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히아신에게.
이 편지를 읽고 있을 즈음이면 그 남자는 내가 아는 곳에 없겠지. 그 남자는 잘 지낼까. 네가 잘 안 지냈으면 좋겠다가도, 한편으로는 나 없이도 알아서 행복하게 지내 주었으면 한다. 네가 그토록 편안하고 안녕하다면, 잔인한 너의 운명에게서 풀렸다는 소리일 테니까. 그 운명이 대단한 것이 아니었기를 바랄 뿐이야.
마침표를 찍은 나디사는 깃펜을 내려놓고 편지를 가만히 읽어 내렸다.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쓰는 사람의 마음은 공허했다. 오늘도 쓰지 못한 편지는 그녀의 낡은 옷 상자 속으로 들어갔다. 기침이 올라와 입을 막고서 쿨럭거렸다. 코앞에 죽음이 넘실거리는 이 기분이 들 때마다 나디사는 편지를 쓰는 행위를 멈출 수 없었다.
샤포드의 부모님에게도 쓰긴 하지만, 그녀가 전하는 대부분의 이름은 히아신이었다. 앞으로 보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할 말, 못 할 말 구분하지 않고 편지를 쓰게 된다.
바깥에 털어놓을 수 없는 마음을 편지에 써 두면 속이 편해졌다. 현재 느끼고 있는 불안, 악몽,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생각, 그리고 여러 가지의…….
“나디사 경!”
진군하고 있는 공주의 진영으로 돌아온 지 스무날이 지났다. 공주에게는 그녀가 가져온 지도를 돌려주었고, 그 공을 인정받아 그리사의 치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이 일에 참여한 이들은 개인 천막을 받았다. 말로는 공주의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다가 공을 세우고, 변을 당한 것으로 포장하는 모양이지만.
나디사는 근래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편지를 쓰고, 점심에 하녀가 차려 주는 식사를 한 뒤 잠깐 쉬다가 보면 이렇듯 자신을 찾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나디사는 일어나 장비 없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미 자신의 라드가 천막 앞에 준비되어 있었다. 어느덧 자신의 라드를 책임지고 안장까지 고쳐 주는 사람이 생겼다. 이것도 공주의 명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디사!”
하늘을 배회 중인 네 마리의 라드가 보였다. 위로 오르고 있는 라드들도 몇 마리 보이고. 왕실군은 바쁘게 뛰어다니고는 있지만 도움은 되지 않을 거다. 이번이 서른 번째 침입인가 그럴 것이었다. 그중 왕실군의 활약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었다.
마벤은 그녀의 위에 떠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주목받는 걸 싫어했던 나디사의 모습은 감추어졌다. 여러 번 반복되자 그녀가 가진 낯가림과 쑥스러움도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의 주인공인 양 등장한 나디사는 로마의 등에 올라타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마벤이 가리키는 방향 쪽으로 사람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나디사도 준비 자세를 갖추고 목줄을 당기는데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니 들릴 수가 없다.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그녀의 귓가에 말이 쑤셔 넣어졌다.
“이봐. 뒤로 물러나.”
“그래, 드디어 왔네.”
방금까지 추격하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길을 터 주며 뒤로 물러났다. 자기들의 일을 끝냈다는 듯이 웃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협동이 우선인 라드군이 요즘엔 그녀 하나만을 바라본다. 그 시선은 대단히 호의적이기도 하고, 대단히 호전적이기도 했다. 그 어느 쪽도 그녀는 원하지 않았다.
“저기야!”
“네.”
마지막까지 손가락질로 그녀에게 방향을 일러주는 동료를 이제는 무감각한 시선으로 대할 수 있었다. 오늘도 나디사는 나무 뒤에 서서 기회만 엿보는 파르난의 잔당들에게 바람을 보냈다. 멈추어 서서 날갯짓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 들어오려는 것처럼 진영을 짜던 이들이 거센 바람을 맞자 쥐구멍에 숨어드는 양 도망치기 시작한다.
저들이 만든 커다란 구멍으로 들어가며 문을 닫는다. 애초에 그 숫자가 많지 않았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처음엔 적극적으로 그들의 처치에 나섰던 나디사도 시늉만 하게 되는 터였다.
“오늘도 잘 싸워 줬어. 경이 조금 피곤해 보이긴 하지만, 죽은 사람도 왕실군 몇밖에 없고.”
