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딱딱한 돌과 같은 땅에서 쭈그리고 앉아 잤음에도 며칠 쉰 것처럼 몸이 개운했다. 밤새 따듯한 손과 품으로 감싸진 그녀는 추위를 몰랐고, 악몽을 꾸는 입술에 입을 맞추고 머리를 쓸어 주는 히아신이 있어 깨어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 자신을 배신할 리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오늘 그가 보인 행동을 보면 마음은 시험에 들었다.
“정말 여기라고?”
솔직히 그녀도 추궁하듯이 묻고 싶지 않았다. 동료라곤 하나 남은 히아신을 의심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기에. 가는 길만 제대로 됐더라도 이런 말이 나오지 않았을 터다. 그는 뱀의 허리처럼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서 걷다가, 일부러 좁고 어두운 절벽 길로 가고 있었다.
파르난의 사람을 만나면 큰 낭패라 알려지지 않은 길만 고르는 거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의 태도였다. 대답도 넙죽넙죽 잘하고, 표정도 어제와 다를 바 없이 따듯했으나 그와의 사이엔 분명한 거리가 있었다.
“히아신.”
“조금만 더 가면 돼.”
손을 잡아 주지도 않고,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사랑한다는 말이 그와 가깝게 해 줄 줄 알았지, 설마 그와의 사이를 벌리는 말이 될 줄은 몰랐다.
어저께의 그 고백은 그녀답지 않은 말이긴 했다. 다시는 이렇게 말할 수 없겠다는 충동이 전부인 고백이었고, 고백하고 난 후에는 그의 변화 없는 표정을 보며 조금 후회했다. 무거운 마음일수록 가볍게 털고 끝내면 좋았을 것을. 그녀의 고백은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아서 그에게 닿지 못한 모양이었다.
비어 있는 그의 손을 보며 나디사는 슬픈 눈을 내리깔았다. 히아신이 긋고 있는 선이 안 보이는 둔한 눈을 가졌으면, 저 예쁜 손을 그냥 마음 놓고 잡아 보았을 텐데.
“나디사.”
“응.”
손을 잡고 싶다는 열망을 들킨 것처럼 나디사는 당황한 표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하지만 모든 장면을 보고도 히아신은 미동 없는 자세로 앞을 가리켰다.
“저기야. 보여?”
나디사는 올라서 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잠을 잔 뒤로 통증을 줄었지만 힘이 예전만큼 들어가지 않는다. 히아신은 그런 사정을 모를 텐데도 말없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말고 나디사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잡고 싶었던 그의 손은 아기처럼 보드랍고 따뜻했다. 돌부리에 걸리지 않게 한쪽 팔로 그녀의 몸을 들어 올려 준 히아신은 잠시의 여운을 즐기듯 손을 놓지 않았다.
가파른 돌 언덕을 올라온 후에 불어오는 바람은 기이한 냄새가 섞여 쿰쿰했다. 이럴 때면 그녀도 라드이고 싶었다. 라드와 정신을 연결하여 고통과 감정을 나눈다지만 그녀에겐 실질적인 날개가 없었다. 아무런 걱정 없이 히아신을 태우고 저 멀리멀리 날아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나디사. 준비는 됐어?”
“어디로 가면 돼.”
“저 밑에.”
히아신이 말한 밑은 아무것도 없는 구멍 하나가 뚫려 있었다.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어둠 앞에서 나디사는 망설였다. 손을 맞잡고 있는 히아신은 두려움을 잘 아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가고 싶지 않으면 여기서 나랑 살래?”
“……그럴 수 있어?”
이 대답은 실수였다. 히아신은 농담을 진담으로 받는 그녀 때문에 금세 웃음을 잃은 듯했다. 사실 그녀는 그가 그런 말을 하지 않을까 오랜 시간 고민해 왔다. 그를 받아 주어 조용한 시골 같은 곳으로 내려가 집을 짓고, 아이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되는 그런 조촐한 꿈을 꿔도 되는 걸까. 하지만 히아신은 차갑게 고개를 저으며 아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거기가 가야 할 곳임을 일러주는 듯이.
“친구들은 어떻게 죽어도 상관없는 거야? 매정한걸.”
맞는 말이지만 그 또한 상처였다. 나디사는 그를 따라 하듯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히아신의 손을 놓지 않고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어둠은 깊고 거대하지만 히아신이 있으니 괜찮을 거다.
