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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88화 (188/210)
  • 188화

    드디어 미쳐서 헛것을 보는구나.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디사의 스스로 내린 망측한 결론이 틀림없다고 확신하는 중이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그녀는 제물처럼 바쳐진 노루를 본 후로 꾸준히 사냥에 나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연히 얼어 죽은 짐승들을 발견했다. 언덕을 구르다가 목이 꺾여 얼어 죽거나 다리를 다쳐 얼어 죽거나. 갖은 이유로 죽은 짐승들이 제 앞에 놓인다는 건 우연이 아닐 확률이 높았다. 문제는 그렇담 이 필연을 만든 그 사람이 누구냔 거다.

    그녀는 오늘도 디디가 찾아온 뿔여우의 사체를 보았다. 쉽게 획득된 뿔여우를 그냥 두고 가려고 했으나 이번엔 차이가 있었다. 자세히 보고자 허리를 굽혔다. 이번 사냥감은 목이 꺾여 죽긴 하였으나 직접적인 사인은 목을 관통한 상흔이었다. 사람이 죽인 거였다. 하도 받지를 않자 심통이 나 버린 것처럼 정체불명의 그는 상처를 공개해 버렸다.

    네가 짐작하는 대로 사람이 하는 일이 맞으니 그만 받아 가라고.

    눈을 감지도 못하고 죽은 뿔여우의 사체를 옮기려고 했으나 무게가 제법 묵직했다. 때마침 근처에 있던 그리사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 주어 다행이었다.

    “웬 거예요?”

    “잡았어.”

    새삼 태연하게 들리게끔 꾸며 낸 목소리로 그런 거짓말을 했다. 나디사의 말을 듣고서 수긍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그리사는 이내 순수한 감탄을 뱉어 냈다.

    “이거면 며칠 먹겠는데요.”

    지금껏 익명의 누군가 해다 바친 수많은 사냥감을 놓아주고 눈토끼만 잡아먹은 걸 안다면 그리사가 저를 죽이려고 할까. 실없는 상상을 하며 픽 웃은 나디사는 그리사와 함께 어깨로 뿔여우의 몸을 받쳐 들었다. 고대의 사냥꾼들처럼 당당한 걸음걸이로 뿔여우를 얹고서 가니 바람도 덜 시린 듯했다. 생각보다 더 신이 난 그리사는 안 하던 실수까지 하며 발이 여러 번 눈에 빠졌다. 하긴 한참 많이 먹을 나이의 그가 토끼 죽 같은 것으로 연명했으니 오죽 배가 고팠겠나. 어른들 사이에 있다고 티도 못 냈을 그를 생각하자면 지난 사냥감들도 아까워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길 잘했지. 무시하고 모른 척하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 보면 그는 이곳 가까이에 있었다. 잘만 하면 일행의 숨통을 끊을 수도 있다는 소리이나 그것이 걱정스럽고 꺼림칙하지 않았다. 먹을 것을 바치고, 잠자리를 제공하는 자의 마음이 얼마나 간곡하고 조심스러운지 매시간 느끼고 있었다.

    오직 저만 볼 수 있게 사냥감을 숨겨 두는 정성이 걱정스러운 건 날씨 때문이었다. 부디 저의 뒤를 봐주고 있는 그 남자가 히아신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저 하얀 언덕과 눈폭풍이 그를 죽일 수 있단 말이다. 저를 지켜 주겠다고 자신을 바치는 멍청한 짓만은 말기를. 발 빠진 그리사와 천천히 웃고 떠들며 돌아가는 길. 나디사의 마음은 그 하얀 언덕 속에 묻혀 놓고 온 듯이 떨리고 두렵기만 했다.

    * * *

    칼을 가는 소리를 내며 잠을 달아나게 하려고 했다. 깨워 줄 사람도 없는데 잠이 든다는 건 죽으란 소리나 다름없었다. 설령 죽는다고 해도 여기서, 혼자서, 죽은 뒤에 모습이 외롭고 쓸쓸해 보일 게 분명해서, 히아신은 혀를 깨물어 피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죽을 순 없었다.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신이 감동하여 눈 폭풍의 세기를 줄여 주는 일 따윈 없었다. 기대도 없었지만 참 예상 그대로이신 분이라 신한테도 유감이 생겼다.

    바람을 막아 주는 은신처에 앉아 그녀 생각에 졸고 마는 것이 휴식이라니. 짐승을 잡고자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닌 것에 비해 어처구니없는 성과였다.

