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과거 봄날의 꽃으로 가득하던 이곳이 눈덩이에 뒤덮이게 된 건 신의 분노 때문이라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말처럼 신의 분노 같은 눈보라가 몰아치더라도 사람은 언제나 신의 감정 따윈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이기심과 자만심에 방문하는 족속이었다.
하지만 나디사는 사람의 이기심이 아니라 명으로 인해 이곳을 온 차였고 사람의 마음은 위대한 자연 앞에선 얄팍해진다는 걸 체감하고 있었다.
“앞이, 안 보여.”
뿔여우 고기를 먹인 란의 몸이 회복될 낌새를 보이자 나디사는 성급하게 출발을 감행했다. 장황한 설명으로 나가 보자는 그녀의 말을 대부분 의심 없이 따라 주어 다행이었다. 하루라도 더 얼음 산속에서 있고 싶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고.
나디사가 말하지 않은 부분은 유일하게 그것이었다. 뿔여우를 잡아 온 건 본인이 아니며, 산밑부터 미행자가 따라오는 것 같다고.
원칙상 말을 했었어야만 맞지만 함구했다. 겉으론 그들의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라지만 실제 이유는 한 가지였다. 만에 하나. 십만분의 하나라도. 그 쫓아오는 사람이 히아신이라면, 추적한 동료에 손에 잡혀 나오는 사람이 히아신일까 봐서.
어리석은 미행자가 그 남자면 동료들에게 들킬 수 없었다. 그래서 배신자가 될지언정 함구를 택했다.
나디사는 미행자가 더는 쫓아오지 못하게 엄히 경고를 해 두고 다시 시작된 여정에 란을 앞세웠다. 자존심이 센 란은 빠지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자기가 쉰 시간만큼 보상하려는 듯이 맨 앞줄을 자처해 나갔다.
“멀었어요?”
“기다려!”
눈보라가 속눈썹에 달라붙어 안 그래도 하얗던 온 세상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기다리라는 소리에 그리사는 잘만 걸어가다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하얀 입김을 굴뚝처럼 내뿜으며 서 있는 그는 몸이 떨리고 있었다. 걸치고 있는 털옷도 땀에 젖어 보온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 돌아가요.”
지금까지 습격을 당해 죽을 뻔하던 순간에도 약한 소리 한 적이 없던 그리사였다. 이 산 끝에 무엇이 없으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걸음이 늦어지던 나디사 역시 놀라 멈추었다. 잠시라도 멈추면 얼어 죽을 것 같다고 끝없이 전진만을 외치던 아트리스도 잠잠히 그를 돌아보았다. 입술이 퍼렇게 질린 그리사는 허망한 표정으로 저의 멈춘 이유를 변호했다.
“뭐가 있다면 지금쯤 뭐 하나라도 나왔겠죠! 나는 의미 있게 죽고 싶어요. 이건 미친 짓이라고요!”
자연의 위대함은 다른 곳이 아니라 이런 때에 등장했다. 아마도 자신의 신념, 살아온 관성으로 무장하고 있던 체면이나 겉모습을 벗겨 주었다. 동료를 위해 싸우다 죽을 수는 있지만, 아무런 명예도 되지 않을 임무 중에 찾아온 죽음은 반기지 않는 것이었다.
같은 사람으로서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여기서 내려가는 길도 답 없긴 마찬가지다. 빈손으로 공주에게 돌아가는 일도 저 꼭대기까지 찍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다. 보지도 않고 없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고 위반이었다.
“내려가요!”
“안 돼.”
복잡한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는 동료 둘과 달리 란은 냉정한 목소리를 유지했다. 그리사의 심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건 너무 끊어 내는 것 아니냐고 한마디 하려던 때였다. 불어오는 눈 폭풍보다도 더 날카로운 눈빛으로 란이 이를 물며 말했다.
“저 앞이야. 저 앞이라고.”
열을 앓으면서 목소리가 쉰 란이 확신에 찬 눈빛으로 두 번씩 반복하여 말하는 거였다. 희망의 문을 닫은 그리사의 눈빛도, 무미건조하게 눈을 치워 내던 아트리스의 손길도, 눈에 보이지 않는 미행자를 찾던 나디사의 시선도, 즉각 변화하여 온 관심이 란에게로 쏟아졌다. 한심한 제 일행을 돌아본 란은 주먹을 쥐어 가리켰다.
“코앞이야. 정말 포기할래?”
어떤 의미론 그의 쉰 목소리가 진정성이 있었다. 폭풍보다 더한 시선을 맞은 세 사람은 천천히 발을 맞추어 걸었다. 의무적인 대답보다도 정확한 속마음이었다. 포기 않고 나아가겠다. 그런 손바닥 뒤집는 듯한 태도를 넘기지 않고 비아냥거렸을 란도 오늘따라 조용했다.
