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록에게는 미안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맹세할 수 있는 건 스스로 저지른 일들은 전부 수비교를 위한 것이었다는 거다. 나디사 마로닌처럼 태어난 사생아들에게 조금의 연민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신전에 해가 된다면 주저 없이 목숨을 거둘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록은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안 된다. 제 딸이라는 걸 안 록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말이다.
“어느 정도 나라에 안정이 찾아오면 그 자리는 란에게 물려주게.”
“…….”
“딸과 둘이서 회포라도 풀며 살아야지. 록, 너는 그런 삶이 어울리는 사람이니까.”
소리 없이 눈물방울을 흘리던 록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정돈했다. 그처럼 망가진 표정의 록은 처음이라 랍은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신전이 염려되는 마음에 입은 쉬지를 않는다.
“공주도 너만큼이나 연약하지. 여인이니까. 나를, 아니, 수비교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훗날 마음이 건강한 왕가의 사내로 다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전부 연약하다고 보시는군요.”
“정 못 하겠으면 란에게 맡겨라. 그 아이는 록 너보다 신관다우니까.”
“공주님은 연약하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고요.”
록의 말이 제 가슴에 불을 지르는 듯했다. 랍은 황급히 화끈거리는 가슴을 짚었다. 단순한 체증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뇌를 도끼로 찍어 내리는 느낌에 호흡이 거칠어지자 물약을 꺼내는 록이 보였다.
“이게 그토록 사랑하시는 신전의 결정입니다. 그토록 믿으시는 귀족들의 결정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는 연약해 이리 해독약을 찾아왔지만…….”
록은 랍이 손을 뻗는 그 순간에 쥐고 있던 물약을 떨어트렸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지는 소리가 청아하고 높았다. 옆으로 쓰러진 랍은 바닥에 퍼지는 파란 물약을 다급히 주워 담아 봤지만 소용은 없었다. 그사이 일어난 록은 식은 찻잔을 치우며 랍을 내려다보았다.
“저에게 나디사에 관해 일러주셨다면 이런 마지막은 아니었을 텐데요.”
“로, 록…!”
“시신은 아침에 수거하겠습니다.”
그에겐 연약해지지 않겠다 다짐한 록은 냉정히 돌아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돌아보지 않을 걸 알지만 랍은 포기하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지막 순간에 기억 나는 얼굴은 누구인가. 그 질문의 대답을 오늘 그는 알게 된다. 랍의 마지막은 저 스스로의 얼굴이었다. 젊고, 지금보다는 철없던 그때의 자신.
연약한 꽃을 사랑했지만 언젠가부터 꽃이 피어나는 계절에도 웃지 않게 됐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던가. 랍은 눈을 뜬 채로 떠났다. 신조차 맞이해 주지 않는 차가운 죽음이었다.
* * *
공주의 증표는 가히 만능이었다. 왕이 돌아가시고 침울한 분위기를 이루던 왕궁은 아래쪽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긴장 상태였다. 공주의 증표가 없었다면 성문을 열 수도 없었을 터.
간혹 정신을 차리곤 했다던 왕세자는 왕궁 중심부에 있었다. 왕족이 살아 있다는 소식에 희망을 얻었는지, 공주가 보낸 조사단이라는 핑계가 꽤 잘 먹혀 들었다. 형제인 왕세자에게 전달할 물건이 있다는 말로 그의 처소 앞까지 왔으나 이런 기이한 복병을 만날 줄은 몰랐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왕세자에게 종일 붙어 간호를 맡고 있다는 유모는 지금도 묽게 만든 수프를 들고서 있었다. 의식 없는 왕세자의 입에 한 수저씩 떠서 넣어 주며, 그의 용변 처리와 몸을 닦는 일까지 도맡아 한다고 시녀에게 들었다.
쉬지 않고 날아와 왕세자의 집무실부터 들러 보았으나 그곳엔 아무런 서류도 없었다. 왕세자의 건강이 악화되고 나서 중요한 물건들은 모두 그의 침실로 옮겼다는 증언이 있었다.
