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랍의 기억은 엊그제 색칠해 둔 그림처럼 선명했다. 뛰어난 신력 덕에 인망을 얻은 그는 탄탄대로의 삶을 살았었다. 이룬 것이 많아 삶이 시시하게 보일 그즈음 한 소년을 소개받았었다.
란, 록, 랍, 라, 린…. 수비교의 신관은 순결을 지키며 부모가 지어 준 이름을 버리고 훌륭한 신관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랍은 돌아가신 스승의 이름을 물려받은 록이 첫눈에 좋았다. 신력이 높다는 소문이 자자한 소년은 눈이 맑고 총명하며, 신관들이 기대하는 세상의 평화를 가져오기에 충분해 보였다.
신관은 자식이 없다. 그래서 자신의 제자나 밑으로 들어오는 신관을 자식처럼 아끼기 마련이었다. 랍은 제 손으로 기른 록이 차기 첫 번째 신관이 되어 그가 바라는 이상향을 이루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작금의 신전은 겉보기만 좋지, 껍질을 깎아 보면 과육과 씨앗이 문드러져 있었다. 평화로운 시대에는 사람들이 기도에 정성을 다하지 않는 법. 전쟁을 원한다는 뜻은 아니었으나 느슨해진 시대의 느낌이 백성을 넘어 왕가에까지 미쳤다. 평화로운 시대를 감사드려야 할 왕세자가 사치를 일삼는 것도 랍의 걱정거리였다.
어느새 랍이 두 번째 신관의 자리에 오르고 차근차근 제자인 록의 자리도 신경 쓰고 있을 무렵이었다.
신전의 영향력을 드높이는 데에 큰 공을 세운 록은 인기가 좋은 사내였다. 근래 들어 곡식을 기부하는 여인들이 늘었다 했더니 록이 미인이라는 소리에 혹한 발걸음 때문이렷다. 순결을 미덕으로 삼는 신관으로서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록의 미색으로 신전이 살아난다니 할 말은 없는 듯했다.
‘뭐라고.’
그러니 록을 향한 투기와 시기도 많았다. 능력이 뛰어나 윗분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록을 두고서 많은 말이 오가는 건 알고 있었다. 전부 들어 줄 가치 없는, 질투심을 넣은 말들이라 무시할 뿐이었다. 오로지 록을 단단한 후계로 세우는 것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니.
‘분명히 봤습니다.’
록을 시기하는 신관들은 어리고, 둔한 이들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그날 밤의 보고를 올린 자는 랍도 믿고 쓰는 젊은 신관이었다. 록의 부정함을 고하고자 그를 찾아왔으나 랍은 신뢰를 잊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라고.’
웬만해선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진 않았다. 젊은 청춘의 남녀들이 봄꽃이 피는 왕궁에서 눈길 한 번, 입술 한 번 맞댈 수도 있지. 일일이 파면하다 보면 신전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을 터였다. 신관도 남자이고 사람이었다. 하물며 록처럼 젊고 잘생긴 사내라면 여자들이 가만두는 게 이상할 터.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랍은 남들 눈을 피해 여자를 신전으로 불러낼 수밖에 없었다.
‘티사 경.’
‘…….’
죄인은 말이 없었다. 라드군에 관해 알지 못하는 랍도 그녀의 이름은 몇 번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소수 종족이지만 외모가 출중하고 실력은 그보다 더 뛰어나 신전에서도 그녀의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신전에 록이 있다면, 라드군에는 티사 레나이가 있다는 말이 있다. 사툰 종족이 아닌 사람이 주목받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했지 않았나. 가문도 없는 고아라던데.
‘…배가 조금 나와 보입니다만.’
은근슬쩍 손과 망토로 가리려고 해 봐도 랍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여인들은 특히나 아이를 가졌을 때 인심이 후해지고 기도에 열성을 다한다. 신전에서는 심하면 하루에 수십 명씩 임신한 여인을 보곤 했다. 그러니 아랫배가 조금 부푼 그녀의 모습이 절망을 뜻한다는 걸 안다. 이건 눈길 한 번, 입술 한 번 스친 수준이 아니었다.
티사 레나이는 소문과는 달랐다. 소문 속 그녀는 소수 민족의 희망으로 거칠 것이 없을 듯했다. 하지만 마주 만나 본 그녀는 병색이 짙은 안색에 팔과 다리는 꼬챙이처럼 말랐으며, 하얗기만 한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다. 소문으로 접한 티사 레나이가 맞는지 여러 번 다시 물었을 정도였다.