네 사람은 다른 목표, 다른 이유를 마음으로 생각하며 걸음에 실었다. 누군가의 걸음은 자기와 자기가 속한 집단을 위하듯 고집이 있었고, 누군가의 걸음은 자기를 쫓는 이를 생각하듯 발과 발 사이의 간격이 좁았다. 하지만 란이 코앞이라고 했음에도 그들은 한참을 더 걸어야 했다.
불안의 시작은 타인의 작은 불평으로부터 나왔다. 그 시작을 저로 끊고 싶지 않은 마음은 다 똑같을 거다. 아까 전 일행을 이탈하고 혼자 내려가려 했던 그리사도 최선을 다해 내려가자는 말을 참는 듯했다.
걸음은 눈이 막는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떨쳐 내고, 밀어 내다가 나중에는 그 눈과 함께 걸었다. 회초리로 다리를 때리는 것 같은 통증엔 털 부츠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전진. 이 꼭대기에 아무것도 없더라도 그저 전진이었다.
동료가 하얀 눈에 동화되는 장면에 웃다가, 조금 지나면 웃을 힘조차 없다는 걸 깨닫고 남은 힘을 비축한다. 이젠 한 걸음조차 떼기 힘들다고 생각이 들 때마다 손을 내밀어 주고, 한발 늦게 기다려 주는 이들이 있어 이 무모한 도전을 계속한다.
하얀 눈을 맞으며 그들이 같이한 첫 비행이 눈 뜨고 못 봐줄 만큼 엉망이었던 것을, 첫 임무를 맡았을 때의 그 막막함을, 그리고도 의견이 맞지 않아 헤어졌을 때의 느낀 상실감을 떠올렸다. 죽어 가는 노인처럼 과거를 회상하며 흰 눈에 파묻힐 지경이 됐을 즈음 기적적인 한 마디가 들려왔다.
“다, 왔다.”
란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에 고개 숙여 걷던 모두가 턱을 들었다. 정상엔 바람이 없다. 생체로 사람의 피를 얼리려는 눈보라도 없었다. 쓰러질락 말락 중심을 못 잡는 란이 평평한 정상으로 걸어가는 그 순간 나디사는 욕설 비슷한 말을 흘렸다.
“세상에…….”
“이건, 이건 뭐지.”
신을 기리는 신전 비슷한 장소가 정상의 빈 땅을 다 메우고 있었다. 그것도 먼 과거에 지어진 듯이 금이 가 있고 낡았다. 온전한 모습이었을 때를 상상할 수 있게끔 골조와 기둥들은 아직도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신에게 죽은 짐승을 바치는 제단과 눈, 비를 막아 줄 높다란 천장도 쓸 만하였다.
떨어져 나간 일부 벽과 문은 삭아 없어져 버린 듯이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의 위엄은 존재했다. 뚫린 벽과 문으로 보이는 안쪽은 오랜 세월 관리를 받은 듯이 깔끔한 티가 났다.
눈이 보이지 않도록 방해하던 햇볕을 만났다. 신의 은총이 깃든 것 같은 푸릇한 땅에 입을 맞추고픈 심정이었다. 신관인 란은 무릎을 꿇었다. 기도하는 그의 이마를 노릇한 볕이 쪼았다.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드는 라드군과 달리 신관은 신에게 감사를 전한다. 눈과 땀에 젖어 무거워진 털옷은 당분간 필요 없었다. 햇볕에 말리고자 그것을 벗어 땅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란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그들은 제자리서 빙글 돌며 햇볕을 만끽했다.
“자.”
짧고도 굵은 기도를 끝낸 란은 기대감 충만한 목소리로 일어섰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보물은 시대를 바꾸고 왕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라고들 한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생김새도 모르는 보물에 위대한 설명이 붙었다.
신전 안으로 들어선 란의 발걸음이 어린아이처럼 통통 뛰는 것도 이해가 가는 바였다. 그 대단한 보물의 생김새나 쓰임은 알지 못하더라도 이곳에서 단서를 얻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그를 뒤따라서 신전 안으로 들어선 나디사는 이내 란의 목소리가 실망감으로 어그러지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샅샅이 살펴볼 필요도 없이 잘 보존된 내부에는 평범한 세 개의 여신상이 다였다. 수비타 왕국의 신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복을 불러다 주는 여신상 세 개. 그리고 그 앞에 놓인 동그란 돌그릇 세 개.
아, 그것은 목숨을 걸 만한 생김새라기보다 어디에서나 볼 법한 것들이다. 란의 비명이 시작된 것도 이곳에 뭐가 더 없다는 걸 알게 된 그즈음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