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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91화 (191/210)

191화

쨍그랑. 동고동락하던 검이 차가운 돌바닥에 부딪혀 내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다 멎을 때까지 상대도, 나디사 일행도 소리를 내지 못하고 치열하게 맞섰다. 정신 잃은 란의 피가 적의 손목을 적시는 걸 알면서도 나디사는 침착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의 틈이라도 보였다간 란의 목숨이 날아갈 테니 말이다.

“놓아줘.”

“뒤로 가.”

그리사는 쓰러진 아트리스의 팔을 본인의 어깨에 둘러 일으켰다. 어깨를 관통하기는 했으나 정신 하나만은 말짱한가 보다. 아트리스의 엷은 숨소리가 가엽고 안쓰럽다. 하필 여신상에 피가 떨어져 눈물처럼 표현됐다. 다른 것도 아니고 돌그릇에 담긴 란의 피가 도와달라는 뜻처럼 보였다.

나디사는 뒤로 걸음을 물렸다. 그리사도 땀을 흘리며 아트리스의 무게를 지고서 뒤로 이동했다. 횃불이 비추어 주던 얼굴이 밖으로 나가자 원색으로 돌아왔다. 차차 어두운 바깥으로 몰려 나가는 때에 칼을 든 파르난의 사람은 더한 걸 요구했다.

“더 가.”

그의 말대로 더 간다면 뒤는 가파른 언덕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눈 폭풍에서 구른다고 하더라도 털옷이 있다면 얼마간 버티겠지만 그것도 다 벗어 둔 상태였다.

- 으르르르.

제 주인에게 위협이 되는 건 알게 된 라드들이 떼로 일어나 목울음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명확한 인질을 쥔 파르난의 남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마뱀이라는 멸칭을 쓰며 뒷걸음질 중인 나디사에게 명령했다.

“저것들 못 움직이게 해.”

“…….”

“응?”

란의 목에 칼이 있는 이상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한 손을 들어 로마와 디디를 진정시키려고 하던 차에 그리사가 조용히 속삭였다.

“뒤에 누가 있어요.”

“우리 뒤에?”

그리사의 말마따나 그들의 뒤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졌다. 앞뒤로 포위를 해서 한꺼번에 죽일 생각인가 보다. 검을 놓고 온 것이 생각난 나디사는 영혼이 연결된 디디, 로마에게 속마음을 전해 보려 했다.

“눈짓 하지 마. 어?”

하지만 기민하고 눈치가 좋은 파르난의 남자 둘이서 침묵하고 있는 두 라드군을 압박한다. 거리를 좁혀 오고, 뒤에 있는 남자가 그리사의 거의 지척까지 온 그 순간이었다.

나디사의 계획은 아주 단순하고도 위험천만했다. 라드인 디디, 로마를 이용해 란을 구출하고 그 틈을 노려 자기가 달려드는 방법. 어디 하나 치명상을 입을 게 분명한 그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더 뒤로 가면 그리사가 다칠 거고, 달려들면 란이 다치니.

시작이었다.

<라드인 디디, 로마를 이용해 란을 구출한다>

그 작전을 시행하기 위해 로마, 디디와 시선을 공유했다.

“아아악!”

그때 아트리스가 당했던 것처럼 파르난의 왕자의 어깨에도 검이 꽂혔다. 정확히 심장 부근이었다. 란의 목을 위협하던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바람에 의식 잃은 란의 몸도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어쨌든 위기는 벗어난 셈이었다.

제 심장에 박힌 칼이 믿기지가 않는지 손을 벌벌 떨던 남자가 흰자위를 보였다. 그대로 입에 피거품을 문 남자의 목숨은 간당간당해 보였다. 때마침 심장에 박혀 있던 검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그 틈을 노려 내가 달려간다.>

머릿속에서 짜둔 계획이 한순간 멈추었다. 적군인 파르난의 남자가 옆으로 쓰러지며 나타난 사람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계획대로 달려가고 싶어졌다. 못난 발이 앞으로 가고파 움찔거렸다. 꿈에서도, 망령의 농간에서도 남자는 항상 저 얼굴이었다. 멀끔하게 생긴 얼굴로 그녀의 꿈을 망치고, 죽이려고 들었었다.

