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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87화 (187/210)

187화

열흘 안에 임무를 끝내겠다고 자신한 란은 동굴에 들어오자마자 열로 앓아누웠다. 그 때문에 출발이 늦어졌음은 당연했다. 그리고 들어온 지 사흘 만에 그들은 가지고 있던 식량 전부를 먹어 치우고 말았다. 그전에도 식량이 없어 사냥에 나서야 했지만 숲에는 동물과 과일이 풍부했기에 식량을 조달하는 것에 큰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호르스의 폭풍은 달랐다.

“어때.”

“허탕이야, 없어.”

한 사람만 나갔다가 조난 당한다면 위치를 몰라 구해 줄 수도 없기에 항시 2인 1조로 탐색에 나섰다. 사흘을 여기에 발이 묶여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것이, 쓰러진 란의 탐색 능력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도 있었다. 란은 고귀한 신의 힘을 빌려 쓰는 신관이었다. 신관들은 탐색에 재능이 있어, 옳은 길과 그러지 않은 길을 구별해 내는 데에 따라갈 자가 없었다.

또 이곳으로 오기 전 알아본 바로는 호르스 산맥엔 작은 토끼들이 널려 있어 식량 조달에 문제없다는 말을 들었다. 붉은 늑대나 뿔여우 같은 것들도 있어, 사람이 먹는 건 여하튼 괜찮다는 정보를 입수한 참이었다.

“먹을 건 어때.”

“이게 마지막이야.”

길잡이 역할까지 맡고 있던 란이 앓아누우면서부터 이쪽은 비상이 걸렸다. 란의 역할이 생각보다 컸음이었다. 그는 수시로 조금만 쉬면 괜찮아진댔지만 먹을 것이 없어 낫는 속도가 더뎠다. 남을 치료만 해 줬지 자기 자신의 몸을 돌보는 데에는 서툰 탓이었다. 그것도 시종이나 하급 신관들이 해 주었으니까.

“그럼 어서 내려가야 되지 않겠어?”

“내려가는 길이 어디인지도 불확실해. 위로 날아 보려고 해도 바람 때문에 비상이 쉽지가 않아.”

아트리스는 어깨에 묻은 눈을 툭툭 털어 내며 자조적인 쓴웃음을 지었다. 옆에서 가만히 서 있는 그리사의 표정 역시 밝지 않았다.

그들이 표현하지 않아도 여기에 고립됐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것이었다. 그러나 란의 몸 회복이 먼저였다. 남은 식량을 란에게 먹이고 바람이 더 거센 저녁이 오기 전에 한 번 더 둘러볼 생각이었다.

나디사는 말려 둔 고기를 끊어 내어 란의 옆에 놓았다. 누워 있던 란은 그걸 슬쩍 보더니만 미간을 찌푸렸다.

“쉬면 나아. 너희나 먹어.”

양심이 없는 부류인 줄 알았더니 꼭 그렇지만도 않나 보다. 저가 누우면서부터 갈 길이 막혔다는 걸 안 란은 고집을 부렸다. 눈밭을 뒤지는 동료들을 배려하듯이 제 먹는 양을 줄였다. 병이 안 낫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음이었다.

“좀 먹어요.”

“됐어. 너희나 먹으라니까.”

“먹어야 낫죠. 약도 없는데.”

“치유의 힘을 가진 신관이 약을 먹고 나아? 나도 알아서 할 수 있어. 지금은 지쳐서 그런 거니까 내버려 두라고.”

팽 신경질을 내며 돌아누운 란을 말려 줄 사람은 없었다. 나디사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오로지 사냥에 성공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마음 편히 잡아 온 것을 먹어야지 란도 체력을 회복할 것이고.

“로마, 디디.”

안쪽에 숨어서 자고 있던 로마와 디디가 새초롬하게 눈을 떴다. 어두운 그늘에 숨은 눈동자에서 노란빛이 난다. 이렇게 보면 마냥 귀여워하던 저 아이들도 짐승이긴 짐승이구나 싶다.

“이번에는 내가 다녀올게.”

“그럼 같이 가요.”

아트리스는 반드시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지난 사흘을 매번 나갔다 왔으니까. 그렇다고 부상 회복 중인 그리사를 끌고 나갈 순 없어 나디사는 무리수를 던졌다.

“아이들하고 잠깐 다녀오는 거야. 나는 둘이나 있잖아. 쉬고 있어. 멀리 안 나갈 테니.”

“아무리 그래도…….”

자신 있는 나디사는 그리사의 말을 다정한 미소로 막아 세웠다. 그들이 붙잡을 틈도 없이 나디사는 로마와 디디를 앞세워 동굴을 빠져나왔다.

“나디사! 잠깐!”

