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파르난은 신에게 버려진 땅이었다. 도무지 이 세상의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새까맣기만 한 땅은 끝이 없었다. 구체 속에서 벗어난 나디사는 서서히 정신이 들수록 그의 향을 느꼈다. 온기가 느껴지는 등도, 그의 살내음이 나는 겉옷도, 그의 어깨에 올려진 자신의 손을 모르는 척 힘주어 안아 보았다. 새끼 새를 안듯이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이 안겨 들었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 속이려고 들어도 이것까진 속일 순 없지.
“깨어났어?”
하지만 그가 눈치가 빠르다는 사실은 인정하는 게 좋겠다. 조금 더 그의 등을 느끼고 뭉개 보려던 나디사는 눈을 뜬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한마디 하게 되면 그가 안개처럼 없어지거나 끝날 것 같았다. 그건 싫었다.
“나 칭찬해 줄 거 생겼는데.”
“……어떤.”
하지만 여우 같은 그의 계략은 워낙 훌륭하고 출중하여 나디사가 결국 말을 걸 수밖에 없게끔 했다. 히아신은 그 똑같은 것 같은 땅 중에서도 다른 것 하나를 찾아냈다. 나디사의 눈엔 거기서 거기인 땅을 발끝으로 툭툭 치더니만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얌전히 내려 주어 땅바닥에 앉게 된 나디사는 손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었다. 히아신이 잠시 사라졌다가 나타나면 손에는 도톰한 요가, 장작더미가, 그리고 작은 생선 두 마리가 잡혀 왔다. 황무지처럼 드넓기만 한 이곳에서 어떻게 저런 것들을 가져왔나 궁금하긴 했지만 나디사는 궁금증을 잠시 접어 두기로 했다.
그는 얌전히 다가와 불을 피우고, 생선을 구웠다.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그녀와 마주 앉게 된 순간에도 히아신은 경계를 놓지 않았다. 한참 그가 여유 있기를 기다렸으나 도무지 경계가 풀릴 것 같지 않아 나디사가 먼저 물었다.
“칭찬해 줄 게 어떤 거였는데.”
“응?”
자기가 말을 해 놓고 잊어버렸는지 히아신은 얼마간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곧 아까의 기억을 떠올리곤 활짝 웃는 얼굴로 바뀌었지만. 그의 따듯하고 다정한 입매에 나디사는 금세 풀어지는 표정이 됐다. 따듯한 불꽃이 가려 주는 그의 미소가 가슴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한동안 민망함을 웃음으로 지우려는 것처럼 웃기만 하던 히아신은 다 구워진 생선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거 한 입 먹으면 이야기해 줄게.”
“……여기 근처에 강이 있어?”
“사람 사는 데가 있어.”
“여기에?”
묻고픈 것들이 많았다. 아무것도 없는 까만 땅을 바라보다가 나디사는 그 생선을 받아들었다. 빤히 보는 히아신의 시선에 못 이겨 한 입을 한 나디사는 천천히 눈을 크게 떴다.
“맛없지.”
“응.”
“그래도 먹어, 나디사 공주님.”
살점은 퍼석하고 냄새는 말할 수 없이 비렸다. 배가 고파서 아무거나 막 주워 먹어도 될 것 같던 나디사의 배도 이건 좀 아니라며 거부하는 중이었다. 속이 뒤집히는 기분에 입을 다급히 틀어막아 봤지만 히아신은 이미 그녀의 반응을 예상한 듯이 태연하기만 했다.
“원래 생선이 이런 맛이 아니라는 걸 나는 여기 바깥에 나갔을 때 기억이 났어. 아, 맞아. 어렸을 때 먹었던 생선은 이런 맛이었지! 하면서.”
“…….”
나디사는 여기가 파르난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불안한 듯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생선 살을 발라 먹으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는 히아신이 이해가 됐다. 그녀는 푸른 망토에, 새하얀 셔츠와 바지인 라드군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는 파르난이었다. 적진 한복판에 떨어진 것이었으나 히아신과 함께 있어서 그런지 그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만큼 안일한 저를 대신해서 그가 잔뜩 예민해진 것 같아 미안할 따름이었다.
“칭찬받을 게 무언데.”
“아, 맞아. 우리 그 이야기 중이었지?”