“저거, 히아신 아니에요?”

하지만 저 남자는 자신의 동족을 죽였다. 칼을 든 남자가 마침내 저와 눈을 마주쳤을 때 마지막 계획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안녕, 잘 지냈어.

그런 말을 해야 하는 걸까.

도대체 어디에 있다가 온 거야.

그렇게 화를 내야지 다시는 어디에도 가지 않을까.

소심한 자신이 그중 어떤 것도 고르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환영해 줄 수도, 쫓아낼 수도 없는 어중간한 입장인 그대로니까. 이거 하나만 빼면 말이다. 그에게 연신 쏟아붓고 있던 감정의 이름은 그리움이자 원망이었고,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뛰고 있는 심장이 보증해 주었다.

“나디사!”

사람의 어깨를 치는 느낌에 휘청거렸다. 뒤에 있던 남자를 잊고 있었다. 재빠르게 뒤돌아보니 뒤에서 잠복하던 남자가 앞으로 달려간다. 그리사, 아트리스에겐 피해가 없는 모양이지만 이내 앞쪽에서 챙, 하고 검끼리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히아신!”

꿈에서도 아까워 부르지 못했던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신전에서 놓친 자신의 검을 주워 들어 달려든 남자와 맞서고 있었다. 그 남자는 히아신에 대한 원망을 감추지 못하고 서슬이 푸르렀다.

“이 배신자 놈이!”

“조심해. 뒤에 있는 쟤네 내가 아는 애들이니까.”

검과 검끼리 맞서고 떨어지는 동안 나디사는 그를 도울 방법을 모색했다. 히아신이 저렇게 잡아 주는데 넋을 놓고 있을 게 아니었다. 그리사도 히아신이 나타나 몹시 놀란 모양이지만 반듯한 자세를 갖췄다. 나디사, 그리사는 이참에 라드를 부르자고 눈빛을 교환했다.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

핏빛 절규가 느껴지는 목소리 뒤에 일어난 일은 정확히 보지 못했다. 상황만 보자면 남자가 검을 버린 뒤 히아신을 덮치듯 넘어뜨렸고, 그 때문에 히아신은 들고 있던 검으로 남자의 배를 찔렀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검은 구체가 열리며 쓰러진 남자가 란, 그리고 히아신의 손목을 잡아 그쪽으로 끌었다.

머리카락 끝이 앞으로 날았다. 바람이 일어 구체 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미 히아신의 발, 그리고 란의 상체가 그 구체 속으로 들어갔다.

만나자마자 이별이었다. 잊지 않아 고맙다는 말도,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는 말도 못 했는데. 나디사는 단순한 감정에 사로잡혀 앞으로 뛰어갔다.

“안 돼요! 나디사!”

검은 구체로 들어가는 히아신의 신체 중 반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눈은 정확히 자신에게 달려오고 있는 나디사에게 있었다. 그 눈빛은 오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다. 란을 구할지, 저를 구할지. 시험하고 저울을 재고 있는 눈이었다. 나디사는 망설임 없이 달려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간 검의 손잡이를 놓지 않고 있던 히아신이 손힘을 풀었다. 자신에게 안겨 온 따스한 여인의 몸을 끌어안으며 흡수하려는 듯이 끌어안는다.

이윽고 구체는 란, 히아신, 파르난의 남자, 마지막으로 달려간 나디사까지 집어삼켰다. 다친 아트리스를 짊어지고 있어 허망하게 그 광경을 지켜본 그리사는 눈을 깜빡였다. 남은 건 라드들과 버려진 신전, 다친 아트리스뿐.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들이 모두 믿기지 않으나 바람이 불어와 현실을 일깨워 준다. 이것은 현실이라고. 여기서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아트리스는 상처가 심해 제정신이 아니었으나 간간이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눈도 뜨지 못하고 있는 아트리스에게 무어라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사는 체념한 듯이 웃은 뒤에 겨우 이 말을 할 수 있었다.

“……일단은, 상처부터 치료하죠.”

그것부터가 시작이었다. 착한 거짓말을 한 그리사는 조용히 하늘을 바라봤다. 밤하늘이 될락 말락 분홍색으로 옅어지는 하늘이 참 불길하게 다가왔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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