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호르스의 산맥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까지 멀지 않았지만 파르난의 사람을 따돌린다고 뒤로 돌고, 도는 바람에 체력을 썼다. 그동안 라드군은 사냥의 달인이 되었다. 비위 약하고 입맛이 까다로운 란을 모시고 다니느라 그들의 체력은 높아질 일밖에 없었다.
이것은 비리다, 이 부위가 덜 구워졌다, 생선은 싫다. 왕족도 아닌 그를 모시고 다닐 이유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버리지 않는 이유는 의리도 뭣도 아니었다.
“자.”
호르스의 폭풍까지는 앞으로 이틀. 산맥을 오르는 데에 통상적으로 칠 일이 걸린다고는 하지만 그건 전문 꾼들이나 하는 말이고. 하물며 그 꾼들도 정상에 있는 신전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었다. 정상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사람의 시야를 가리는 눈안개가 둘러싼 곳에 목숨을 걸고 올라갈 만한 이유가 있을까. 자신들처럼 지도가 이곳에 가라고 가리키는 게 아니라면. 다행인 점은 그들은 라드군이었고, 라드들은 날아서 산맥을 오를 수 있다는 거였다. 그것도 어느 정도 지점이 되면 바람이 거세 날아갈 수 없다지만 일반 사람들보다는 월등히 유리한 위치였다.
“또 두통이야?”
“……네.”
“몸 좀 아껴 쓰라고. 내가 무슨 약상자냐? 어?”
사람이 한결같기가 쉽지 않은데 란은 그것을 해내는 중이었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란의 머릿속에는 신전, 록, 그리고 자기 자신의 안위뿐이었다. 그를 무시하기로 작정한 라드군 삼인방도 나가떨어질 만큼 그는 패악 떠는 일을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머리 대.”
그러나 이거 하나. 그의 치유 능력은 이 임무를 지속하는 데에 엄청난 도움이 됐다. 라드를 쉬지 않고 몰면 비실비실해지는 단점이 그들에겐 숙명 같았다.
호르스 산맥까지 잠을 두세 시간씩만 자고서 날아갈 수 있었던 것도 다 란의 덕이었다. 사냥, 잠자리 보기, 보초 서기 등을 번갈아 하는 세 명에게 확실히 치유를 해 줬다. 나디사는 그 때문에 그의 패악을 어느 정도 받아 주려 하는 터였다. 란도 적당하게 눈치를 봐 가며 그들의 성질을 돋우는 수준이라 어설프게 상생이 되고 있었다.
“자, 다음.”
호르스 산맥의 바람이 제법 추워 아트리스는 가벼운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 때문에 란이 한소리를 했다. 본격적으로 겨울이 오지도 않았는데 열병에 걸리고 만 거냐면서. 아트리스는 그래도 제 역할을 다 하려고 했지만 나디사와 그리사가 말려 두었다.
지금은 몸 회복이 우선이었다. 라드를 데리고 산맥을 오르려면 체력이 이보단 더 많아야 산다.
나는 것만 잘하는 라드를 데리고 산맥을 걸어 올라갈 수 있을까.
잡아 온 노루를 먹고 있는 라드 네 마리가 귀여운 한편 걱정이었다. 호르스의 바람은 라드의 날개를 접어 버릴 정도라서 정상까지 나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무작정 올라간다면 제각기 흩어져 낙오될 수 있었다. 눈 덮인 산에서 조난당한다면 살 가망은 없었다. 치유의 힘이 있는 란을 대두로 중턱부터 올라갈 길을 찾아보는 수밖에.
“자 다음.”
그리사의 머리와 부은 팔목을 치료하고 아트리스의 열병도 봐주었다. 란은 무슨 속셈에서인지 그녀를 가장 마지막 순서로 치유했다. 시간도 오래 걸렸다. 군소리 않는 건 그가 이제껏 만나 본 신관 중에 최고의 실력을 가진 자라서였다.
쑤시고 아프던 머리통이 그의 치유술을 받고 나면 말끔하게 나았다. 라넌이 주고 간 약도 다 떨어져 가고 있는 마당에 그의 치유술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너 아까 쉬긴 했어?”
“네.”
“그런데 몸이 왜 이 모양이야.”
불 담당이던 그리사가 몰래 고개를 들고서
란을 바라봤다.
“나디사의 몸이 어떤데요.”
갑자기 그리사가 끼어들 줄은 몰랐기에 나디사는 당황한 표정이 됐다.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란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 바람에 쉬고 있던 아트리스의 시선도 이리로 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엉망이야. 큰 힘에는 큰 부작용이 따르지. 사람의 욕심으로 라드의 힘을 빌려 쓰겠지만. 신의 힘 말고는 사람에게 허락된 것이 없는 거거든.”
