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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78화 (178/210)

178화

일이 재밌게 돌아가고 있었다. 침실 옆에 딸린 응접실 테이블엔 유모가 만들었다는 쿠키와 따듯한 우유가 올려져 있었다. 차려진 쿠키를 조금씩 맛보며 여행의 곤궁함을 달래 보려 했으나 보이는 광경이 워낙 신기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리 하시면 시원하실 겁니다.”

“아, 감사합니다.”

왕세자를 죽일 셈이냐고 꾸짖던 유모는 낯을 바꾸어 아주 상냥해졌다. 그러는 데에는 란의 공이 컸다.

“이것 보세요. 상처가 아물죠?”

“어머, 세상에.”

왕세자의 몸을 치료해 주겠다며 나선 란의 신력으로 시체 같았던 안색이 사람 같아졌다. 왕세자의 병은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라 신력으로 해소하긴 어렵지만 남은 날을 조금 더 늘려 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 턱이 없는 유모는 란의 신력을 보고서 마음을 내어 준 듯했다. 지금까지 왕세자가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길 동안 관심을 주는 이가 없었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리 고마운 분들인지도 모르고 제가…….”

“아닙니다.”

신전에서 사람들 상대하는 것에 이골이 난 란은 상대의 혼을 빼고 있었다. 모르고 보면 정성을 다해 사람을 치료하는 다정다감한 신관 같다.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나디사 일행은 우유 한 잔도 못 마시고 있었다. 속는 유모가 가여워서 말이다.

“그간 얼마나 힘이 드셨습니까. 저희에게 잠시 맡기고 쉬셔도 됩니다.”

그러나 란도 넘지 못할 산은 있었다. 왕세자의 병환 이후 정신을 놓았다는 유모는 고집이 황소보다 더한 사람이었다.

“아닙니다. 이리 왕세자께서 나아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아서…… 여기 있고 싶네요.”

성격 좋은 척을 하는 란의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유모는 보지 못한 듯싶지만. 란과 같은 편에 서 있지만 저리 당하고 있는 걸 보니 은근히 고소하기도 했다.

“그럼 앉아서 지켜보세요.”

상냥한 말로 사람 뒤통수칠 준비를 하다니. 과연 신관은 믿기 힘들다며 불평하던 그리사가 조심스레 귀엣말을 건넸다.

“우리끼리 있으니 이야기해 줘요. 공주가 찾으라는 게 무언데요.”

목이 말라 우유를 마신 나디사는 엄지로 입가를 닦았다. 보조로 도와줄 두 명을 그녀가 골랐고, 이들에 대한 책임도 그녀가 질 거였다. 아트리스, 그리사는 무언지도 모르면서 그녀를 따라와 도움을 주려한다. 그녀가 이들을 믿지 않으면 이번 일은 성사될 수 없었다.

“왕세자께서 찾으시던 보물에 공주님도 관심이 있으신 듯해. 그 정보를 파르난도 찾고 있고. 우리야 이유를 모르지만 이곳에 있는 정보를 그들보다 먼저 가져오길 원하셔.”

란의 치료술에 정신이 팔린 유모를 주시하며 나디사는 설명을 마쳤다. 란처럼 쓸모없는 일에 저희를 끌고 왔다며 화를 내도 십분 이해했다. 무슨 반응이든 감수하리라 생각했지만 요즘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작정한 것처럼 그녀를 놀라게 했다.

“그렇군.”

“물건을 가져다주기만 하면 돼서 금방 일이 끝나겠어요.”

“그리고 저 바보 같은 신관도 일을 빨리 끝낸다면.”

다정히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는 말들이 더없이 좋았다. 그간 힘든 일들이 연달아 벌어져 수척해진 그녀를 알아주는 듯했다.

“이봐.”

심술 맞은 가을바람도 눈감아 줄 만큼 따뜻한 응접실에 란이 나타났다. 치료를 다 끝낸 건가 싶어 고개를 내밀었더니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유모가 보였다. 란은 응접실로 들어와 잔에 따라진 우유를 낚아채 갔다.

“하, 약을 탔는데도 재우는 데 뭐 저리 오래 걸리는지. 빨리 나와. 저 안쪽에 뭔가 있는 것 같아.”

확실한 건 란이 있으니 일이 수월하게 돌아간다는 거였다. 하기 싫다고 입으로는 투덜거려도 여기 온 사람 중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건 란이니까 말이다. 그에게 뒤처질 수는 없어 나머지 일행도 란을 따라나섰다.

“여기도 보고.”

“제가 안 그래도 보려고 했습니다.”

“나를 형님으로 모시기로 한 걸 잊었나?”

