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히아신은 생각했다. 나디사 마로닌을 이 땅으로 데리고 오려 했던 적이 있었으나 그건 잘못된 계획이자 헛된 꿈이었다고. 나디사 마로닌은 이 땅과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여기서 나는 작은 생선조차 입에 대지 못한다. 그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사랑의 물약을 마시고 여기까지 끌려왔다면 얼마 못 살고 죽었을 거다.
“너를 믿냐고 묻다니.”
“그렇잖아. 내가 사라지자마자 파르난의 군대가 쳐들어가고. 나는 나타나니까 너의 동료들이 다치고 너를 여기로 데려왔어.”
히아신이 알고픈 것은 단지 그녀의 마음이었다. 그는 그녀의 곁으로 돌아오고파 최선을 다했고, 무슨 짓이든 했지만, 그게 그녀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를 일이었다. 배신으로, 혹은 기만으로도 보일 만한 일들이 다수 있었다. 그로 인해 그녀의 마음이 변했는지가 궁금했다. 사랑을 달라는 게 아니었다. 그를 동정하고 안타까워하던 마음만으로도 족했다.
“그래서 너를 믿냐고.”
“궁금하네. 나도 배신자로 보이지 않아?”
나디사 마로닌은 처음 그가 만났을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돈이 없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흥정하던 여인에게 동료와 명예가 생겼다. 히아신쯤은 하찮은 옛 남자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다음 일을 위해선 확신이 필요했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야 다음엔 어떻게 될지 구상해 볼 수가 있으니까.
하지만 무슨 말을 해 보려던 나디사는 헛구역질 몇 번을 하더니만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작은 몸이 들썩거릴 정도로 기침을 하는데 그 소리가 범상치 않았다. 한 입 먹은 생선이 잘못됐나 싶어 긴장하고 있던 히아신은 차츰차츰 표정이 구겨졌다. 여유로운 태는 다 벗어던지고 몸을 일으켜 그녀의 앞에 무릎 꿇었다.
“나디사. 왜 그래.”
한순간 그를 둘러싸고 있던 가면이 벗겨졌다. 그저 바라만 보는데도 몸이 반으로 갈라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히아신은 어찌할지 모르는 손짓으로 다급하게 그녀의 마른 입술을 쓸었다. 약간의 피가 묻어나온다. 그것을 보고 이성을 챙길 마지막 정신을 놓아 버렸다.
“괜찮아.”
“이게 괜찮은 거면 진짜 안 괜찮을 땐 어떻게 되는 건데. 죽기라도 하나?”
“조금, 이러다가 말아. 연달아 힘든 일이 있어서…….”
“도대체!”
히아신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목숨을 거는 듯 보여도 사실은 모든 게 목숨을 지키기 위한 행위였다. 사람은 때론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하고, 굴복할 줄도,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녀처럼 모두를 구할 재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제 목숨이 아까워 숨는 사람이 있더랬다. 왜 하필 자신의 사랑이 이런 여자여야 했을까. 모든 것이 정반대되어 경이롭게도, 반대로 안타깝게도 느껴진다. 제 안에 살아 있는 줄도 몰랐던 동정심과 인간성이 수시로 그의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괜찮아, 히아신. 그런 표정 하지 마.”
“…….”
사랑은 어쩌면 자신 안의 있던 특별함을 깨닫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존귀하며 이 세상에서 무서울 것 하나 없는 사람인 줄 알았던 자신이 사랑에 아파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모든 걸 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임을 깨닫는 게 사랑의 목적인지도 모른다. 히아신은 죽어 가고 있음에도 괜찮다는 그녀에게서 무력함을 배웠다.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나라를 멸망시킬 수도 있으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듯한 그녀의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도 없다. 그녀가 그걸 진정으로 원한다면 히아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히아신.”
“…….”
“나를 미워한 사람도 있고, 내가 미워한 사람도 있는데. 지금은 둘 다 그게 맞았던 건지 모르겠어. 하지만 확실한 거 하나는 깨달았지. 너를 다시 만나면 이 말도 하고 싶었고.”
“죽이고 싶다고? 다신 보지 말자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거야.”
