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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75화 (175/210)

175화

떠나는 날짜가 내일이거나 모레였다면 안 좋을 뻔했다. 오늘 달이 밝은 시간대에 떠나기로 한 나디사는 일찌감치 나와 짐을 로마의 등에 실어 두었다.

이번 일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마벤과 시네라는 부탁하지 않았음에도 배웅을 나왔다. 마벤과 작별인사차 포옹을 끝내고 떨어진 나디사는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라드 두 마리를 바라봤다. 한 마리는 로마고, 한 마리는 히아신의 디디. 마벤과 시네라는 본인이 아끼는 물건을 동료들의 여정에 보태 주었다. 시네라는 향이 톡 쏘아 잠이 깨는 찻잎을 주었고 마벤은 직접 자수를 넣은 손수건을 주었다.

아쉬운 작별인사를 끝맺고 성벽 위로 올라온 일행이 라드의 등에 실은 짐을 줄로 고정시키던 차였다. 탈 라드가 없는 란만이 딴짓과 시비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말이야.”

록에게 인사를 하고 가자고 하는 걸 나디사가 말렸었다. 떠나는 마당에 하는 인사는 반갑지 않았다. 히아신도, 라넌도. 마음에서 제때 보내지 못했는데 록마저 떠나간다면. 그래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오겠다는 란을 만류하고서 강제로 출발 시간을 정했다. 란은 그 때문인지 보이는 것마다 시비였다.

“왜 두 마리가 너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란이 라드에 대해 물어볼 줄은 몰랐다. 라드의 안장 위치를 고치고 있던 그리사도 시선을 던져 왔다. 충성심 있는 저 아름다운 라드의 정체를 아트리스, 그리사는 알기에. 디디가 히아신의 라드라는 것, 그리고 히아신이 파르난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란은 몰라도 저 두 사람은 속이기가 어려웠다. 그녀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심려 끼칠 순 없었다.

“출발 전에 할 말이 있어.”

요염한 달빛이 살결이 미끈거리는 디디의 몸을 훑었다. 시선은 안중에 없이 천진하게 제 발바닥을 핥고 있는 디디는 볼 때마다 전주인의 성품을 닮은 듯했다. 디디가 어디 가서 죽는 것보다야 자신을 따라오는 게 낫지만 그로 인해 해명하고 밝혀야 할 일들이 많았다.

“이 봐.”

본인의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자 란은 남은 시간을 들먹였다.

“빨리 출발하자고 이 시간을 고른 건 너잖아.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

“…조금 기다려 주시면 안 됩니까.”

아트리스가 감싸 주듯 내놓은 말에 란의 입술 끝은 더 삐딱하게 틀어졌다. 저 불같은 성질머리를 아는 터라 그녀는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 라드도 내 라드야.”

“… 디디가 나디사의 것이라고요?

험악해지던 분위기가 침묵으로 반전됐지만, 어느 쪽이 좋은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사연을 밝히기 쉽지 않았다. 전쟁이 지긋지긋한 란은 원흉인 파르난의 사람을 증오하고 있었고. 그나마 다행인 점은 라드 쪽에 무지한 란이 귀를 후비고만 있다는 거였다.

“그게 뭐 중요한 거야? 저 라드가 낯이 익긴 한데….”

란의 일이 바빠 히아신을 잊은 게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그가 걸고넘어질 게 어디 한두 가지여야지 말이다. 히아신에 관한 말을 피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그리사가 나서 주었다.

안장 위로 오른 그는 아무것도 없는 달을 가리켰다.

“저기 방금 뭐가 스쳐 지나간 것 같지 않아요?”

트집 잡을 준비를 하던 란의 시선도 그리로 향했다. 그 틈에 나디사는 비어 있는 디디의 등을 가리켰다.

“디디. 허리를 숙여.”

멀리 있는 디디에게 말로 명을 내렸다. 란은 저가 타기 좋게 몸을 숙인 디디에 올라탔다.

“잠도 자지 말고 가서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끝내자고.”

흐지부지된 고백이었으나 이러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란이 없는 날에 이야기해 봐야겠다 생각하며 나디사는 하늘로 올라갔다. 높은 세상에 오를수록 사람과 성은 장난감처럼 작아졌다. 그 아기자기한 풍경 위로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픈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란에게 그러고 싶었다.

