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히아신은 진군하는 공주의 천막 근처에 숨어 있었다. 왕성까지 따라가지 않고, 그만의 그녀를 조용히 이곳에서 기다렸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그녀가 올 것 같았다. 사랑에 빠지게 하는 물약을 들고 쫓아다니는 건 아무래도 미친놈 같으니까.
뭐, 물론, 충분히 미쳐 있지만. 히아신은 습관처럼 물약을 떠오른 새벽빛에 비추어 보고 있었다.
나디사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잘 듣고서도 따라가지 않았던 것은, 한 번만이라도 그녀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장면을 보고 싶어서일까.
아버지가 준 물약을 가슴 깊이 넣어 둔 히아신은 계획을 세웠다. 오늘은 이 재미 없는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생각했다.
나디사를 지켜보지 않고 있으니 하루가 너무 더디게 갔다. 시계를 수시로 보는데 분침이든 초침이든 느리게 가는 듯한 현상이 생겼다.
그때 알았다. 나디사는 나의 초침이구나. 여기에 나의 이름을 박아 넣어 나를 시계로 만들었다. 저 없이는 시간이 가지 않게 만들어 두는 치밀함에 울고 싶었다.
공주가 왕성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가슴도 두근거렸다. 나디사를 따라갈걸. 왜 나디사가 돌아오는 걸 보고 싶다고 그런 결정을 한 걸까. 나를 찾아오는 것도 아닌데, 나를 보고 싶어서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늘 쫓아만 다니다 보니 한번 쫓겨 보고 싶었다. 하지만 시계가 돼 보니 알겠다. 초침이 그를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시간인 그가 초침을 쫓아서 밀어내는 거라는 걸.
덕분에 그는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다른 여인, 즉 공주의 천막만을 목이 빠져라 바라보고 있으니까. 라드군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저 하얗고 커다란 천막만을 지키고 있었다.
공주는 무리한 일정을 짜서 수도로 귀환하는 중이었다. 오늘이 천막을 치고 자는 첫날일 것이다. 군사들의 체력을 생각해서 멈출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저기를 계속 보다 보면 나디사가 돌아오지 않을까.
나디사의 목적지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만일 돌아오면 그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쓰고 주위를 맴돌아야 하나.
그러나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자빠져 있을 때가 아니라는 듯이 누군가 그의 뒤통수를 꼬집었다. 나무에 누워 잠을 청하던 그는 가지가 흔들릴 만큼 세게 일어나 앉았다.
“이런.”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수풀 속에서 동족의 힘이 느껴졌다. 수는 많지 않았다. 왕궁 근방까지 온 터라 마음이 풀어진 사람들과 무장을 푼 군인들이 여럿 있었다. 공주의 천막, 그 옆으로는 군대와 영토를 가진 대귀족들의 천막, 그 밖으로는 여러 유명 인사들의 목숨이 위험했다.
“파르난이다!”
“어디!”
왕실군이 숲에 숨은 눈을 찾아냈다. 하지만 허둥거리며 달려와 창을 던지는 군인들과 달리 히아신은 침착했다. 그때와는 수부터 차이가 났다.
하늘에 떨어져 기습하던 때와는 준비성이 다르다. 거기다 여기는 수풀이 적은 평야였다. 적은 수는 금방 제압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헛고생인 걸 알고도 나타난 이유가 무엇일까.
어두운 새벽을 밀어 내며 해가 떠오른다. 나무 위에 서있던 히아신은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시력이 좋은 그는 멀리서 날아오고 있는 네 마리의 라드를 볼 수 있었다. 무장을 한 채로 숲에서 튀어나오는 파르난의 사람도 알 것이었다. 히아신은 불어오는 바람에서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다가오는 라드는 전에 볼 때보다 더 성장한 듯했다.
네 개의 날개를 가진 라드가 붉은 태양을 싣고서 오는 그림이었다. 아침을 맞이하는 그 순간 파르난의 손에 든 칼이 바람에 사라져 갔다. 촛불을 끄듯이 검은 기체가 바람 앞에선 꼼짝하지 못했다.
바람의 비호를 받고 있는 네 개의 날개. 기습을 한 파르난은 나디사를 기다린 것처럼 얼어 있었다. 바람을 맞고 사라지는 파르난의 군사들을 본 사람들이 하늘을 우러렀다.
태양을 타고 오는 아름다운 여인이라. 네 개의 날개가 달린 라드. 제때 맞춰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파르난의 군대들. 째깍째깍, 그의 머릿속도 시계 부품이 돼버린 것일까. 퍼즐이 맞추어진다.
