉위식 전에 열 거야. 그때가 제일 바쁠 것 같으니까.”

할 말을 다 끝내고 마차에 오르는 마벤의 걸음은 가뿐해 보였다. 그녀를 마중하기 위해 별관 밖으로 나온 나디사는 노을 속으로 떠나는 그녀의 마차가 유난히 서글프게 느껴졌다. 제각기 삶을 찾아갈 뿐인데 자신의 곁을 떠나는 느낌이 든다. 저렇게 뒤를 보지 않고 떠나는 그들의 결정이 부러운 오후였다.

이대로 들어가면 종일 침대에만 누워 있을 것 같아 고장난 벌처럼 빙글빙글 별관 현관 쪽을 거닐던 그녀는 결국 라드를 보러 갔다. 자신을 떠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는 라드들이 가여우면서도,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이들마저 떠나지 않게 계속 묶어 두고 싶었다.

“저, 나디사 경.”

라드가 쉬는 마구간 문을 열어 두고 있었더니만 문 앞에서 그림자가 서성였다. 솔직한 심정으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나디사는 신전에서 보내온 게 뻔한 복장의 사내를 가만히 바라만 봤다. 그 시선에 긴장한 듯 몸이 굳은 어린 신관은 공손히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록 님께서 보내오신 겁니다.”

울컥 치미는 감정을 삼키며 나디사는 꽤 거친 손길로 그 편지를 받아들었다. 세상 싫은 표정으로 편지 인장을 뜯는 그녀를 두고서 어린 신관은 떠나갔다. 그리고 주위에 사람 없이 바람만 부는 때에 나디사는 표정을 지웠다. 의식적으로 감정을 없애지 않으면 이 폭풍을 감당할 수 없었다. 잔잔하게 흐르던 세월을 보상하듯이 지금 그녀는 다양하고 쓰린 감정의 맛을 보고 있었다.

록은 그중 하나였다. 히아신이 태풍이라면 그는 불꽃이었다. 제 인내심을 그 따듯한 시선과 말들로 태우고 있었다. 록에 대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가가 아려 와 편지에 적힌 글을 빠르게 읽었다. 하지만 편지 중간쯤부터 나디사의 읽는 속도는 현저히 느려졌다.

어제 식사 자리에서 나디사는 아이가 투정 부리듯이 장벽 안으로 들어갈 방법은 없냐고 물었었다. 그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기에 방법은 없는 줄로만 알았다.

[나디사 경에게 차마 전하지 못했지만, 자꾸 꿈에 당신의 간절했던 얼굴이 나와서 이렇게 편지를 보내 봅니다.

신전에서는 자주 그 장벽으로 조사관을 보내는데, 안으로 사람은 들일 수 없지만 란의 피를 묻힌 물건 정도는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는 모양이에요. 그것도 살아 있거나 큰 물건은 어림없고 작은 것만.

혹시 도움이 될까 적어 봅니다. 그리고 혹시 작은 도움이 되었다면 다시 한번 나를 찾아와 주겠어요?]

철자 하나 틀리지 않고 바른 글자 위에 그의 친절한 목소리가 덧씌워진 듯했다. 끝나는 한 줄까지 예의에 어긋남 없는 편지를 읽으며 나디사는 웃을 기운도 사라졌다.

자신이 유치하다는 건 안다. 세상 사람 누구에게도 이리 밉게 대한 적 없던 자신이 록에게만은 돈을 맡겨 놓은 사람인 양 차갑고 쌀쌀맞았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대해도 미움을 살 일 없다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유 모를 서글픔에 그녀는 그 편지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조만간 그를 찾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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