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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200화 (200/210)

200화

말이 가을이지, 수비타 왕국의 계절은 성질이 불같아 어느샌가 겨울로 넘어갈 거다. 겨울이 오면 안 아프던 사람도 앓아눕고 기침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더욱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에겐 겨울은 걱정스러운 계절이 된다.

설마 나디사의 건강이 이 자리에 중요한 주제로 떠오를 줄은 몰랐다. 라드군은 라드와 동화될수록 심장이 약해진다던데 그와 관련된 일인 걸까. 하지만 나디사는 다른 라드군과 마찬가지로 긴 휴가를 얻었다. 아니면 라드를 몰다가 생긴 후유증 때문에. 티사도 오래된 지병이 있었던 걸 생각하면 틀린 걱정은 아닌 듯싶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디사는 그에게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는 태도로 제 앞에 놓인 나이프를 들었다. 식욕이 사라진 얼굴로 두꺼운 고기를 썰기만 했다.

“그래.”

록은 이 확연한 거리감을 어떻게 메꾸어야 좋을지 몰랐다. 록의 세상에는 다정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만이 살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감정을 받아 주기만 해도 칭찬을 받았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마음을 얻고 싶은 사람이 이토록 서늘하고 말라 있다면 다른 태도로 다가서는 게 맞았다.

록은 아침에 딴 신선한 채소가 담긴 그릇을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 접시를 써는지 고기를 써는지 모를 칼질을 이어 가던 나디사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이것도 먹고.”

하대는 안 하기로 했지만 나디사는 그런 걸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녀와의 첫 관계를 여는 지금 록은 친근한 모습이었음 했다.

나디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만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차린 성의가 있어 맛을 보려고 해 봤으나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눈썹 끝이 내려간 나디사의 미소가 더없이 슬퍼 보였다.

“편히 말해도 될까.”

“네.”

“내가 도울 수도 있어, 나디사.”

“……무엇을요?”

“무엇이든.”

거짓 하나 없는 진심이었다. 록은 남은 생을 그녀를 위해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호르스의 폭풍에 다녀오는 임무를 독단적으로 진행 시킨 공주에게 앙심을 품을 만큼 아꼈다.

이미 물 건너간 일이 됐지만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그녀의 무사 귀환을 기도했다. 이 자리는 그때부터 계획한 것이었다. 나디사에게 무슨 일이 생겨 못 볼까 걱정이 많았다. 진실을 밝힐 것을, 그날 밝힐 것을, 신을 원망하며 후회했다. 하지만 이러한 격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의 태도는 무척 사무적이었다.

“친모인 티사 레나이. 나도 이제는 알아. 나디사가 그녀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것도.”

록은 꺼내지 못하고 있던 책을 다시금 식탁에 등장시켰다.

“여기, 내가 알아보기 편하게 적어 두었어. 신전에 있던 기록 일부야.”

죽은 신관 랍이 보여 준 조잡한 기록은 지우고 그가 새로이 쓴 내용이었다. 사랑밖에 모르는 티사가 목숨 걸고 아기 낳기를 결심한 부분은 꼭 읽어 주기를 바랐다.

“이거를, 저를 주신다고요.”

“나디사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눈빛이 흔들린 나디사는 그가 건넨 책을 얌전히 받아 들었다. 거부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듯싶었다.

“……감사합니다.”

책을 받아 든 나디사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그 책의 겉면을 쓸어 만졌다. 되살아난 안타까운 감정이 그녀의 손길에 들려 있었다. 록은 이쯤에서 자신이 아버지임을 밝히려고 했으나 신의 뜻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책을 안아 든 나디사는 조심스레 말문을 뗐다.

“책을 읽기 전에 말입니다.”

“……아, 어.”

“티사 레나이라는 사람은…… 자살이 아닌 건가요.”

책을 한 번만 들추면 알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나디사는 글 읽기를 주저하는 듯 그렇게 물었다. 그럴 수 있었다. 원하지 않는 진실은 사람을 작고 초라하게 만드니까.

하지만 그녀는 대답도 하기 전에 다급히 물어 왔다.

“대답이 없으신 걸 보니 맞는 듯하네요.”

“……유감스럽지만.”

“그러면 그 여자를 죽인 사람은요. 누구죠.”

진실을 듣고 인내심이 촛불보다 짧아진 나디사는 식탁에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폭발뿐인 그녀의 감정은 예사롭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부드러운 분위기로 좀처럼 가지 않자 록은 입안이 말라 왔다.

“이미 죽은 사람이고.”

