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가느다란 금색의 실반지를 낀 손가락이 보석함에 올려졌다. 하얀 공주의 손등에는 고양이가 할퀸 듯한 상처가 나 있었다. 이번 납치 사건으로 생긴 듯했다. 그 상처를 바라보는 나디사의 눈빛이 어두워질 무렵 보석함의 머리가 열렸다.
보석함의 주인은 자수정 귀걸이였다. 섬뜩할 정도의 광채를 뽐내는 자수정에 왕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공주는 귀걸이 한 쌍을 조심스레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어머니의 유품일세. 왕세자께서는 목걸이를, 동생에겐 팔찌를, 나에겐 이 귀걸이를 주셨지. 이것을 유모에게 보여 주면 나의 명으로 왔다는 사실을 믿을 걸세.”
“…어떤 명을 말씀하시는지.”
“자네들에게는 조금 갑작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본론으로 들어가자 시선을 올린 란은 소리가 들리지 않게 피식 웃었다. 공주의 불안한 듯이 떨어지는 눈빛은 건방진 란의 표정과 대비됐다.
“경과 란, 거기에 도울 수 있는 사람 두 명을 더해서 오늘 밤 출발해 주었으면 해.”
“수도의 왕궁으로 말씀입니까?”
공주는 목이 마른 것처럼 자주색의 찻물을 따랐다. 쪼르르 찻물이 따라지는 소리에 나디사의 목도 타는 기분이었다. 안정을 되찾은 지 얼마 안 되어 내쫓기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불안과는 비교될 수도 없이 떨리는 공주의 손은 찻잔을 정상적으로 쥘 수 없을 정도였다.
왕족에겐 끈끈한 가족의 정이 없다지만 어린 나이의 아버지, 형제를 잃고 하나 남은 가족의 생사마저 알 수 없게 됐다. 공주는 본인이 가진 전부를 걸었다. 그 마음을 모르겠다는 게 아니었다. 그 마음을 짊어지고 책임질 인사로 자신을 꼽은 게 문제였지.
“나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없어. 아니, 거의 세 명뿐이라고 해도 좋아. 외삼촌과 록, 그리고 여기 있는 시녀장뿐이야.”
공주의 말에 감격한 것처럼 문가에 얌전히 서 있던 시녀장의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공주는 어머니의 유품을 차마 볼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하지만 외삼촌은 너무 늙으셨고 록은 막중한 책임이 있어. 시녀장은 이런 모험을 할 수 없는 여인이고.”
감흥 없는 표정의 란이 입술을 들썩이기에 나디사는 그의 발을 지그시 눌러 밟았다. 상당히 고통스러운지 란의 눈썹이 점점 구겨졌다.
“알아본 바로 모든 중요한 서류는 왕세자의 침실에 보관돼 있을 거야. 나는 록이 괜히 두 사람을 내게 추천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 지켜본 바로 능력도 출중하고. 그리고….”
밑천을 다 보인 공주는 차라리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그러는 편이 현명하기도 했고.
“나는 힘이 없어. 그러니 도움이 필요해.”
란은 할 말을 한 번 참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함께 왕궁으로 가게 될 텐데요. 그때 찾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저희만 따로 움직이는 건 효율이 떨어지는 듯합니다만.”
“느낌이다.”
“… 느낌이요?”
“우리가 더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찾을 수 없을 거란 느낌.”
“느낌만으로는 출발이 어려울 듯합니다.”
“그자들이 왜 자꾸 나의 성에 들어오려고 하는지, 나는 느낌이 와. 그래서 필사적일 수밖에 없어. 저들이 목숨을 거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테니.”
란은 애초에 보물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았다. 누구도 그게 무언지 모르고, 어디에 써먹는지도 모르는 국가의 보물을 찾는다는 것은 얼마나 허황됐단 말인가. 윗사람의 명령이라면 의심 없이 받드는 나디사와 생각이 한참 다른 것이었다. 그는 이제 막 문을 연 전쟁에 남고 싶었다. 공주의 보물찾기에 놀이에 시간을 낭비했다가 중요한 치료나 전투를 놓칠까 걱정인 터였다.
“저는….”
“알겠습니다.”
란은 벌어지려던 입술을 닫고 옆을 돌아봤다. 결연한 표정의 나디사의 대답에 공주는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철없는 공주와 물색 모르는 라드군이 만나 죄 없는 저를 끌고 가려고 하는구나. 란은 저도 모르게 손톱 끝을 까드득 깨물었다.
차분한 빛의 자수정 귀걸이를 건네는 공주의 손이 불길하기만 하다. 제 심정을 표현하는 그의 시선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그 누구도 실체 없는 것을 가져올 순 없다. 바람, 햇살, 사랑, 충성, 그리고 죽은 왕자 같은 것들을. 체념한 란은 마치 날씨를 확인하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해는 여전히 뜨거웠다. 아프다고 할걸. 오지 않는 편이 나았다.
* * *
나디사가 셔츠와 세면도구 따위의 짐을 챙긴 건 공주의 명을 받고 세 시간 정도가 지나서였다. 차분히 떠나는 시간을 정하려고 했으나 동행하게 된 란은 이런 멍청한 일에 낭비할 시간 따위는 없다며 재촉이 끊이지 않았다.
