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그가 이어진 손으로 강력한 신력을 불어넣었다. 많고 많은 그의 수작 중에 이런 따스한 수작일 줄 누가 알았을까. 불퉁한 표정으로 앉아 치료를 감행하는 신관이라니. 란은 무정할 정도로 힘을 써서 몸의 통증을 가라앉게 해 주었다. 잠도 못 들어 뒤척거리던 어제를 생각하면 그의 치료가 반가워야 맞지만.
의심을 거두지 못한 나디사는 천천히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란은 치료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도망가는 그녀의 손을 괘씸하게 노려보았다.
“뭐야.”
“말씀,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말씀.”
“제가 아프다는 거요.”
란은 그 말에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피식 웃었다. 같잖다는 뜻이 담긴 웃음이라는 걸 왜 모르겠나. 하지만 나디사는 제 몸 상태는 안중에 없었다. 동네방네 아프다는 걸 알리고 다닐 그의 입이 더 걱정이었다.
“지금 그게 문제야? 네 몸 상태가 그 지경인데.”
“다들 그렇습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들 그렇긴 하지. 한 십 년, 이십 년쯤 지나면. 너는 고작 몇 달, 많이 봐줘 봐야 1년 아닌가?”
란이 해 주는 말이 아니었다면 조금 더 진실성이 느껴졌을까. 나디사는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고해 바치고 싶지 않았다. 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나아질 몸이 아니다. 제 몸이 죽어간다는데도 걱정이 들긴커녕 쉬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사람들이 너를 추켜세우니까 뭐라도 된 듯해서 그래?”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다들 저만 믿는 바람에 아프다고 나서지 못하는 것도 있으니까. 그게 전부는 아닐 테지만 말이다. 그녀는 지금 어떤 행복도, 감흥도, 슬픔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제 마음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보고 있었다. 원래도 둔한 사람이라는 평을 듣긴 했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과연 언제부터였을까. 히아신이 떠난 날, 그렇게 미워 보이던 라넌이 죽은 날, 신전이 저를 감시해 왔다고 아트리스가 고백한 날.
“무슨 생각하느라 답도 안 해.”
“아닙니다.”
죽음은 그리 멀지 않은 거라고, 거기서 나만 예외일 수 없다고. 아둔한 나디사가 찾은 답은 그것이었다. 틈만 나면 숨통을 조여 오는 죽음이 버겁기는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들을 버려두고 떠난다는 것이 아주 조금 통쾌하기까지 했다.
“그럼 이것도 관심 없겠네.”
란은 품에서 그녀의 관심을 끌 만한 작은 지도를 꺼내 들었다. 얼마 전 나디사가 직접 공주에게 건넨 그 지도였다. 그게 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아 낯빛이 험악해졌다.
“왜 그게 거기 있습니까.”
“받았어, 공주한테.”
“……그걸 주셨다고요?”
그걸 구해 오느라 그리사는 머리를 다쳤고 자신은 부담스러운 영광을 떠안았다. 지도 한 장으로 공주의 집착이 버려질 줄 기대했으나 그리 순순하게 풀릴 리가 없겠지.
“모르겠어? 저 파르난의 돼지들이 왜 네 앞에서만 자꾸 나타나는지.”
그건 자신 또한 의문이었던 지점이어서 나디사는 무의식적으로 귀를 쫑긋거렸다. 그들의 의도가 궁금한 건 저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란은 앉은 채로 지도를 펼쳐 보여 주었다. 그때 본 것과 다를 것 없는 그림이 눈앞에 선명했다.
“만약 이 지도가 진짜라면.”
“…….”
“이걸 갖고 싶어서 자꾸 나타나는 거라면.”
자신을 유인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있었다. 미끼를 던지고 도망가는 파르난의 사람들이 저를 잡고 싶어 한다는. 짚이는 구석이 있는 나디사가 눈을 번뜩이자 란은 지도를 곱게 접어 품에 넣었다.
“이게 진짜라면 신전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일이겠어. 물론, 공주와 왕국에도 말이고.”
뒷말을 뒤늦게 가져다 붙인 감이 있지만 나디사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의 목적이 무엇이건 저에게 명이 주어지면 실행에 옮겨야 하니까.
“그래서 내가 요청했지.”
스무날을 여기에서 보냈건만, 기억에 남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싸움 같지도 않은 싸움들과 파르난에 의해 죽어 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넓은 천막과 공주가 보낸 하녀. 무엇도 그녀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지 못하고 그저 양을 쫓는 개처럼 날아다니기만 했다.
