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이번 출정에선 1조, 2조로 나뉘지 않기로 했다. 공주와 왕실군, 귀족의 사병과 함께 가기로 한 것이었다. 성문을 열어 두었을 때 파르난의 잔당들이 안으로 쓸려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여 공주는 대대적인 수색 명령을 내렸다. 그때부터 신원을 확실히 밝힐 수 있는 자가 아니면 꽤 곤혹을 치르는 모양이었다.
왕실군과 라드군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지만 대개 잡일을 도맡은 쪽에서 말이 나왔다. 누굴 파르난의 사람 취급을 하는 거냐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해 군소리 없이 첩자를 색출하는 데에 동참했다. 그 작업에만 일주일을 썼다. 출발 날짜가 정해진 상황에서 새로 식량과 천막을 구비해 두어야 하고, 사람이 늘어나 라드군의 배치를 다시 짜야만 했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확인하는 날 나디사의 관심은 종일 그 손바닥만 한 양피지에 접붙어 있었다. 자리가 바뀌었다. 맨 앞자리에 자신이 합류된 것이었다.
그녀의 동료들은 맨 뒤도, 앞도 아닌 적당한 위치거나 전과 똑같은 위치를 얻어 낸 참이었다.
나디사는 그에 항의하고자 현 라드군의 수장을 만났으나 딱히 소득이 없었다는 게 결론이었다.
“공주님이 아끼는 사람이니 그에 맞는 대우를 해 주는 걸세.”
공주가 자신을 아낀다는 당치도 않은 오해는 어디서 나온 건지.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나디사는 발이 저린 것처럼 발의 위치를 바꾸었다.
이 중년의 남자는 라넌이 죽고 임시로 수장을 맡은 자였다. 라넌의 밑에서 오래 일한 이인자였고 아랫사람들과 관계 또한 원만하다고 들었다. 복슬복슬 난 금색의 수염 덕에 인상도 좋아 보이고 말이다.
“몸이 좋지 않아 그럽니다.”
“그래? 얼마나 좋지 않은데.”
그건 퍽 신경 쓰이는 일이라는 듯이 수장의 표정이 달라졌다. 턱수염을 관리하던 남자는 실수인 것처럼 빗을 놓쳤다. 상황이 심각해지는 걸 원치 않았던 나디사는 서투르게 말을 꺼냈다.
“많이 나쁘진 않습니다.”
“그래. 그것 참 다행이군.”
소리 나게 손뼉을 친 수장이 일어나 그녀의 앞으로 왔다. 의자가 뒤로 껌뻑 넘어갈 정도로 동작이 큰 이유가 있었다.
“공주께서 따로 찾으셨거든. 아프다고 미룰 수 없는 일이라, 이건.”
입 안에서 맴돈 말을 삼킨 나디사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남자를 찾는 일은 또 미루어졌다. 수장의 말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닌지라 나디사는 밖으로 나와 약속된 장소로 떠났다.
하지만 급할 것은 없지. 나뭇가지에 앉은 새가 몇 마리인지 세고, 발에 채는 돌이 몇 개나 되는지도 세며. 그러나 알아보는 이들이 있어 그리 늦진 못했다.
히아신의 은색 시계를 열어 시간을 보니 10분 정도 늦었다. 작은 종달새처럼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시녀들이 계단에 나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된 시간보다 늦은 그녀를 책망하듯 바라보는 시선에 발걸음은 조금 더 빨라졌다.
지은 지 100년이 되었다던 공주의 성은 풍채가 좋아 보는 사람에게 위압감을 준다. 이곳에 방문할 때마다 작은 개미가 된 기분을 떨칠 수 없던 나디사는 반복되는 소리에 시선이 끌렸다.
탁, 탁, 탁. 고개를 튼 곳에서 소리의 원인을 알아냈다. 지금은 쓰지 않는 빈터를 활용해 왕실군 무리가 검술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그녀가 아는 얼굴도 보였다.
그 남자였다. 이름을 알고 싶었으나 알려 주지 않고 떠난. 시녀들은 무언의 눈빛으로 나디사를 재촉했지만 그녀는 신경을 끈 채로 그들을 지그시 바라봤다.
남자는 무리와 떨어져 나와 칼을 던지고 있었다. 단검이 회전하며 날아가 탁, 탁, 나무에 박힌다. 왜 검과 검끼리 부딪치는 소리보다 저 소리가 선명했는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저 자세.
“저 시간이…….”