“아직 멀었어?”
두 사람을 더 데려가라는 공주의 말 때문에 발톱 부대로 온 나디사는 란에게 이를 논의한 것을 후회하는 중이었다.
“어서 아무나 골라.”
그 두 명에 꼭 라드군만 포함할 필요가 없는데도 란은 이따위 일에 신관을 쓸 수 없다며 삐딱하게 나왔다. 나디사는 그게 공주의 명을 덥석 받아서라는 걸 알지만 같은 부류가 되기 싫어 말을 참는 중이었다.
“떠난다고?”
“어디로.”
옆에는 란이 서 있지, 저는 대피하는 것처럼 짐을 챙기지. 잘 준비를 하다가 불려 나온 동료들 앞에 선 나디사는 신중히 말을 골랐다. 말하는 재주가 뛰어나지 않은 터라 일을 망칠까 싶어서다. 동료들은 다른 무엇보다 제 손톱을 내려다보고 있는 건방진 자세의 란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공주의 명이 무언지는 밝힐 수 없지만, 물건을 찾으러 왕궁으로 먼저 떠난다. 보조로 도와줄 사람 둘이 더 필요해. 아까 누구 생각해 둔 사람 있다고 하지 않았나?”
란에게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는 발톱 부대는 그가 마냥 곱지 않았다. 모두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듣고 확인하고자 나디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가 할 말을 가로채 간 란을 슬쩍 노려본 나디사는 목을 가다듬었다.
“우리 중 두 사람을 데려가겠다고? 누구를 생각했는데.”
“…그리사, 그리고.”
그리사는 당연히 저가 불릴 줄 알았다는 듯이 팔짱을 풀었다. 그러려고 그러는 것은 아닌데 다른 사람들도 서서히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당연히 가기 싫어할 줄 알았던 나디사는 조금 난감한 기분이 되어 뒷말을 머뭇거렸다.
“그리고, 생각해 둔 사람은 아직 없어. 다들 바쁠 것도 같고.”
“장난해? 비밀 임무라니 얼마나 멋지고 좋아. 거기다 공주의 명령이라니! 완전히 무슨 모험 같잖아.”
희망적인 의견을 내는 마벤을 보며 나디사는 남몰래 어깨의 긴장을 풀었다. 상사를 대하듯 굳어 있던 자세는 한결 더 자연스러워졌다. 마벤을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같은 여자이고, 이 중에서 마벤만큼 그녀를 편하게 대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내가 갈게.”
마벤을 지목하려고 손을 내민 그때 앉아 있던 아트리스가 일어섰다. 대기하고 있던 란은 그리사와 아트리스의 얼굴을 눈으로 훑은 뒤 턱을 세웠다.
“이 두 사람으로 알고. 나도 짐을 싸고 있을 테니 라드 타고 데리러 와. 알았지?”
란은 이 결정에 아무런 참견을 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말만 흘리고 떠나 버렸다. 아트리스가 참여할 줄 몰라 어색해진 나디사의 손이 떠돌고 있을 차였다. 아트리스는 그녀의 손을 찾아와 가볍게 잡아 주었다.
“네 도움이 되고 싶어.”
“…나는 마벤을 생각했는데.”
“너한테 진 빚도 있고.”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지만 마벤의 표정이 살며시 일그러지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마벤은 포기와 인정이 빨랐다. 방금 전의 표정은 잊으라는 듯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나디사의 등을 떠밀었다.
“그럼 빨리 출발해! 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 잘됐네. 나는 가기도 귀찮았다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떠밀려 나온 나디사는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뺨을 맞았다. 천천히 천막을 걷고 나온 그리사와 그 뒤를 따르는 아트리스는 자연스레 짐을 챙겨 오겠다고 했다. 도리어 제안한 나디사가 엉성하게 서 있고 두 사람이 말을 나누며 다음 일을 준비했다.
“찾아오라는 물건이 무언지 우리한테도 말 못 해 줘요?”
“그게, 가서 설명해 줄게.”
공주의 말로는 왕세자의 침실로 가 보면 된다지만, 과연 왕가의 증표 하나만을 갖고 될 일인가 싶은 터였다. 말없이 저를 믿어 주는 동료들을 괜한 곳으로 데려가는 건 아닐까 싶지만.
공주의 눈물이 그렁한 눈을 보니 거절을 택할 순 없었다. 거절이 가능한 입장도 아니고 말이다. 담배를 태우지 않는 나디사는 바람을 입에 머금었다 뱉으며 속을 달랬다. 아트리스, 그리스와 삼십 분 뒤에 만날 것을 약속하고 노을 속으로 천천히 걸었다. 생각을 정리해 보려던 나디사의 발에 무언가가 걸리기 전까지 걸음은 수월했었다.
과육을 다 발라먹고 버린 사과 뼈다귀 세 개가 있었다. 나무를 타는 짐승이 사과를 훔쳐 먹고 버린 것인가.
하지만 사과 뼈다귀에는 사람의 잇자국이 선명했다. 주변을 둘러보지만 안녕하고 떠나는 해의 흔적만이 가득하다. 가을이 다가와 그런지 노을도 서늘하게만 보인다. 새빨개진 땅에 사과 뼈다귀를 놓고서 나디사는 다시 걸어갔다. 그것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