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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99화 (199/210)

199화

가을이 공식적으로 중반에 접어들었다고 공주가 공표한 그날 나디사는 심장의 배지를 받았다. 그것도 심장의 차기 수장 감이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구태여 추가하면서.

파르난의 땅을 감싼 장벽에 관한 조사는 공주가 조사관을 보내어 다 파악을 해 두었다. 결론은 그것이었다. 이게 바로 신의 선물이자 왕국의 보물이고, 사악한 파르난의 힘으로부터 선량한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 장벽이 신이라는 존재의 증명이었다. 수비교 신전은 앞다투어 그것을 저들의 공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신관 란이 나타나 나디사 마로닌의 공으로 돌렸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신의 보물을 지켜 낸 것은 그녀였다고.

하여 신전의 증언까지 더해진 그녀의 미담은 왕국 전역으로 일파만파 퍼졌다. 소수 종족을 통틀어 가장 유명 인사가 된 그녀의 행보를 모두가 주목하고 있었다.

죽은 왕족들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 있을 공주의 즉위식에서 그녀가 축하 공연을 한다는 우스운 소문까지 생겨났다.

자라나는 어린이부터 다 자란 노인까지 축제 분위기였다. 이런 백성의 인기에 힘입어 평화의 주역인 나디사에게도 특별 대우가 따랐다. 전 왕세자가 새로 지은 별관 중 하나를 그녀의 숙소로 내어 주었고, 때마다 선별된 재료로 만든 식사를 받으며, 그녀와 친한 동료들의 진급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리사, 아트리스는 신전의 극진한 진료 덕에 의식이 돌아왔다고 들었다. 면회는 아직이었지만. 소식 담당이 된 마벤과 시네라는 덕분에 발톱의 위상이 높아졌다며 좋은 소리만 전해 줬다. 완벽했다. 공주는 즉위식이 끝나고 그녀가 받게 될 것들을 나열하며, 고향에 계신 부모님까지 넌지시 언급했다.

‘감사합니다.’

나디사는 남이 오해할 만큼 감성이 마른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실은 이것은 제 덕이 아니에요,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눌러 참느라 표정이 그 지경이 됐다. 다들 히아신이 없는 것처럼 산다. 히아신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도 당장 기쁨을 누리느라 히아신의 존재는 없는 것처럼 했다. 산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기 싫은 듯이 사는 란은 찾아가 보지 않아 모르겠다. 히아신을 기억하는지 어쩌는지.

공주의 즉위식을 기점으로 세상이 달라질 거라고들 한다. 나디사 마로닌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평화로워지고, 조금 더 질서가 잡히고, 그녀만 조금 더 슬퍼지겠지. 해가 뜨는 시간엔 울적해 있던 나디사는 밤이 찾아오면 몰래 로마와 디디를 데리고서 산책을 나섰다.

가는 길을 외운 아이들은 말하지 않아도 목적지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쉬지 않고 번갈아 잠이 든 주인을 태우고 온 로마와 디디는 떠오르는 해를 보며 지쳐 쓰러진다. 나디사는 도착한 빛의 장벽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아 히아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별을 확신한 히아신의 마음이 혹시 바뀔지 모르니까. 웃으며 떠난 그가 저 안에서 무슨 삶을 살고 있는지 알고팠다.

그러다 시간이 다 되면 디디와 로마가 그녀를 데리러 왔다. 돌아갈 시간이라고 일러 주듯 미련한 그녀의 옷자락을 물고 놓아주질 않는다.

그럼 그녀는 조용히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는 그녀의 소중한 일과였다.

그렇게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다른 건 더 없고?”

“더 올릴까요?”

“아니야, 내 말은 그게 아니야.”

대신전이 단장을 끝내고 백성들에게 개방되는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록은 첫 번째 신관으로서 신전의 수리와 새 집무실, 그리고 일할 사람들을 들이는 일을 맡아 지난달을 어떻게 보냈는지 까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바쁨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고인 물이 나가고 새 물이 들어와 환기된 신전에는 기존의 낡은 관념을 없애는 설렘이 움트고 있었다. 더군다나 신전의 새 주인이 된 록은 그 들뜸이 아랫사람들보다 한 수 위였다. 손님방을 새로 단장하는 데에 그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안다면 그 인자한 신조차 놀랄 것이었다. 신관들끼리 어떤 손님을 들이려고 저러는 거냐는 말이 나왔지만 새로운 권력자가 된 록의 앞에서 대놓고는 묻지 못했다.