나디사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원래는 허락되지 않았던 힘인데 그걸 억지로 잇다 보니 사람의 몸에 나쁜 일이 일어나는 거라고. 하지만 사람이 라드를 타고 난 후부터 전쟁은 줄어들었다. 목숨을 걸고 라드를 타는 이들의 압도적인 힘과 바람에 짓눌려 평화가 찾아왔다. 파르난의 사람들이 그것을 앗아가려고 해도 자신처럼 목숨을 걸고 라드를 타는 사람이 있는 이상 평화는 계속될 거였다.
그렇게 생각해야지 이 일을 버틸 수 있었다. 나는 평화에 일조하고 있다. 하지만 그 거창한 말들과는 다르게 그녀는 어떠한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버릇처럼 되뇔 뿐이었다.
이 일을 할 적임자는 나밖에 없고, 운 좋게 날개가 많이 생긴 내가 희생하는 것이 맞고, 동료를 끌어들였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고.
“치료는 다 된 겁니까?”
“왜.”
“장작도 구해 와야 되고…….”
“잠깐.”
쉬이. 입술에 손가락을 올린 란의 표정이 한껏 굳어 있었다. 저희에게 투정을 부리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험악해 보였다. 식사 중인 라드들도 호기심이 생긴 양 고개를 들어 참견했다.
“파르난의 기운이 느껴져.”
“지금요?”
란은 정말로 예민한 이였다. 괜히 차기 신전을 맡을 자라고 그러는 게 아닌지 자주 파르난의 기운을 그들에게 설파했다. 나디사는 치료가 끝나고 가뿐해진 몸 상태로 일어섰다.
“아무래도 더 빠르게 가야겠어.”
“……지금 자리를 옮기자고요?”
“치료해 줬잖아. 그거 불 피운 거 아까워서 그래?”
오늘의 불 피우기 담당인 그리사는 운이 없었다. 란은 파르난의 기운을 느끼면 잠을 통 자지 못하기에 호르스의 산맥으로 이참에 직진하자는 뜻일 거다. 오늘 밤도 자지 않고 날아간다면 도착 날짜를 더 앞당기게 될 거다. 란은 자기가 키운 불씨를 허망하게 바라보는 그리사를 비웃었다.
“내가 신력으로 피워 줄게.”
“뭐라고요?”
잠자리를 옮긴다는 소리에 깔고 잘 요를 다시 곱게 개던 아트리스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나 보다. 산맥 근처로 올수록 바람이 거세 불 피우기 난이도가 올라갔다. 신력으로 피울 수 있다면 진즉에 그럴 것이지. 배신감이 아니 들 수가 없다.
“하, 진짜…….”
“뭐야. 나 때문에 머리도 낫고 팔도 낫는 주제에 지금 성질 내?”
“안 나게 생겼어요?”
“내 신력을 아껴다가 불 피우는 데에 쓰라고? 너희 고쳐 주는 데에 쓴다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리사는 답도 없다는 듯이 란을 노려보고는 모래를 불씨에 끼얹었다. 겨우 피어나고 있던 작은 불씨가 피시식 꺼졌다.
“기분 나쁜 새끼.”
그리사는 들리지 않게 투덜거리며 짐 가방을 챙겨 들었다.
“로마, 디디.”
나디사는 그리사를 위로하기 위해 본인이 라드들을 챙겼다. 그런데 유난히 디디가 꾸물거리며 뒤를 돌아보는 듯하기에 조용히 접근했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라드의 불안한 감정이 그녀에게로까지 넘어왔다.
“왜 그래, 디디.”
노루 한 마리를 잡아먹고는 행복해할 줄 알았건만. 입가는 빨간색이 됐는데 아직도 아기처럼 그녀의 손길을 찾았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안정을 찾은 디디가 그녀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아무래도 교감이 부족해서 칭얼거렸나 보다. 이런 면에서는 로마가 디디보다 더 어른스러웠다.
“나디사. 무슨 문제 있어요?”
피곤한 그리사의 얼굴을 보고 나디사는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란에게 말해 적당히 하라고 해야겠다. 그리사는 더 자 두어야 좋을 나이인데.
그를 안쓰러워하며 디디의 목을 안고서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나디사는 발에 챈 돌멩이를 무심결에 내려다보았다. 한데 그 돌멩이의 모양이 수상쩍었다.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사과 뼈. 여기까지 굴러올 리가 없는, 잇자국이 남은 사과 뼈다. 미간을 찌푸린 나디사는 그걸 주우려고 했으나 또 재촉이 들려왔다.
“이봐! 안 가?”
어디서 본 적이 있었다만 이걸 란에게 말하면 헛소리로 치부할 거였다. 나디사는 그 사과 뼈에서 눈을 뗐다.
“갑니다.”
어떤 사람이 먹다가 두고 간 것이겠지. 아니면 바람을 타고 온 것이거나. 고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걷는 것은 지쳤기 때문이리라. 바람이 거세진다. 그래, 이 바람 때문이야. 머릿속에서 사과 뼈의 잔상을 지운 나디사는 불안한 마음을 그렇게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