란이 비아냥거리자 아트리스는 인상을 구긴 채로 침실 뒤편을 뒤졌다. 그쪽에 장을 짜 둔 것이 있었다. 달려든 사람만 셋이기에, 한가해진 나디사는 유모의 앞쪽으로 조심조심 걸어갔다.

코를 골며 자는 유모의 손에 따듯한 차가 들려 있었다. 저기에 란이 수면 약이라도 탄 모양이었다. 참으로 치밀한 자라고 생각하며 유모의 손에 들린 잔은 그녀가 빼 두었다.

찻잔을 조용히 치우기 위해 몸을 튼 순간 유모의 팔목 안쪽으로 열쇠가 보였다. 고개를 갸웃한 나디사는 그 열쇠를 조심히 손가락에 걸었다. 휙, 유모가 깨지 않게 한 번에 빼낸 그녀는 검지 길이 만 한 열쇠를 쥐었다.

“여기.”

침실에 있는 장을 다 뒤졌는데도 나오지 않는다. 감이 좋은 란이 침대보를 들췄는데 침대와 땅 사이에 공간이 수상쩍으리만큼 넓었다. 나디사도 곧바로 엎드려 밑을 살폈다. 침대 밑에 껴 있는 상자가 보였다.

“내가 꺼내 올게요.”

그리사는 엎드려 기어가 상자를 끄집어내 왔다. 배와 턱에 상당한 양의 먼지가 묻었으나 그는 아무렴 어떠냐는 태도로 털어 낼 뿐이었다. 상자의 문은 아트리스가 열었다.

“이건.”

그들이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디사도 그쪽으로 달려갔다.

“가져갈 만한 게 있어?”

“그게…….”

커다란 상자 속에 있는 것은 또 하나의 상자였다. 성질 급한 란이 그것을 들어 올렸으나 작은 열쇠 구멍이 있는 것 때문인지 짜증을 부렸다.

“이건 또 언제 찾아?”

“혹시 여기에 맞는 건가?”

유모의 팔에 걸려 있었던 열쇠를 챙겨 오길 잘했다. 못나게 구겨져 있던 란의 얼굴이 다림질한 것처럼 쫘악 퍼지는 걸 보면.

“잘했어!”

들이밀어진 구멍에 나디사는 열쇠를 꽂아 넣었다. 달칵, 하고 돌아가는 소리에 기대감은 계단 오르듯 점점 올라갔다. 왕가와 파르난의 사람들이 목숨 걸고 찾는 보물. 그 단서를 눈앞에 두자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어서 열어 봐.”

나디사는 상자를 열고서 그 안의 내용물을 앞에 있는 세 남자에게 먼저 보였다.

기분을 알 수 없는 침묵은 끝나지 않았다.

* * *

“가자고!”

“안 됩니다.”

“이것만 가져오라는 명이었어. 우리 할 일은 끝난 거라고!”

나디사는 싸우고 있는 란과 아트리스를 중재할 힘이 없었다. 유모가 깨어날 때를 대비해 침실을 나온 그들은 귀빈들이 쓰는 손님방을 얻었다. 왕궁의 전성기 시절에 지어진 손님방은 금박 장식을 써서 식기 하나까지 고급스러웠다. 그 화려한 방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는 이유엔 저 고성도 포함이었다.

“그 산맥을 오르는 게 얼마나 힘이 든 줄 알아? 너희 라드를 타도 못 올라간다고!”

“그래도 공주님께 가서 보고를 드리고 결정하시면 따라야 된다고요.”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면 되잖아.”

“가야 합니다.”

“난 안 가!”

“당신도 가야 하고요.”

상자 안에서 나온 게 보석이나 단검 같은 거였다면 차라리 나았을까. 왕세자가 침대 밑에 둘 정도로 아낀 보물은 낡은 지도였다. 보물의 위치를 적어 둔 듯한 그 지도에는 험준하기로 유명한 산맥이 있었다. 샤포드의 설산에 비할 만큼 춥고 바람이 거세 라드들도 진입이 힘들 터였다.

“애초에 그 산맥엔 아무것도 없어. 공주가 헛기대를 거는 거라고.”

“우리 주인은 이제 공주님으로 바뀐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거기다가 이건 나디사에게 맡긴 임무이고.”

“나에게도 맡겨진 임무야. 호들갑 떨 것 없이 여기에 있자고. 어차피 공주의 목적지도 여기라니까!”

“한시라도 빨리 가져가자는 겁니다. 공주께서 다음에 어떤 명을 내리실지 모르니까요.”

두 사람이 목에 핏대를 세우자 사람 열이 써도 남는 손님방이 비좁게 느껴졌다. 이번 임무는 보안과 비밀도 중요했다. 엿듣는 이가 없다고 보장할 순 없었다. 결국 나디사는 중재할 마음으로 왼손을 들었다.

“그러면 다수결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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