“신전의 기록에서 나왔다고 하니 신전 사람이겠죠. 신관의 사생아를 가졌다는 이유로 죽인 건가요.”

질문들이 하나같이 날카롭고 정확하여 록은 계획에도 없던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나디사의 분노를 잠재우고 싶었으나 이 자리에서 침묵은 도움이 되지 않는 듯했다.

“그렇다는 거군요.”

“나는 그걸 읽고 그녀에 대한 오해를 먼저 풀기를 바랐어.”

“이 책을 읽고서 제가 바뀌길 바라셨나 봅니다.”

“……나디사, 나는, 조금 더 편안하게 대화하고 싶을 뿐이야.”

“하나 바뀐 게 있긴 합니다.”

록이 꺼트린 게 아니었다. 책을 펼치지도 못하고 꼭 끌어안은 나디사가 스스로 분노를 꺼트렸다. 티사 레나이. 그 여자. 나디사가 제 친모를 부르는 이름들은 언제나 먼 타인을 대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면 말과 감정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미 죽은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사람이 내가 생각한 만큼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겠죠. 이곳에 와서 알게 된 그 여자의 삶은 생각보다도 더 외롭고, 쓸쓸하고, 의지할 곳도 없었어요. 그런 곳에 나를 두고 갈 수 없어 저희 부모님께 맡긴 사람이겠고요.”

록은 나디사의 말이 길어질수록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그 외롭고 쓸쓸한 여정을 함께해 주지 못한 죄는 어떻게 해도 갚을 수 없을 거다.

“라드군에서 쫓겨나 자살했다는 오명은 그럼 지워 줄 수 있습니까.”

“……나디사. 미안하지만 신관의 사생아를 가진 것 때문에 타살당했다는 것도 명예롭진 않아. 나는 죽은 그녀를 위해서 그녀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겐 진실을 알리겠지만…….”

티사의 그 외로운 죽음을 세상에 알린다면 자연히 세간의 시선은 태어난 사생아에게 갈 것이었다. 그 사생아는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을 견디며 살거나 사사건건 앞길이 막히겠지.

그는 그런 수모를 당해도 쌌다. 사내이니만큼 변명 없이 견딜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디사는 아니었다. 날개를 펼쳐야 하는 이 시기에 진실을 매달고 꺾어질 필요는 없었다. 때로는 가슴에 묻고 살아야만 하는 진실도 있는 법이었다.

“나디사. 지금까지 널 지켜봐 오고, 너를 아끼는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나 또한 진실을 덮고 싶어서 널 말린다고 오해하지 말아 줬음 좋겠어.”

“알고 있습니다.”

“……이해해 주어 고마워.”

“아니요. 이해한 건 아닙니다. 저는 이 순간부터 신전을 증오하기로 했으니까요.”

“나디사.”

“이 책은 조금 더 제 마음이 정리되면 읽겠습니다. 지금은… 뭐 하나 정리하기가 벅차니까. 대신 제 부모님한테는 보여 드려도 될까요? 그분을 많이 그리워하셨으니까.”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닐 분들도 아니라는 말을 차갑게 덧붙인 나디사의 모습에서 록은 그녀의 마음을 읽었다. 친모를 죽인 신전 사람은 싫고, 키워 준 부모님도 살아 계신다. 책도 읽지 않을 것이라 친부가 누구인지는 알 바 아니다.

“나디사 경.”

그래, 그녀의 마음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이 관계에서 언제나 약자를 자처하게 될 자신은 그녀의 뜻을 따른다.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는 나디사에게 자신을 들이밀 생각은 없다. 그게 티사의 죽음에 일조한 자신의 죄라면 달갑게 받을 터였다.

“나는 티사의 오랜 친구였어요. 그건 변하지 않아요. 그리고 나디사 경을 아주 오래 보고 싶은 사람 중에 하나예요. 그러니…….”

“…….”

“가끔 나를 찾아와 주겠어요? 날이 좋다는 이유도 좋고, 배가 고파서 와도 좋고, 말 상대를 찾고 싶어서도 좋고.”

훌륭한 위선이었다. 록은 몸에 밴 우아한 태도로 포도주잔을 내려놓는 데에 성공했다. 그의 말을 잠잠히 듣던 나디사는 무슨 생각에선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그 작은 끄덕임 한 번이면 그는 살 수 있었다.

“다가오는 겨울 이야기나 해 볼까요. 경.”

다시는 나디사 라고 부를 수 없을지 모르지만. 당신의 아버지라고 나설 수 없을지 모르지만. 록은 딸인 그녀를 위해 준비한 식사 자리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죄인인 그에겐 충분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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