‘아이에 대해 누가 알고 있습니까.’
‘…저뿐입니다.’
‘아이는 없었던 걸로 합시다.’
젊은 시절의 랍은 정이 없고 융통성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티사 레나이도, 록도 양측의 기대를 안고 있는 앞날이 창창한 이들이었다.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으나 상대가 그 티사 레나이라면 둘 모두를 위해 덮고 가는 게 낫다 싶었다. 하급 신관들을 대동하고 저만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하지만 사람이 없는 신전의 옛 서고에서 티사 레나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제가 떠나겠습니다.’
‘…뭐라는.’
‘아이만 낳게 해 주신다면요.’
그때부터 그 어떤 모진 말에도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는 티사 레나이와 팽팽하게 맞섰다. 물러설 듯하면서도 그 여자는 군인답게 본인이 만든 최후의 선을 지키려고 했다. 이 실랑이는 해가 뜨기 전까지 계속되어 두 사람을 봐주려던 랍의 마음도 틀어지고 말았다.
‘그럼 관례대로 아이를 안은 채 죽을 수밖에 없겠지. 신관은 태어나지 않네. 타고난 아이를 데려와 기르고 가르치는 것이지.’
이 여자의 고집과 신념은 언젠가 록을 다치게 할 거라고. 티사 레나이는 유명인이었다. 그녀가 낳은 아이의 아비가 누구일지 다들 추측해 볼 것이었다. 하면 정의감과 책임감이 강한 록은 신전을 버릴 것이고. 록 덕분에 살아나고 있던 신전의 명성이 땅으로 떨어질 거였다. 이럴 순 없었다.
‘저만 죽이시면 됩니다.’
티사 레나이는 조곤조곤한 투로 제 뜻을 전했다. 어떤 성격인지 대화 몇 마디만 나누어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주제를 아는 사람이니 랍의 마음과 생각도 알았을 터였다.
‘아이를 건드리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면 직위도, 목숨도. 제가 알아서 버리겠습니다.’
랍이 원하는 것과 한참 거리가 멀었다. 아이만 포기하면 간단한 일인데 왜. 하지만 랍의 넓은 아량에도 티사 레나이는 거절했다. 록에게 알릴 필요도 없다는 그녀의 강한 의지에 지고 만 것이다.
‘때가 되면 제가 찾아갈 테니 그때 제 말이 진실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알게 될 겁니다.’
그 ‘때’ 라는 것은 티사 레나이가 아이를 낳아 제 친우에게 맡긴 후였다. 후련해진 낯으로 찾아온 티사는 약속한 날에 목숨을 바쳤다. 그녀의 죽음은 대대적으로 자살했다고 알려졌으나 신관과 정을 통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신전의 손에 죽었다.
그런 이들이 어디 한둘이었겠나. 하지만 죽음을 먼저 요청한 그녀의 모습은 이상하게 잊히지 않는다. 끝이 다가온 그녀에게 혹 후회하지는 않느냐고 물어봤었다.
‘고작 핏덩이 때문에 모든 걸 잃는 거요.’
‘랍 님.’
‘예.’
‘제가 고아라는 거 알고 있으십니까?’
담담히 운을 뗀 티사는 겨누어진 칼에 비친 제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제 부모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저를 찾아왔거든요. 도저히 아이를 키울 형편이 아니었더라고. 그럼에도 나를 낳았고, 나는 태어나 좋은 사람, 행복한 일들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니 그 아이가 세상에 나와 느낄 행복을 이번에는 내가 지켜 주어야겠지요. 랍은 이 부분은 록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는 록이 짐작했을 것이다. 그는 성장한 티사의 자식이 혹여 진실을 알게 될까 봐 사람을 써서 감시해 왔다. 하지만 그 감시에 악한 마음만이 있던 것이 아니었다. 티사의 자식이 잘 자라는지 궁금했었다는 말을, 이제 와 랍은 절대 하지 않기로 했다. 과거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록은 하염없이 울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그는 냉정한 신관이 되기를 원했다. 왕세자는 백성을 돌볼 생각보다 보물찾기에 매진해 있었고 왕은 늙었으며, 왕가의 희망인 쌍둥이 남매는 어렸다. 다음 왕을 제 손을 길러 강한 수비타 왕국을, 수비교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길을 록이 이어받을 수 없음을 오늘에야 인정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