“이 정도면 충분한 듯싶습니다.”

“그래…… 더 올리면 촌스러울 것 같기도 해.”

“네.”

식사 준비를 담당한 주방장은 제 경력이 몇 년인데 믿지 못하냐며 자존심이 상해했다. 실수를 지적받나 싶어 긴장하고 나온 마음가짐이 무색하게 록은 그저 예의에 모자람이 없는지, 더 올릴 음식은 없는지를 물었다. 손님이 열두 명 이상이라면 그의 걱정이 이해가 되나 오늘 오기로 되어 있는 손님은 단 한 명이었다.

“그, 손님이, 혹시 많이 드시는 분인지?”

“아, 그렇진 않고. 무얼 좋아하는지 잘 몰라서.”

“아…… 예.”

외람된 말이지만 주방장은 록이 짝사랑하는 귀족 가의 여인이 오는 것인가 했다. 신관이 여인과 눈이 맞는 게 드문 일도 아니고. 모시던 공주가 왕이 되어 기쁜가 했더니만 그의 태도는 사랑하는 여인이라도 찾은 듯 정치완 무관한 쪽이었다.

“저, 록 님.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아, 그래?”

주방장은 나갈 차례라는 걸 알면서도 멀쩡한 소스를 섞으며 시간을 끌었다. 신전에서 주방장 일을 한 15년 동안 식탁을 봐달라고 불려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 식성이 까다롭지도 않은 록이 두세 번 입을 대게 만든 그 대단한 손님이 누구인지 궁금할 만도 했다.

그리고 이윽고 하급 신관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등장한 그녀는 주방장도 익히 아는 유명 인사였다.

“나디사 경!”

록의 예법을 잊은 화사한 인사와 달리 그녀는 단정히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마쳤다.

“록 님.”

수비타 왕국에서 공주의 인기가 치솟는 건 그 라드군 나디사 마로닌이 공주의 사람이라서였다. 알게 모르게 핍박받는 소수 민족의 대표 격이 된 인사를 보며 주방장은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나디사 경, 여기에.”

록은 직접 의자를 빼 주기까지 하며 이 순간을 무척이나 고대해 왔다는 걸 온몸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수척한 그녀는 아무런 기대도 없는 표정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하급 신관이 소문의 주인공이 맞는지 의심하는 얼굴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식사부터 하지, 아니, 이제부턴 하대는 곤란하지. 그렇죠?”

록은 본인의 자리로 걸어가면서도 말을 쉬지 않았다. 신전에 나디사를 위한 손님방을 의뢰하고, 그녀의 위엄을 기릴 전시관도 하나 계획하고, 공주와 둘이서 그녀에게 줄 보석과 저택, 그리고 직위들을 상의할 때마다 기쁨에 취했다. 아비로서 지난날 해 주지 못한 것들을 갚아 줄 수 있게 됐다.

겸사겸사 그녀의 친부모도 이곳으로 모셔 와 가까이 살면 좋으련만. 공주의 말론 나디사가 단칼에 거절했다고 들었다. 그러므로 록이 준비한 오늘의 식사 자리는 중요했다. 어느 정도 눈치를 챘겠지만 그녀가 그와의 사이를 부녀 사이로 인정해 주길 바랐다.

티사,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을 딛고 탄생한 이 경이로운 생명을 그는 모른 체할 수 없었다. 더는 신전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를 비난할 사람도 없었고.

앞으로 나디사의 앞을 가로막는 이가 있다면 그가 해결해 줄 터였다. 소수 종족으로 받아 온 설움도 달래줄 터였고. 분명 그리 마음을 먹고 만든 자리였는데.

“나디사 경.”

“네.”

“어디, 아픈 건가…….”

“아닙니다.”

자리에 앉아 웃는 얼굴로 그녀를 마주한 록은 서서히 입꼬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신선한 재료로 만든 식사가 그녀의 별관으로 제공되지 않던가. 심지어 그녀가 머무는 곳은 새 저택이 완공되기 전까지 공주의 시녀들이 잠자리를 돌본다고 들었다. 대접이 소홀할 리가 없다.

한데 그녀의 몰골은 수프 한 그릇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예전의 그 당당함이 없었다. 생기가 빨려 나간 듯이 뺨은 패이고 눈가는 거뭇했다. 티사의 기록이 적힌 책을 내밀던 손이 식탁 밑으로 들어갔다. 긴장을 풀기 위해 물로 목을 축인 록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가을이 오고 시들어 버린 그녀의 감정이 걱정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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