나디사는 사라져 가는 파르난의 사람들이 저를 정말로 두려워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도리어 저를 조롱하듯 피해만 입히고 사라지는 파르난의 사람들이 두렵기까지 했다. 하지만 자신의 나약한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나디사는 오늘도 상관의 칭찬에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아래서는 박수갈채가 들려온다. 사람들은 파르난의 등장에도 긴장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적군이 적은 수로 침입하는 이유가 더는 보일 패가 없어 그렇다는 소리를 진심으로 믿었다.
“나디사! 오늘도 너무 멋졌어!”
이 연극 같은 일에서 벗어나고자 내려온 나디사는 본인의 천막을 들어가면서도 표정 하나 마음대로 지을 수 없었다. 지나갈 때마다 휘파람을 부는 사람들과 박수를 쳐 대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람 같지가 않다. 여긴 연극이고 저들은 관객 같다. 그녀는 미숙한 배우였으나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이고 있었다.
왕궁에 도착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수도에 가까워질수록 파르난의 침입 수가 적어지고 있었다. 나디사가 보기엔 그들은 위협을 원하지 않는다. 어떤 메세지를 보내는 거였다. 수신인도, 내용도 불분명한 메시지를.
“나디사. 배고프지 않아?”
저만큼이나 따듯한 바람을 몰고 마벤이 옆으로 오는 것을 느꼈다. 마벤은 그녀를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있으니 그녀에게 더더욱 이런 속사정을 말할 수 없다.
“저녁 같이 먹자.”
“그래, 내가…….”
위장이 쓰라려 배를 움켜쥐었다. 심장이 나아지면 득달같이 다른 곳에 문제가 생겼다. 피 냄새가 입에서 가시지를 않는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지자 발랄하던 마벤이 미소를 거두었다.
“왜 그래, 나디사.”
“아니야. 조금 쉬고 싶어서.”
“그래. 내가 휴식할 시간인데 눈치 없게. 얼른 들어가 쉬어. 저녁은 하녀를 시켜서 옮기게 할게.”
나디사의 활약상을 들은 공주가 본인이 쓰던 하녀 중에 하나를 나누어 주었다. 간단히 옷과 잠자리를 봐주는 정도였지만 웬만한 고위 귀족도 하녀를 받는 영광은 얻을 수 없었다. 그러니 그만큼 일을 해야지. 자신에게 보내는 찬사와 영광을 악몽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까.
나디사는 씁쓸하게 퇴장하는 마벤을 붙잡지 못했다. 그녀가 가면 사람들이 몰리기에 그리사의 병문안도 한 번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자신의 일을 도우다가 그렇게 된 것인데 고맙다는 말조차 전하기가 힘들었다.
저녁을 먹을 생각이 없이 하룻밤 쉬었으면 했다. 그러나 그녀의 천막에는 손님이 한 명 와 있었다. 청소를 마친 하녀가 그녀를 보며 살짝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그 옆에 아름다운 신관, 란이 앉아 있었다.
“오늘도 잘 쫓고 왔나?”
그녀의 별것 없는 책상을 뒤적거렸는지 그의 손에 못난 깃펜이 들려 있었다. 천막을 놓치며 들어온 나디사는 하녀를 붙잡아 세웠다.
“앞으로.”
“아, 네?”
“청소도 내가 할 테니 들어올 필요 없습니다.”
히아신의 입술이 남긴 자국이 가슴 언저리에 남아 있어, 전에도 하녀가 씻는 걸 돕지 못하게 한 경력이 있었다. 제 일을 뺏겼지만 공주의 하녀답게 내색하지 않는 듯했다.
청소 도구를 가져간 하녀가 퇴장하고 드디어 둘만 남게 됐다. 피곤한 기색의 나디사는 제 책상을 차지하고 있는 그의 앞까지 걸어갔다.
“여기서 무얼 하십니까.”
“매일 편지지를 받아 간다는 이야기가 있길래. 누구한테 그렇게 쓰나 싶었는데 편지는 보이지 않네? 보내지도 않는 것 같고.”
“그 때문에 오셨습니까?”
란은 꿈쩍도 하지 않는 나디사가 대단하다는 듯이 휘파람을 짧게 불었다. 용건은 확실히 있긴 있었는지 그는 책상에서 손을 뗐다.
“할 말이 있어서 왔지.”
“네. 하십쇼.”
“너 말이야.”
나디사는 그의 수작에 말려 함부로 떠들다간 신세를 망칠 것이었다. 히아신에게 쓰는 편지는 세상에 나와선 안 된다. 무슨 이야기를 듣더라도 동요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란도 준비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 손길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 왔다.
“몸 상태가 왜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