“아, 죄송합니다.”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음을 알게 된 나디사는 정중히 고개 숙여 사과했다. 시녀들은 창백한 얼굴로 성문 쪽을 힐끔힐끔 바라봤다. 거기서 괴물이라도 사는 것처럼. 그 때문에 나디사의 생각은 발전하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둔 그 순간 생각은 한 장면만을 새기게 됐다. 남자가 칼을 던지던 자세는 특별할 것이 없었는데도. 미칠 것 같은 기시감이 그녀의 하루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심지어 그 지긋지긋한 생각은 공주를 대면하고 나서도 풀리지 않는다. 좀처럼 집중하고 있지 못하고 있던 나디사는 제 앞에 놓인 향긋한 찻물 냄새를 맡음과 동시에 정신이 들어왔다.
“혹시 차를 싫어하나?”
“아닙니다.”
“우러나길 기다려야지.”
찻물을 머금은 나디사는 공주의 말에 거의 뱉을 뻔했지만 그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 먹어 보는 달콤하고 향긋한 물이 그녀의 혀를 타고 넘어왔다. 먹자마자 기분이 좋아지는 차였으나 지금은 그걸 음미할 시간이 없었다.
“맛있습니다.”
겨우 그런 대답을 할 수 있었던 건 한번 올라온 기침을 참고 나서였다. 덮개로 찻잔을 닫은 공주는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지 평온한 표정으로 문가를 응시했다.
침묵과 어색한 분위기에 쥐약인 나디사는 내려 둔 손으로 허벅지를 쥐어뜯고 있었다.
“한 사람 더 초대했는데.”
“네…….”
그건 공주의 마음이니 상관하지 않겠다만. 나디사는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차를 한 번 더 뿜을 뻔했다.
살이 많이 빠진 란이 들어오고 있었다. 본 지 오래된 얼굴이라 반가운 마음이 들 법도 한데. 그는 나디사의 반갑지 않은 인물 목록에 들어가 있었다. 그건 란 쪽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안색이 아예 빨갛게 뜨고 있었다.
“이쪽으로.”
간신히 예의를 갖춰 걸어온 란이 의자에 풀썩 앉았다. 앉자마자 다리 한쪽을 꼰 그는 맨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왕족 앞에서 예의를 차릴 정도로 그는 정신이 바른 이가 아니었다. 속으로 혀를 찬 나디사는 조용히 찻물만 더 들이켰다.
“두 사람을 이 자리에 부른 건.”
란의 불량한 태도를 가만 지켜보던 공주가 목소리를 낮췄다. 더 내버려 두면 침대로 기어갈 듯한 란은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두 사람이 먼저 왕궁으로 떠나 주었으면 해.”
친목 도모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던 나디사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이 맛있는 차는 오늘 마시기 힘들 것 같았다. 인상을 확 찌푸린 란도 불만스레 상체를 들썩거렸다. 할 말이 많지만 입은 열지 못하는 태도였다.
“잠시만.”
회의에, 결정에, 귀족들 관리에, 공주도 잠이 모자라 보였다. 흰자위에 핏발이 서 있었다.
공주는 잠깐 실례한다는 뜻으로 턱을 까닥거리고 일어났다. 이어서 시녀장이 열어 둔 파우더룸 쪽으로 걸어갔다. 무엇이 준비될지 알 수 없어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 끔찍한 침묵은 무엇으로 끝낼 수 있는가. 안부, 환영 인사, 아니면 욕설.
“잘 지냈나 보지. 얼굴이 폈네.”
아, 시비로 깨는 거였군. 한 수 배운 나디사는 허리를 세우고 앉아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와 정반대의 세상에 사는 것처럼 의자에 구겨져 누운 자세였다.
“자세는 바로 하시죠. 공주님 앞인데.”
“저 공주도 이해할걸. 나를 아주, 미친, 소처럼, 부려 먹고 있거든.”
란은 차를 따라 먹기도 귀찮은지 그녀의 찻잔을 통째로 집었다. 그리고 술을 마시듯 제 입 안에 찻물을 부어 버린다. 못 본 새에 하나 가지고 있던 장점마저 잃어버렸다. 고귀하게 자란 사람만이 가지고 있던 품위 말이다.
“하루에 잠을 1시간도 못 자고 있다고. 환자 치료에, 공주 치료에, 이제는 첩자 색출까지 우리가 하라고 하다니. 저 공주가 양심이 있으면 내가 여기서 잠을 자도 뭐라고 하진 못하지.”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눈 밑에 생긴 그늘이 더 진해진 듯했다. 그의 끝없는 불평불만이 지겨워지려고 할 때였다.
어린 공주가 황금색의 보석함을 들고서 파우더룸을 나섰다. 불평을 일삼던 란도 제 코를 막을 뿐 더는 말하지 않는다. 마지막 양심을 지킨 모양이었다. 나디사는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으나 공주가 그를 막아섰다.
“이걸 찾아 가지고 오느라 조금 늦었어.”
이웃 나라에서 생산되는 붉은 루비가 정중앙에 박힌 보석함은 그들의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게 무언지 묻는 것조차 두려운 나디사를 제치고 란이 물었다.
“이게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