히아신은 나디사가 준비됐다는 걸 알고 절벽 끝에 발을 걸쳤다. 뛰어내리기 전 시선을 맞춘 두 사람은 아름다운 말 같은 것을 나누지 못했다. 수줍게 웃고, 차갑게 모른 척했을 뿐. 이내 두 사람이 뛰어내리고 어둠이 찾아왔을 때 나디사는 잡은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떨어지는 그 소름 돋는 느낌은 잠깐.
풍덩, 물에 빠지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바닷속에 들어온 것처럼 녹진하고 무거운 공기가 그녀의 숨을 막고 있을 때 잡아 올려 주는 손이 있었다.
나디사는 그걸 놓치지 않고 발에 딛는 모든 것을 차면서 위로 올라갔다. 생존하려는 처절한 몸부림 끝에 그녀는 어두운 그 공간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고개를 들자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 속을 통과했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숨이 가빠졌다.
“잡아, 나디사.”
몸은 젖지 않았으며 자신은 땅을 짚고서 엎드려 있었다. 다가온 히아신의 손을 잡고서 일어난 나디사는 하얀 설원의 배경을 마주하고 여기가 어딘지 알아차렸다. 그리사, 아트리스만 두고 떠난 그 옛 신전이 있는 설산의 정상이었다.
뺨을 에는 시린 바람이 반갑기는 또 처음이었다. 이 일로 히아신은 그들의 편임이 증명되었다. 임무를 마치고 나면 간곡히 부탁해 그를 사면받게 할 거다. 이번 임무엔 그의 공이 컸음이었다. 기쁨에 찬 나디사는 연신 뒤를 바라보며 정상을 뛰어다녔다.
“그리사! 아트리스!”
이곳에서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을 거다. 동료들은 자신이 살아있다고 굳게 믿으며 다른 곳으로 가지 아니했을 사람들이다.
“어디 있어! 그리사!”
히아신의 도움으로 무사히 파르난의 땅에서 돌아왔다는 걸 알린다면 그간 쌓인 오해도 다 풀 수 있을 터다. 히아신은 그녀가 찾게 내버려 두려는 듯이 뒷짐을 진 자세로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서둘러 라드들을 세워 둔 장소까지 가 보았으나 나디사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사람, 짐승, 그 어떤 생명도 없는 빈 정상을 미친 사람처럼 헤매었다. 그녀의 미소가 사라진 건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정상에서 피 냄새를 맡았을 때였다.
“아트리스…….”
점점 동료들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자신감을 잃어 간다. 확인해 볼 곳은 신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달려가 닫힌 문 앞에 선 나디사는 손을 뻗지 않고서 멍하니 그 문을 바라봤다.
“안 들어가?”
“……잠깐.”
이 안에 무엇이 있더라도 문을 여는 행위만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침착하게 눈을 뜬 나디사는 신전 손잡이를 잡은 그를 저지했다. 무표정한 히아신은 흔쾌히 손을 놓았다.
“직접 열어, 나디사.”
칠이 벗겨진 황금색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끼이이이익, 여기에 보물이 있을 거라고 믿으며 기대감 가진 그때와 다른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침묵하는 설산의 의미가 제발 그들의 죽음을 뜻하는 건 아니길 빌면서.
입을 닫고 있는 신전 안은 불꽃이 지키고 있었다. 몇백 년간 방문하는 이가 없었을 신전의 고독함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걸음마다 실린 두려움은 마주한 현실 앞에서 멈추었다.
“이건, 아니야.”
그리사, 아트리스는 입가에서 피를 흘린 채로 쓰러져 있었다. 납치된 줄 알았던 란도 여기에 누워 있다. 고문을 당한 듯이 코는 부러져 멍을 달고, 상처 난 손목에서는 강의 물줄기처럼 피가 흘렀다. 그 피는 신전 그릇에 담기고 있었다.
동료들은 나디사가 돌아온 것을 보지 못하고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차가운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자 발을 내뺀 순간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는 이가 있었다.
그래, 아직 히아신이 있다.
“어디 가게, 나디사.”
도망치지 말고 맞설 용기를 얻고자 그를 바라본 차였다. 그는 어디로 가지 못하게 그녀의 팔을 붙잡은 뒤 고개를 숙였다.
나디사는 갑작스러운 건조한 입맞춤에 당황했다. 이것 좀 놓으라며 버둥거리는 사이 입 안으로 어떤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당황한 그녀가 넘겨준 액체를 삼킬 때까지 그는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때마침 화려한 천사가 조각된 약병이 그의 손에서 떨어졌다. 빈 병은 신전 바닥을 이기지 못하고 깨어졌다. 원하는 만큼 액체를 넘긴 히아신이 입술을 닦았다. 비열한 미소는 덤이었다.
“아버지.”
“히아신…….”
“명대로 했으니까 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