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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98화 (198/210)

198화

같은 시각 수비타 왕국도 갑작스레 나타난 빛의 장벽에 대해 우왕좌왕하긴 마찬가지였다. 공주는 성에 입성하자마자 다른 일정을 제쳐 두고 파르난 군대의 공격을 대비하던 차였다.

초반 대응은 엉성했다는 걸 인정한다. 지도부에 전쟁 경험이 많은 인재가 없는 탓이다. 하지만 나디사 일행이 떠나고 나자 놀랍게도 기습 공격은 줄어들었다. 순찰이라는 대외적 명목으로 나디사 일행을 보내 놓았는데, 그 때문에 반발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음이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나디사 마로닌을 밖으로 내놓으면 어쩌냐는 걱정이었겠지.

거르고 걸러 공주의 귀에 들어온 말들이 이 정도면 여론은 알 만했다. 라드군의 실질적인 정신적 지주인 라넌 샤스의 죽음 이후로 나디사 마로닌에게 의지한 부분이 컸음이었다.

어찌 됐건 큰 기습 없이 무사 귀환을 하게 된 군은 짐을 풀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나디사의 공백이 생각보다 군의 사기에 크게 작용했다. 돌아오면 지금의 자리로는 이 열기를 감당할 수 없을 터. 어차피 공주는 제 사람 중에 나디사 마로닌을 포함할 생각이라 적당한 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첫 만남부터 하기 싫은 표정을 지었지만 제법 대담하게도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행동이 조금 굼뜨기는 하지만 고지식하고 속 터지는 쪽은 아니었다. 공주는 제 마음에서 후한 점수를 가져간 나디사가 부디 건질만 한 것을 가져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디사 일행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세자의 죽음은 확실시되었다. 그 때문에 공주의 즉위식을 약식으로나마 치르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빗발쳤다. 백성과 지방 귀족까지 불러 두고 하는 정식 즉위식까진 아니더라도 큰 의미가 있다는 거였다. 요즘 같은 전시에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것 말고도 신경 쓸 여러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공주는 저가 보낸 나디사 일행을 잠시 잊었다. 그렇게 찾아오라고 닦달할 때는 언제고, 저 자신도 놀라울 만큼 담담하게 그들을 잊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간 잊고 산 벌을 내리는 것처럼 하늘에 빛의 장막이 쳐졌다.

“공주님! 공주님!”

복도에서부터 달려오는 시녀의 목소리가 하도 우렁차 어떤 일로 오는지 새들도 알겠다. 쉬겠다고 침대에 누운 공주도 창문으로 이 신비로운 현상을 보고 있는 참이었다.

“그래…….”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문을 열고서 들어온 시녀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공주는 마음이 들뜰수록 쿠션에 등을 깊숙이 댔다. 머리가 멍했다. 잊었다는 사실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기억이 돌아왔다. 누군가 막고 있었던 기억을 보내 준 것처럼 막힌 머릿속이 뚫렸다.

‘코제스!’

‘안타까워 어쩌나. 공주님의 동생이 죽어서.’

죽어 버린 동생의 손을 잡는 것이 고작이었다. 분하게도 동생을 살해한 그 여자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동생은 살 가망이 없지만 공주님은 살아야지. 살고 싶으면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뭐라고 했지?’

‘……안 돼, 안 돼.’

당시엔 죽은 동생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아 주변을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그래 놓고 어둡고 축축한 공간에 갇혀 죽어 가던 동생을 깔끔히 잊고 만 것은 무슨 조화일까. 왕국의 보물을 찾으라는 말만 뇌리에 박혔던 것 같다. 그들의 명을 수행하는 꼭두각시처럼 말이다.

“공주님, 지금…….”

제 어깨에 여우털 담요를 둘러 주던 시녀가 놀라서 얼굴이 굳었다. 말없이 우는 공주 때문에 저가 더 당황한 시녀는 어디서 듣고 온 말을 다급히 덧붙였다.

“좋은 징조라고 합니다. 파르난의 문양을 가진 사람들이 전부 하늘로 떠올라 저 장막 뒤로 날아갔다고요. 그 소식 전해 드리려고…….”

“그래.”

“하면 기뻐서 우시는 겁니까?”

“그렇기도 하고.”

성장통이 끝나고 어른의 반열로 들어선 줄 알았건만. 그건 자신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자신은 그저 죽은 동생도 외면하고 나 살고자 보물만 찾던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시녀가 상서로운 기운이 들어오도록 열어 둔 창문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바람에 실린 환호성들을 듣던 공주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혼자만의 추모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떠난 사람들에게 행운을 비는 시간도.

* * *

돌도 던져 보고, 그 검이 문제인가 싶어 뽑아 보려고 해 보았고, 어깨로 부딪쳐도 봤지만 신의 뜻인 장벽을 무너뜨릴 순 없었다. 히아신은 공황에 빠진 그녀가 돌을 던질 즈음부터 포기할 조짐을 보였다. 검을 뽑으려고 할 즈음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나디사는 그 푹 꺼진 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만 이별의 불을 끄고파 죽어라 뛰어다니고 있고, 그는 이별을 준비하는 것처럼 표정을 지웠다. 결국 체력이 다한 나디사는 흐른 땀을 닦으며 그 장벽 앞에 주저앉았다.

“너, 뭐야.”