“돌아왔네.”
그리고 그의 동족들은 바람에 겁을 먹은 것처럼 도망간다. 머리 위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히아신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상했다.
이건, 너무 이상했다.
마치 아버지가 일부러 그녀를 주목시키는 듯했다.
초침 역할을 맡은 그녀가 오자 그의 시간은 빨라졌다.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을 주느냐 마느냐. 아버지가 주목하는 사람의 결말은 좋지 않았다. 그의 죽이고픈 아버지는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빨리 선택하지 않으면, 그녀를 이보다 더한 어둠 속에 몰아넣겠다고.
* * *
“욱!”
나디사는 참지 못하고 속에 든 것들을 게워냈다. 빨간 피가 섞여 나오는 것을 보고서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그리사의 부상이 심각해 보여 멈출 수 없었다. 남은 잔당들이 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추적을 이어 오다가 진을 치고 있는 왕실군을 맞닥트렸다.
“나디사 경!”
자신을 찾는 소리에 나디사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피가 묻은 바닥에 토사물은 군화로 슥슥 문질러 없앤 후였다.
“아, 여기 계셨군요.”
“네. 무슨 일로…….”
남은 잔당들이 이쪽으로 뛰어가는 걸 봤다.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 공주의 천막이고, 그녀는 본 적도 없는 파르난의 기습을 그녀가 막아 냈다고 떠들어 댔다. 착지하고 나서 란과 그리사가 치료에 들어갔다. 그리사의 부상은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걱정이 되는 터.
그런데 진짜 걱정해야 될 상황은 따로 있었다.
“그리사 경의 상태를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요.”
“네. 어떻습니까.”
“잠에 빠지게 만드는 파르난의 힘에 당한 것이라서 신관의 힘이 필요했지요. 제때 란 님이 응급 처치를 해서 다행입니다. 곧 의식이 돌아오실 거예요.”
하급 신관의 말에 나디사는 안심하여 다리 힘이 풀렸다. 날개를 네 개를 만드는 건 힘이 많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거기에 디디까지 란을 실어서 데리고 오게 했으니. 공주의 천막으로 복귀하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었지 무언가. 자신이 쓰러져도 동료를 챙겨 줄 사람이 있다는 게 안심이 됐다.
“저, 나디사 경.”
“네.”
치료소 앞에서 이만 물러가 쉬고 싶었다. 찾아온 물건을 공주에게 전달하고 걱정 없이 자고 싶었다. 그런데 이 말이 많은 하급 신관은 그녀의 발을 묶어 두고 싶은 모양이었다.
“저 내일 출발하실 때 제 동생을 좀 보아주실 수 없을까요. 워낙 그 아이가 좋아하는 터라.”
“저를 왜.”
“저희의 영웅 아니십니까.”
“……예?”
하급 신관의 말에 무언가 잘못 돌아간다고 판단하며 치료소 앞을 떠나왔다. 그 하급 신관과 헤어질 때도 그런 게 아니라고 거듭 변명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모든 건 우연이고, 그녀는 기습이 있는 줄 몰랐으며, 네 개의 날개는 빠르게 오기 위해 썼을 뿐이라는 걸.
그런데 그러고 말 게 아니라는 건 치료소 밖으로 나와서야 알았다. 하급 신관의 말을 듣고 나니 자신을 향한 시선이 더 잘 보이는 듯했다. 선망과 기대의 눈빛이 거북한 나디사는 잽싸게 피해 골목으로 들어왔다. 두리번거리며 쉴 곳을 찾는 그녀는 주의력이 부족해 앞을 보지 못했다.
“아!”
“어, 죄송합니다.”
무작정 사람이 없는 곳으로만 들어오다가 보니 해가 들지 않는 곳으로 와 버렸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편지를 쓰던 남자가 일어나 자리를 비켜 줬다.
“아, 아닙니다. 제가 조용한 곳을 찾다가.”
비슷한 이유로 이곳을 찾은 나디사는 그의 손에 들린 편지지를 보며 말을 삼켰다. 남자는 편지에 가 있는 시선을 보며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아, 혹시 죽을지도 모르니까요. 가족에게도 편지를 써야 돼서.”
그는 편지를 쓰는 걸 부끄러워했지만 나디사는 그의 말에 솔깃한 부분이 있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피 맛이 느껴지는 듯했다. 편지라. 나디사는 단정히 손을 모으며 말했다.
“그 편지지는 어디서 받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