    잠시 눈을 붙일 틈도 없는 히아신의 한숨이 하얗게 얼어붙는다. 이런 추위를 핑계로 옹기종기 그녀와 붙어 앉은 놈들이 부러워지고 있었다. 아까 보고 오니 그녀는 드디어 그의 사랑의 결과물인 뿔여우를 먹어 주는 듯했다. 무언가를 살피고 알아차린 듯이 고개를 쳐든 그녀에게 약간의 기대감을 가졌지만 언제나 그렇듯 금세 실망감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자신의 삶의 수준을 보아 측정한 기대는 아주 조금인데 실망은 그에 열 배로 오는 기분이었다. 나디사만 관련됐다 하면 그런 한심한 감정에서 도통 빠져나오질 못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하면서도 얻은 결과들은 죄 부정적이고 한물간 것들뿐이니.

    “잘 먹네.”

    연기인지 안개인지 구분이 안 가는 것이 오르지만 그녀의 동굴 근처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타오른다. 그 냄새를 맡고 다가오는 짐승들이 분명 있을 터였다. 오면 좋고, 안 오면 말고. 하지만 올 확률이 높다. 그리하면 내일 사냥을 나갈 수고를 덜 수 있어서 좋으나 히아신은 웃지 못하는 광대였다.

    재수 없었다.

    그녀만 먹으라고 잡아 온 것인데. 그 때문에 손과 발이 얼고 있는데. 왜 다 같이 모여 앉아 그의 사랑을 나누어 먹고 있단 말인가. 왜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신의 축복이라고만 생각하는 걸까. 조금만 깊이 헤아려 본다면 그의 정성과 노력이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아무도 없는 동굴에서 한 손으로 칼을 던지고 받으며 잠 깨우기 운동을 했다. 어느 정도 손이 풀리는 느낌이 들 즈음엔 그만두어도 됐지만 그는 반복 동작에 중독된 이처럼 손을 가만두지 못했다. 그게 생각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라는 걸 깨우쳤기 때문일까. 머나먼 곳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히아신의 손동작이 멈춘 건 그로부터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이쯤이면 식사를 마치고 쉬고 있었을 아름다운 인영이 눈 폭풍을 가르며 그에게 오고 있었다.

    은신하고 있어 위치를 들킬 염려가 없건만 심장이 불쾌하게 뛰었다. 동작을 멈추고 숨죽이고 있을 찰나 주춤 멈추어 선 그녀가 하얀 설원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맛있게 잘 익었어요. 혹시 몰라 독이 있나 봤는데 없더라고요. 그럼 호의인 거겠죠.”

    그녀가 말을 걸어오고 있어. 그 내용이 어떻든 히아신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흥분해 어쩔 줄 몰라 하며 뺨을 붉혔다. 하지만 설원으로 뛰쳐나갈 작정이던 그의 발을 차가운 그녀의 말이 막아 세웠다.

    “하지만 역시 수상쩍어 동료들과 이야기를 해 보았는데 오늘 떠나자는 결론이 나왔어요. 우리는 정상으로 갈 테니 더는 이런 일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드리는 말입니다.”

    흥분한 어깨를 들썩거리던 히아신의 시선은 실망이 지나쳐 아래로 고꾸라졌다. 담뱃갑이 없는 빈 주머니만 뒤적거리던 그의 손이 빈 바람만 쥐고서 빠져나왔다. 재산 잃고 길거리에 나앉은 이도 아닌데 표정은 그 못지않았다. 저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건 기특했으나 해석 방향이 틀렸다. 그는 그녀가 이보다는 더 고마워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정체를 추측하며 그만큼이나 들뜨기를 바랐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쫓아오지 말라는 말, 진심이에요.”

    이 은밀한 술래잡기에서 설렘을 느낀 건 저 혼자뿐이었다. 이내 부스럭거리며 설원에 무언가를 두고 간 그녀는 인사 없이 설원을 가로질러 갔다. 이 땅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그를 버리고 가는 태도가 볼수록 대단하였다. 그는 그녀에게 빌붙어 먹고 사는 농노도 아닐진대 무척 비참해지고 말았다. 아무리 애써도 그의 노력은 이런 방해자 취급을 받는다. 곡해하고, 의심받는다. 오로지 맛있게 잘 먹었다는 인사를 기대한 저를 바보로 만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디사가 두고 간 익은 고기를 찾아내며 헛된 설렘을 키웠다. 저걸 먹고서 힘내 내려가라는 뜻이겠지. 이 추운 설원에서 더는 고생 말고 내려가라는 뜻일 거야.

    참 답도 없는 중증 수준의 병이었다. 히아신은 매일같이 스스로를 진하게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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