* * *

록은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주에게 첫 번째 신관의 자리를 위임받았다. 공주의 눈 밖에 벗어나면 안 되는 사람들과 눈 밖에 나기 직전인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전쟁은 슬프고 참혹하지만 반란과 연관된 집단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만일 공주가 조금이라도 악한 사람이었거나 빚을 잊지 않는 이라면, 지금 공을 세워 두어야 나중에 가서 면이 설 것이었다.

모면할 방패를 찾아다니던 귀족들은 신전의 권력자인 랍을 택했다. 그가 꼬여 내어서 피치 못해 공주를 배반했다며. 그 걷잡을 수 없이 뜨거운 여론을 타고 신전의 최고 권력자가 된 란은 한 책을 수소문했다.

“여기에도 없으면 당신한테 있는 거겠지.”

랍은 수비교에서 파문을 당했다. 그리고 최고 신관만이 볼 수 있는, 신전의 치부가 적힌 적은 책은 사라진 상태였다. 록은 누구를 심문하면 그 책이 나올지를 안다.

“어디 있습니까.”

별관의 작은 서고로 끌려온 랍은 소파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침묵 중이었다. 사람을 시켜 랍의 짐이란 짐을 모조리 뒤졌다. 그처럼 중요한 책을 랍이 소지하고 있지 않을 리 없었다. 중요한 것은 늘 가까이에. 그가 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그 책은 대신전 밑바닥에 있다.”

체념한 듯이 말한 랍의 목소리는 더 바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옛정이 있어 가능한 예의를 갖춘 방식으로 데려오라고 일러뒀다. 하급 신관에게 끌려오는 모습을 차마 보일 수 없어, 사람의 발길이 적은 새벽녘으로 골라 두었다.

랍은 신전에서 지급되는 약소한 돈을 받고 길거리로 나가게 될 터였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있던 신전을 떠나게 된 소감이 어떨지 묻고 싶었으나 그의 늙고 지친 얼굴을 보니 어떤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

책의 위치. 그것만 알면 됐다. 원하는 것을 얻은 록이 돌아서려는 찰나 의자에 붙어 살 모양이던 랍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그 책에는 원하는 만큼 자세히 쓰여 있지 않을 거야.”

록은 랍을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탐욕스러우나 부정할 수 없는 록의 스승이자 아비였다. 그를 비난할 생각 없이, 객관적인 사실로 적힌 책을 읽고 나서 이 허한 마음을 달래고 싶을 뿐이었다.

란은 가던 걸음을 돌려 자세가 무너진 랍의 앞으로 왔다. 젊은 시절 그 총명하고 미덕이 흐르던 눈빛은 이곳에 없었다.

한때는 이 남자가 세상에서 제일로 자상하고 훌륭한 줄로만 알았었다. 란은 복잡한 심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차는 다 드셨습니까.”

말과 동시에 찻잔에 손을 대 보니 차게 식은 게 느껴졌다.

“여기….”

“아니, 됐어.”

차를 다시 데워 오라고 시키려는 차에 랍은 창백한 손으로 찻잔을 쥐어 입가에 가져갔다.

“나에게 이 정도도 과분하지. 그러니 걱정이야. 록, 너는 너무 물러 신전을 이끌 수 없을 듯하니.”

“그 걱정은 놓으셔도 됩니다. 저는 적어도 귀족끼리, 친형제끼리 싸움을 붙이지는 않을 테니까요.”

“하….”

헛바람이 든 듯이 웃은 랍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입술을 적실 정도로만 차를 마시고 더는 잔을 건드리지 않았다.

늙고 쇠한 시선이 바람에 흔들리는 록의 소매 끝자락에 닿았다.

“그날을 기억하는지 모르겠군. 바람이 불고, 너는 지금의 란이 하는 단발머리를 하고. 능력은 있지만 열의는 없는, 그런 뛰어나면서도 아름다운 신관이었지.”

걷지도 못하고 기던 시절의 이야기를 듣는 듯했다. 록은 지금의 란처럼 단발머리를 한 자신을 떠올리며 몸에 들어간 힘을 뺐다.

그때 저지른 실수가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삶의 전부였다. 하지만 랍의 이야기는 과거에 빠질 시간을 주지 않고 사나운 폭풍처럼 몰아쳤다.

“그 책에 쓰여 있지 않은 이야기를 해줄까 하는데.”

“…….”

“시간은 있나?”

록은 랍에게 동의한다는 뜻으로 눈을 감았다 떴다. 시간. 랍의 이야기는 차고 으스스한 새벽의 힘을 빌려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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