공주를 무사히 성에 들여놓은 뒤에 긴 휴가를 쓰려고 했다. 그 휴가 동안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고픈 마음이었다. 하지만 란의 말을 들어 보니 그것도 어려울 듯싶다. 공주의 명은 보물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으로 족하지 않았다.
“오늘 밤에 떠날 거야.”
“오늘 밤이요?”
이걸 어쩌나. 동료들에게 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게 생겼다. 그게 얼마나 사람 가슴을 후벼 파는지도 모르는 란이 원망스러웠다.
“저번에 걔네 둘도 데려가려고 말을 해 두었어.”
특별한 배려를 하듯이 말하고 있는 란을 째려보게 된다. 맹세코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한 명은 다쳤습니다.”
“본인이 가겠다고 했어. 난 여러 번 만류했고.”
“란 남께서 갈 거냐고 물었으니 그렇지요.”
말이 밤이지, 조금만 더 있으면 해가 떨어진다. 짧은 가을은 서둘러 겨울로 거듭나고 있었다. 해가 빨리 떨어지는 것도 그 증거였다.
목적지로 정한 곳은 이 날씨에 갈 만한 곳은 아니었다. 보물에 흥미 없던 란은 며칠을 지켜보고서 이게 파르난과 관련됐다 싶어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것일 터였다. 동생이 살아 있다고 믿는 공주와 뜻이 맞았겠지. 그렇다면 그 뜻을 따르는 희생은 저만 치르면 되는 것이었다.
“이 앞으로 올 테니, 준비해 둬.”
나디사는 그의 말에 반기를 들듯 얌전히 준비하며 기다리지 않았다. 공주가 하사한 친필 편지와 두꺼운 털옷은 챙기는 둥 마는 둥 하고서 심부름꾼을 불렀다. 그녀 역시 친필 편지로 오지 않아도 된다며 아트리스와 그리사에게 전해 두었지만 답장은 늦저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밤이 기울었다. 책상을 수십 번 닦고 치우던 나디사는 때가 되어 천막 밖으로 나왔다. 달이 뜬 밤에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이 부디 하나이길 바랐으나 그녀의 바람은 언제나 신이 무시하기 일쑤였다.
“혹시 내 전갈을 못 받았어?”
“두툼한 털옷은 받았어.”
짐 가방을 싸들고 있는 그리사, 아트리스는 당연히 떠날 사람들로 보였다. 두 사람은 오지 말라는 제 전갈을 받고도 이곳으로 왔다. 왕궁으로 돌아가면 그간의 공을 인정받아 상위 부대로 들어가고, 정말이지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길이 놓여 있었다. 이번 임무처럼 거칠고 힘든 가시밭은 그녀만 걸으면 될 터다.
“마벤이 이걸 전해 주라고 하더군요.”
천막 안에서 밤을 기다리는 사이 다른 사람도 밤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던 거였다. 그리사는 자신을 설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하얀 손수건과 마벤의 자수가 놓여 있었다. 그리사는 저를 믿어 달라는 듯이 미소 지었다.
“한번 같이 시작한 임무는 끝까지 같이 해.”
“설마 공을 다 독차지할 생각은 아니겠죠?”
긴장을 풀라는 동료의 농담에도 나디사는 웃지 못했다. 지금 그녀의 뒤에 있는 천막엔 버리지 못한 미련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걸 두고 떠나면 청소하는 하녀들이 치워 버리겠지.
“잠시만. 챙기지 않은 게 있어.”
“지금요?”
“이봐. 지금 가야 된다고!”
가지 말라는 소리를 듣지 못한 나디사는 다시 천막으로 들어가 침대 밑을 손으로 훑었다. 버리지 못한 편지 상자가 손에 걸렸다.
편지를 불에 태울 자신이 없어 매만지고만 있는데 바깥이 조금 시끄러워졌다. 편지 상자를 닫자마자 사람의 말소리가 천막을 흔들고 있었다.
“넌 섣불리 나서지 말았어야 해.”
“하지만 아버지…….”
“우선 조용히 있어. 나는 나디사 경과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니까.”
천막을 걷고 들어와도 되냐며 동의를 구하는 저 남자. 첫 번째 신관이 됐다고 들은 록이었다. 나디사는 발밑에 상자를 두고서 일어나 의연하게 그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