사랑은 너무도 쓰고 아프기에 달콤한 말들로 감추어 둔 것이겠지.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엔 향기가 묻어나왔다. 처음 맡아 보는,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말이었다.
입술과 눈은 미세하게 커지고 벌어졌으나 히아신의 목에선 말이 나오지 못했다. 죽음을 앞둔 것도 아닌데 그녀와의 첫 만남부터 지금 이날까지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끝내 자신의 속마음을 말한 것이 후련해 보이는 그녀가 부러웠다. 그는 사랑한다는 말이 두려운 소년 시절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계획에 그는 일부일 뿐일 것이다. 그리고 나디사도, 그 사라진 신관도. 아무것도 모르는 희생정신만 가진 여인에 불과한 그녀는 감당할 수 없을 거다. 패배하여 죽고 말 거다. 그리고 그건 간신히 만들어진 그의 세계를 부수는 일이었다.
“나디사.”
“응.”
고백을 마친 그녀의 입술이 너무나도 탐스러웠지만 히아신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이 사랑스러운 사람은 이따위 땅에 머무르거나 누군가의 도구로 쓰여선 안 된다.
“너는 나약한 사람이야.”
“… 뭐?”
“그러니까 영웅이라는 말에 속지 마, 나디사. 그건 너를 그렇게 만들고 싶은 사람들의 말일 뿐이니까. 거기에 모든 것을 바치지 말란 말이야.”
히아신은 한번 대들어 볼 생각이었다. 저주받은 자신의 종족 중에서 아마 최초로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사람이 됐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바람이 멎고, 종이 치고, 꽃이 피는 황홀한 경험은 하지 못했지만. 그는 나디사의 뺨에 입을 맞추지 않아도 사랑이 무언지 알 수 있었다.
“출구는 내가 알고 있어. 그 신관이 어디에 있을지도. 아침에 데려다줄게.”
“……그럼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어.”
“이 시간을 더 길게 끌고 싶어서 말이야. 너랑 단둘이 있을 시간.”
아니, 거짓말이었다. 히아신은 내내 갈등하고 있었다. 나디사를 데리고 도망갈 것인가. 나디사를 속이고 같이 떠나 볼 것인가. 어쨌든 아버지의 계획이 일어나고 있는 그 산맥의 정상으로 다시 그녀를 데려갈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버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거기서 제외되고만 싶었다. 나디사와 안락한 벽돌집을 짓고 아이도 두셋쯤 낳으며 아버지 소리도 들어 보고 싶었는데.
“오늘 밤은 자 둬. 그간 마음 편히 자지도 못했을 텐데. 우리 공주님.”
사람 죽이는 일 말고 조금 더 쓸모 있는 일도 배우고, 자랑스러운 아버지라는 아이들의 칭찬도 듣고, 아내와 늙어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도 싶었는데.
“미안해. 조금만 잘게…….”
“응, 이리 와.”
가지고 있던 유일한 겉옷을 그녀의 이불로 내어 주었다. 그의 팔은 안락한 그녀의 베개가 되었다. 이런 밤도 겪어 봤으니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한 가지도 억울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 값은 다 치른 셈이었다.
히아신은 평범한 사내처럼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더럽고 추운 평야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대로 아침이 올 때까지 끌어안고 있을 줄은 몰랐던 히아신은 오랜만에 개운한 아침을 맞았다.
그리고 히아신은 누가 보길 바라는 것처럼 주머니 속에 숨겨 둔 물약을 꺼냈다. 영롱한 빛깔의 물약은 어둠뿐인 땅에서도 햇볕처럼 빛이 났다. 그의 역할이 이것이라면 훌륭하게 해낼 자신이 있었다. 히아신은 나디사가 깨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하늘을 향해 속삭였다.
“계획대로 나디사를 제 거로 만들고 싶어요. 길을 알려 주신다면 참 좋을 텐데.”
그 수많은 세월을 겪은 히아신은 아버지의 힘을 무시하지 않았다. 파르난은 아버지의 땅이었다. 어디에든 듣는 귀가 있겠지.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자신의 행복을 빌어 줄 리 없다는 걸 잘 알았고, 아버지는 사랑 때문에 매우 특별해지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랑에 빠진 평범한 사내일 뿐이었다. 마침내 그렇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