그때까지 그녀 혼자 하는 일들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히아신이 차례가 된 듯이 걸어 나왔다. 그는 장벽을 넘어서려고 하면 고통까지 받는 모양이었다. 해서 이쪽이 없애 주고 싶었다.

“왜 그래. 그럼 지금 그 안에서 죄인처럼 살겠다는 거야?”

받아들이겠다는 양 웃고만 있는 그에게 이제는 배신감까지 들려고 한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파르난의 문양을 가진 사람들은 저쪽 땅에서 못 나오는 모양이었다. 차갑고, 생기 없는 얼굴로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사람처럼 살 이유가 히아신에겐 없었다. 파르난의 문양을 가진 사람 전부를 이 땅에서 소멸시킬 생각인가 보지. 나디사는 그 처벌에 동의할 수 없었다.

“뭐라고 말을 해, 히아신.”

“나디사.”

“그래.”

“있지.”

그답지 않게 말을 끄는 히아신의 시선이 상처투성이가 된 손 위로 내려앉았다. 들 무기가 없던 나디사가 맨손으로 돌을 던지고, 박힌 검을 빼내고 하다 보니 상처가 늘었다.

파르난을 택한 이들의 당연한 결말인지도 모른다. 작게 보면 그들의 일은 비극이나 크게 본다면 그토록 바라던 평화가 온 것이다.

이 평화를 가져온 여인의 얼굴이 자꾸 보고 싶을 것 같다는 문제만 뺀다면.

“앞으론 여기 오지 마.”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음.”

“포기하겠다고?”

“맞아.”

“무슨 말이야.”

“오지 말라는 소리를 모른다는 건 아닐 텐데. 너와 작별이란 소리기도 해.”

히아신은 만질 수 없는 그녀의 입술 감촉, 손끝 향기, 머릿결이 어땠는지 잊을 수 없었다. 저기 기가 막혀 입을 벌리고 있는 여자가 한 몇 달은 울고불고했으면 좋겠다. 그리고는 깔끔히 잊는 거다. 기억력 좋은 그는 잊지 못하겠지만, 아마 물 좋고 꽃이 피는 곳에 사는 그녀는 잊을 거다.

“훗날 말이야, 나디사.”

히아신은 그녀가 준 물건 하나를 가슴에 품고 있음에 감사했다. 아마 신이 주신 마지막 자비이겠지. 그의 흘러가는 삶을 축복하듯 움직이고 있는 시곗바늘은 그의 잔인한 운명과도 같았다. 멈춰 있던 자신의 삶을 다시 걷게 만든 여자였다. 새로운 삶을 본 것만으로도 그녀는 사랑보다 더한 것을 준 셈이었다.

“나는 아주 멋진 해벗 종족으로 기억되겠지. 최후이지만 최초로 사랑을 받고, 멋지게 끝난 남자. 자살하지 않고, 누구 손에 죽지도 않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지도 않고, 사랑하는 사람 손에 죽지도 않은 남자로.”

“히아신…… 제발 그러지 마.”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너를 포기하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아무리 나라도 신의 운명 앞에서 너를 걸고 도박할 순 없어. 네가 이 장벽 앞에서 폐인처럼 사는 것도 바라지 않아. 나는 이제 보는 것 말곤 해 줄 수 있는 게 없거든.”

그게 마지막이었구나. 그녀와 얼기설기 지은 작은 오두막에서 시간을 보내고, 정 많고 눈물 많은 그녀의 부모님과 저녁을 먹고. 텅 빈 그의 삶에도 걸어 놓을 만한 순간들을 선물해 주었다. 이 이상 미련을 내면 나디사의 삶에 걸린 것들이 하나둘 파괴되겠지.

그녀의 다친 손을 보며 든 생각이었다. 히아신은 여전히 돌고 있는 시곗바늘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그 뚜껑을 닫았다.

“네가 그랬잖아, 나디사. 너 없이도 흘러가듯이 살아 보라고. 그럴 작정이야. 너도 그렇게 살아, 나디사. 나 없이 흘러가듯이. 저 안에서 나는 죽지 않고 버텨 볼 테니. 너는 이 바깥에서 죽음 같은 건 모르고 살았으면 좋겠어.”

“잠깐!”

나디사는 그의 말들이 흐릿해지는 게 무서웠다. 마지막일지도 모를 말들이 두려움에 밀려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의 말을 글로 작성하여 영원토록 지니고 다녀야 하는데. 이 자리를 떠나면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이별의 시간이 더 길어지지 않게 하려는 듯이 차가운 몸짓으로 돌아섰다. 엉망인 옷을 하고서 돌아서는 그의 모습이 마지막이긴 싫었다. 이게 끝이긴 싫었다. 저 할 말만 하고서 떠나는 히아신은 싫었다.

“여기서 매일 기다릴 거야! 히아신, 나 여기 매일 올 거라고.”

하지만 히아신은 가볍게 손을 흔들며 저 노을도 지지 않는 땅을 걸었다. 나디사는 돌아보라는 듯이 장벽을 치며 불러 세웠지만 그는 자신이 택한 땅을 거닐었다. 마지막은 그랬다. 하지만 그녀는 이 마지막 날 이후엔 함께 할 방법을 찾으리라고 맹세했다.

나디사는 자신이 한 말을 지켰다. 매일같이 사람들이 축복받았다고 말하는 그 장벽 앞으로 가 본다. 하지만 히아신은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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