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기대가 너무나 거창하면 실체를 마주했을 때의 실망은 걷잡을 수 없다. 나디사는 이곳에 있는 것들을 보고, 듣고, 느낀 다음 공주에게 보고만 하면 되지만. 그 과정이 워낙 험악하고 가팔랐기에 란의 절규가 왜 저러는지도 알았다. 하지만 이해만 할 뿐이었다. 저 중요할지도 모를 그릇과 여신상을 발로 차려 하기에 그리사와 아트리스가 달라붙어 말리고 있었다.
“고작 이따위 것에!”
“좀! 진정하십쇼!”
“놔! 놓으라고!”
신전이 왕가를 우습게 보는 건 알았지만 이것은 참으로 해선 안 될 일이었다. 역사적 가치가 있을지 의심스러운 석상과 그릇이기는 하나 어쨌든 이걸 공주에게 가져가야만 했다. 신전의 모습을 간단히 스케치라도 하자 싶어 짐 가방을 뒤적거리던 나디사는 순식간에 진이 빠졌다. 란이 난동을 부린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진정이 되고 나서도 여신상과 그릇 이야기만 나오면 다시 신전으로 쳐들어가려고 했다. 그리사와 아트리스도 초반엔 진땀을 빼며 진심으로 말렸으나 갈수록 신전으로 들어가는 그를 두고만 보았다.
“어떻게 내려가지.”
“라드 타고 한번 가 봐야죠.”
“그게 통하면 좋을 텐데.”
“통하겠죠.”
지친 라드군 세 명은 바람 타는 새처럼 쪼르르 앉아 하얀 산밑을 내려다보았다. 정상에 올라오고 보니 저 밑에서 한 개고생들이 다르게 보였다. 실제 겪은 게 아니라 꿈만 같다. 아주 진저리 쳐지는 악몽 같단 말이다. 좋지 않은 여운에 잠겨 나디사는 트고 갈라진 입술을 깨물었다. 잊고픈 과거를 언급할 기회는 이때뿐이다 싶었다.
“나 말이야. 라넌 경과 같이 망령이 만든 어둠에 갇힌 적이 있었어.”
라넌 샤스의 죽음을 목격하고 공주를 구한 자라는 거창한 호칭을 목에 걸고 다니면서도 그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제 입으로 그녀가 죽어 가는데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고, 아무것도 몰랐다고 자백하고 싶지 않은 이기심이 있었다. 그리하여 꽤 오랜 시간을 침묵으로 뭉갰으나 생사를 건너온 지금에야말로 고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꿈 같았었어. 살아 있지 않은 사람들도 보고, 만나지 못한 사람도 만나고.”
죽은 친모를 그런 참담한 방식으로 보다니. 헤어진 히아신을 그런 속 쓰린 방식으로 보다니. 당혹스러움이 다였다고 생각했지만 그 후에도 생각이 나는 것을 보니 이것은 다른 감정이었다. 그리움보다 지나치고 증오나 미움은 아닌, 그녀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혀로 굴리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라넌 경이 죽어 갈 때 나는 몰랐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어. 그때 느낀 허망함 때문인지 종종 그분에 관한 꿈을 꿔.”
“…….”
“어두운 통로를 빠져나와 드디어 빛을 만났는데 마음은 더 어려워진 기분이야.”
조심스레 꺼낸 나디사의 말을 듣고 두 남자는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던 라넌 사건에 대해 들었음에도 해 줄 말은 여전히 없는 터였다. 감정을 해석하는 일에 서툰 사람 셋이서 먼 산만 바라봤다. 하얗고 고운 설산은 그들을 죽이려 했지만 이리 멀리서 보니 경이롭고 아름답기만 하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리 아름다워 보이다니. 사람의 삶, 그리고 사랑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사람은 말없이 따스한 눈빛으로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위로들을 했다. 듣고 가만히 있어 주는 것만으로, 라넌을 살리지 않고 무얼 했냐는 비난이 없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한번 내려가 보죠. 올라오는 것보단 쉬울 것 같으니.”
“그래. 힘내자. 이 임무가 끝나면 왕성에서 편히 쉴 수 있잖아.”
“보물 같은 건 없던 거죠.”
“그럴 것 같았어.”
햇볕이 떠나가며 생긴 그늘이 땅에 거미줄을 친다. 단순한 말로 다치고 힘든 몸을 위해 주고서 눈을 마주쳤다. 이곳으로 와 처음으로 걱정을 내려놓고 웃는 사이 아트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디에 있는 거지?”