식사, 수면이 부족한 상태에서 왕세자의 침실로 방문한 일행은 예민이 극에 달했다. 잠시 들어와 쉬라는 말을 권유할 법한데도 유모는 침실이 있는 문을 절대 열어 주지 않았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몇 가지만 확인하면 됩니다.”
“안 됩니다.”
“침실에는 가지 않습니다. 왕세자께도 볼일이 없고요. 저희는 공주님의 명으로…….”
“공주님의 명?”
천한 하녀도 못 할 일을 손발 걷고 나선다고 할 때부터 보통 여인이 아님을 알았지만 이리 고집이 센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다.
“공주님이 무어라고 하셨던 간에. 아니, 공주의 말이 무어가 됐던 간에. 침실은 내어 줄 수 없습니다. 들어가려면 이 노인을 죽이고 가세요.”
“지금 공주님을…….”
“공주의 부탁을 받고 왕세자께 해를 끼치려는 걸 내가 모를 줄 압니까?”
유모의 분노에 찬 목소리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왕세자가 쓰러진 날부터 독살임을 주장하는 그녀가 미쳤다는 말은 제법 들었지만 실제로 만나 보니 더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저희는 지금 받은 명을…….”
“알겠습니다.”
그리사가 더 따지려고 드는 차에 나디사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말로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나디사가 고개를 젓자 일행도 더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뒤로 물러섰다. 콧대가 높아진 유모는 비웃음을 띠고서 침실 문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에 덩그러니 서 있게 된 이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쾅, 침실 문이 닫혔다. 저 안만 확인하면 복귀도 시간문제인데. 코앞에서 황금 덩이를 놓치게 됐으니 한숨이 안 나올 수가 없다.
“일단 식사부터 할까. 아까 그 시녀가 준비해 준다고 했는데.”
“그러죠.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해도…….”
“이봐.”
왕궁까지 날아오는 동안 서로 다른 라드를 타서 다툴 일이 적었다. 궁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란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어, 신분을 증명하는 데에도 도움을 받았고. 대신전도 왕궁에서 가까워 일이 틀어지면 거기에 신세를 질 수도 있었다.
방해만 할 줄 알았던 란이 알차게 도움을 줬다. 하지만 란의 표정을 보아 이번 건은 무탈하게 지나가지 않을 듯했다.
“내일 와? 이 지긋지긋한 곳을 또?”
“그럼 어쩝니까. 저 유모 말에 문이 열리고 닫히는데.”
“그래 봤자 유모다. 아무런 힘이 없지. 이 궁도 공주가 도착하면 그의 것이 되고. 왕세자는 뒷전이 될 테고. 우리가 저들을 밀치고 들어가도 누구도 우리에게 따지지 않는다는 거다.”
“그럼 직접 하시죠.”
아트리스의 냉소적인 말에 란은 우아하게 웃어 보였다.
“두 번 말하지 않아. 나는 이런 데에 낭비할 시간이 없어. 아주, 아주 귀하고 바쁜 몸이라서.”
그의 말을 듣고 이번엔 그리사가 짧고 굵게 비웃었다. 내일 쉬고 다시 오자는 말에 문제가 있었는가. 나디사는 눈싸움을 시작한 남자들을 보며 복도에 사람이 지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 꼴을 남들이 보면 공주의 명성에까지 누가 되는 거였다.
“이러지 말고 내려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내가 해내면 어쩔래.”
란이 오만하게 말하며 으름장을 놓자 아트리스 역시 지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만 싸우는 게…….”
“형님으로 모셔.”
이참에 끝장을 보려는 듯이 란은 말을 던지자마자 걸어가 침실의 문을 잡았다. 허락 없이 열어젖히는 그의 대담함에 남은 세 사람은 입이 벌어졌다.
침입자를 발견한 유모의 비명이 들렸으나 란은 거침없이 침실로 들어갔다. 바로 문이 닫혀 안에 상황은 볼 수 없으나 이윽고 번쩍, 터지는 노란 빛이 열쇠 구멍으로 새어 나왔다.
경악은 걱정으로 번지는 게 당연했다. 저 안에서 학살이라도 벌이는 거 아닐까 싶을 즈음 문이 열렸다. 하얗게 질려 있는 세 사람을 맞이해 주는 건 상기된 얼굴의 유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