“응.”

“무리하지 마. 우리 몸이 회복하고 같이 움직이면 되잖아.”

“괜찮아, 아트리스. 계속 갇혀 있는 게 답답해 그래.”

말에 앞뒤가 맞지 않을 거다. 아무리 답답하다고 한들 그곳은 유일한 안식처였다. 이런 적절한 장소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새끼치고 사는 짐승도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신이 이 여정을 도와주는 기분이 들어 감사할 때가 있었다. 기도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온 나디사의 마음에도 신앙심이 깃들 정도였다.

“다녀올게.”

여러 실랑이 끝에 나디사는 만류하는 아트리스를 두고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만 방심해도 길을 잃을 만큼 시야가 가려졌으나 그녀는 자신보다 라드들의 감을 믿었다. 같은 라드인 에이와 무스가 동굴 안에 있으니 길을 잃어도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나디사의 일탈은 한 짐승의 사체로 인해 막을 내렸다. 그녀는 너무나도 대단한 우연 앞에 머뭇거렸다. 여기가 사막이라면 신기루를 의심할 테였지만 당장 그녀는 눈 속 한복판이었다. 차갑다 못해 아픈 바람이 자신의 뺨을 때리는 혹독한 산 중턱에 있었다. 그러니 저건 꿈이라기보단 행운일 것이다.

피에 민감한 로마와 디디가 흥분하듯이 반응했다. 노루 고기 맛을 아는 라드들의 신이 난 콧소리를 들으며 나디사는 다시 한번 확인의 과정을 거쳤다.

얼은 노루 한 마리가 목이 비틀려 죽어 있었다. 그녀에게 바치는 제물처럼 눈도 쌓이지 않은 채로 누워 있다. 의심이 생긴 나디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핏자국 없이 고운 노루를 냉큼 주워 가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으나 그녀의 라드는 짐승이었다.

“디디!”

적의 함정일 수도 있었다. 주위를 경계하는 동안 한 입을 삼킨 디디는 꿀꺽 목으로 살점을 넘겼다. 다급한 마음에 손으로 디디의 입을 벌려 보았으나 빨간 노루의 살점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거나 주워 먹고 그래.”

뜻하지 않은 행운이 겹쳐지면 그저 운수 좋은 날로 치부할 수 있겠으나 이건 누군가의 뜻이 있는 행운이었다. 나디사는 시간이 지나 디디의 몸에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도 그 노루를 가져가지 않았다.

신의 뜻이 그리로 인도한다면 다행이지만, 먹을 것 정도는 신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구해 보고 싶으니. 그 고운 노루는 바쳐진 보람 없이 눈밭에 버려져 있었다.

* * *

군침이 도는 하얀 토끼의 피를 눈 곳곳에 발라 두었다. 이윽고 피 냄새를 맡고 나타난 약삭빠른 짐승이 본인의 최후도 모르는 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 산에서만 사는 뿔여우는 주로 토끼와 덩치 작은 여우를 잡아먹고서 살았다. 살이 기름지고 털도 두꺼워 사냥꾼들이 눈이 벌게져 찾는 짐승이었다.

크기는 노루보다도 더 크지만 성격은 노루보다도 더 소심했다. 얼어 죽은 짐승의 사체를 노리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연약한 새끼만을 먹이로 삼는다. 지금도 숨만 겨우 붙여 놓은 토끼를 노리며 살금살금 다가오고 있었다.

생김새도 독특해 여러 이름으로 불리나 수비타 왕국에선 뿔여우라고 불렸다. 여우라기보단 늑대와 가까운 외형이었지만 교활하고 못된 습성이 여우 같다며 왕국에선 그리 불린다.

히아신은 천천히 거칠고 빳빳한 시위를 당겼다. 급조해 만든 활치고 나쁘지 않은 소리를 낸다. 배워서 쓸모없다는 말은 여기에 쓰였다. 그는 파르난의 사람으로 이보다도 더 혹독한 지형과 환경에서 살아남는 훈련을 받았었다. 굶기고, 싸움을 붙이고, 열나고 추운 그곳에서 제 손으로 무기를 만들어 사냥했다.

목표한 위치에 사냥감이 오자 단숨에 화살을 쐈다. 정확히 고개 숙인 뿔여우의 목을 꿰뚫었다. 아침에 만든 조잡한 화살이 여우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이제 사냥감을 잘 손질해서 나디사의 앞에 놓으면 된다.

화살을 빼고, 사람이 잡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목을 부러트려서 말이다. 그렇게 선물하기 좋게 만든 뿔여우의 몸을 바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쳤다.

그러나 일주일.

의심이 많기도 하지. 그의 사랑스러운 그녀는 은밀한 도움을 거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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