“그리고 넌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던 거고.”
“……그 이야기는 조금 길어서. 이 이야기 다음에 하면 안 될까?”
그리고 히아신은 잔망스러운 눈짓으로 그녀가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생선을 가리켰다.
“저것도 마저 먹고. 아주 맛있지는 않지만. 먹다 보면 먹을 만해. 그리고 먹어야지 여기를 나가지.”
“……너도 같이?”
저 맛 없는 생선을 어찌 그렇게 잘 먹을 수 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히아신의 입은 쉬지 않았다. 강박적으로 생선의 옆구리를 뜯어 내고 있던 히아신은 천천히 씹는 동작을 멈추었다. 같이 가냐는 말에는 자신이 없는 것처럼 눈빛이 흐려지더니만. 목소리 하나는 그녀를 속일 수 있을 만큼 다정하고 달콤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너 보고 싶어서 여기 탈출했는데. 또 여기에 나 혼자 오면 안 되잖아. 그리고 아까 봤듯이. 나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 여기에 되게 많아.”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
히아신이 자의로 돌아간 것이 아니란 말인가. 여기서 탈출하려고 했다는 말에 코끝이 찡해진 나디사가 황급히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순간적으로 그녀는 잊고 있었던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기억해 내고 말았다.
“란.”
그 남자가 란도 함께 데려왔다. 파르난의 땅에 떨어진 신관을 이리떼처럼 잡아서 뜯어먹으려고 할 것이었다. 생선을 먹을 때가 아니란 생각에 이마를 짚은 나디사는 차갑게 깨는 웃음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히아신은 와중에도 생선 뼈를 버리면서 웃고만 있는다. 란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그녀는 죽은 목숨이라는 걸 알 텐데도.
“란은 어딨어.”
“몰라.”
“모른다고?”
“일어나 보니 그 자식은 죽어 있었고. 란이란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어. 이 땅에서 얼마 못 가서 쓰러져 있을 텐데…… 아니면 잡혔나?”
장난치듯 말하는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봤다. 처음 보았을 땐 다시 만났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여윈 듯한 뺨이나 부르튼 손 등을 보지 못했었다. 고생한 듯한 그 손을 보자마자 나디사의 감정은 바닥을 쳤다. 헤어 나오기 쉽지 않은 감정이다. 꿈으로만 여겼던 그의 행보가 자신의 뒤였다는 게. 그 짐승을 잡아다 주고, 동굴을 구해다 준 것이 그였다는 게. 제 뒤를 지키느라 상해버린 그의 얼굴을 알고는 한숨이 나왔다.
“왜 숨어 있었어.”
그 사이 생선 한 마리를 다 끝장낸 히아신은 검게 물든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남은 것까지 모조리 삼킨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참을성 없는 그녀의 질문이 그새를 못 참고 또 들어왔다.
“왜 인사도 없이 갔던 거야. 왜 배신자가 된 거고. 갑자기 너희 사람들이 공격한 것도 이유가 있어?”
“목소리가 너무 커, 나디사. 여기는 굉장히 위험한 곳이라고. 너는 라드가 없고. 나도 무기가 없어. 바보처럼 검이 하나 생겼는데 놓아주었거든.”
그리고 히아신은 그녀의 질문을 듣지 못한 것처럼 장작을 불꽃에 넣었다. 화르르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을 보며 나디사는 분한 마음이 들었다.
수십 번 그와의 재회를 꿈꾸고, 기다렸다. 어떨 때 그녀의 상상은 죽음이 다 온 노인이 된 경우에 이루어진 적이 있었고, 어떤 상상은 삭막한 전쟁에서 그가 그녀를 죽일 때도 있었다.
그것들은 두려움으로, 설렘으로 그녀를 괴롭히고 위로했다. 하지만 삶은 예측할 수 없듯이 그녀는 그의 고향으로 들어와 원망을 비춘다. 그에게 따져 묻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쏟아 낸 감정을 들은 히아신은 타는 장작불 앞에서 낭만 없이 말할 뿐이었다.
“나를 믿어?”
이곳의 유일한 빛인 양 있는 장작불이 침묵 사이사이로 불똥 튀는 소리를 냈다. 긴 이야기가 될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