신관 님에서 신관으로, 끝내 이 사람이 돼 버린 란이 이상스럽게 조용했다. 저도 신관이라고 진심으로 석상을 부술 마음은 없는 것 같아 내버려 둔 거였다. 괴성을 지르거나 시비를 걸지 않고 조용한 것이 의심쩍었다.
“란 님!”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던 라드들이 귀만 쫑긋거린다. 넓지도 않은 땅에서 듣지 못할 리도 없을 텐데. 설마하니 제 신력만 믿고서 다른 보물이 있나 찾으러 떠난 걸까. 그럴 가망이 없다고 해도 원하는 결과를 건지기 전까지 안 갈 심보이긴 했다.
망할, 짧게 말을 씹어 뱉은 아트리스가 지친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 뒤로 체념한 그리사, 나디사도 일어나 산책하듯 평평한 땅을 한번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망할 신관의 발은 신전 안으로 향한 듯했다.
“부디 부수지만 말아 줬으면 하는데요.”
“그러게. 저 안에 있는 건 챙겨 가야 해.”
“말이 안 통하니 말이죠.”
미친 란이 귀중한 자료들 부수는 상상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실망한 란의 표정은 파괴하고 싶다는 마음에 열성적이었으니 말이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들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신전 안쪽은 촛불을 켜지 않아 바깥에선 안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짜 맞춘 듯이 동시에 한숨을 내쉰 세 사람은 신전으로 걸음을 돌렸다. 어느 순간부터 할 일이 나누어 진듯했다. 그리사, 아트리스는 란의 팔 한쪽씩을 맡고 나디사가 그 안에 일을 수습하는 거다. 고대의 보물을 찾는 게 아니라 아이 보모를 맡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이니 한결 가벼운 기분으로 그를 찾으러 들어갔다. 수습을 맡아 먼저 들어선 나디사는 안이 어두워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뒤에 선 사람에게 불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하려는 순간 그 섬찟한 기운을 느꼈다.
“그리…….”
“알고 있어요.”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돌아섰건만 그 서늘한 그늘은 기어코 아트리스의 가슴에 아득바득 칼을 꽂아 넣었다.
“헉!”
비명 한번 못 지르고 가슴이 팽창한 그때에 칼날이 그의 어깨를 관통했다. 속수무책으로 아트리스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치는 걸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희생당한 아트리스의 몸을 그리사가 받았다. 모두가 정신이 없는 상황이지만 나디사는 낯선 그림자를 똑똑이 눈여겨보았다. 벽에 붙었다가, 기둥을 타고 오르고, 그다음은 천장, 바로 떨어진다. 세 여신의 석상 위로.
“그리사! 아트리스 잘 보고 있어.”
“라드를 부를게요!”
그 순간 불이 들어왔다. 있는 줄도 몰랐던 기름 잔에서 태어난 횃불이 하나, 둘, 켜지고 있었다. 빛이 강해 여신 위로 떨어진 그림자가 움직이는 방향을 놓쳤다.
그러나 그림자는 도망칠 생각은 없다는 듯이 버젓한 사람으로 변했다. 저렇게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들은 파르난 왕자들밖에 없다. 그리고 그 왕자라고 나타난 사람의 얼굴을 구경하기도 전에 잡혀 있는 란, 그가 처한 상황이 현실로 펼쳐졌다.
“자, 어디 그 도마뱀들 불러 봐.”
파르난 왕자는 웃는 얼굴로 말하고 있으나 란은 기절 상태, 그리고 하얀 목에는 칼이 들어와 있었다. 머리를 다친 듯이 핏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흘렀다. 체력이 빠져 기습에 당한 모양이었다. 상황은 최악에 치달았다. 그리사는 다친 아트리스를 보호하고 있고, 라드를 부를 수 없다면 그녀는 진정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어떡할래.”
그림자를 다루는 듯한 왕자가 지금껏 자신을 쫓아왔던 게 분명했다. 허리춤에 찬 검을 쥐고 있던 나디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는 새에 왕자의 칼은 란의 살갗보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다. 그의 목에서 떨어진 핏방울이 그릇에 담겼다. 저 그릇이 넘쳐흐를 때까지 고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히아신이 아니었구나.
정상까지 저를 쫓아온 그 어리석은 남자가 히아신이 아니라는 것은 다행이었다.
제 어리석은 마음을 곱씹으며 나디사는 천천히 검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