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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72화 (172/210)

172화

화재 사고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동이 트기 전에 끌 수 있었다. 결론적으론 천막 열두 개를 소실하고 범인을 고문해 배후를 알아내는 것으로 마무리가 지어졌다.

나디사는 저가 잡았다는 이유로 범인을 고문 담당에게 데려다주는 임무를 맡았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있는 고문 담당은, 사람들에게 소식을 듣고 하루 안에 자백을 받아 낼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범인은 팔과 몸을 포박하는 때에도 정의의 투사인 양 침묵을 지켰다. 반성이 없는 그는 감옥으로 이송되는 길에서 돌을 맞고, 침을 맞았다. 다짜고짜 들어오는 긴 욕설은 덤이었다. 고문 담당에게 인계해 주어야 하는 나디사는 보다 못해 한마디를 하고 말았다.

“라드까지 다칠 수 있으니 그만 하세요.”

범인을 묶은 줄을 라드의 목에 연결해 뒀기에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러 번의 간곡한 부탁 끝에 돌, 침 뱉기는 멈추었지만 울컥 치미는 욕설까진 어떻게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진 굴욕을 당하고도 결연한 남자의 마지막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까지도.

그를 고문관에게 데려다주기 전에 잠시 둘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고문 담당을 기다리며 포박한 줄의 끈을 잡고 있는데 살 찌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할 말이라도 있나.”

“왜 도와줬지?”

동시에 말했다. 임시 감옥으로 향하는 그는 고문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도 두려움이 없는 눈이었다. 나디사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미간을 찌푸리자 그는 반드시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태도로 다가왔다.

“아까 말이다. 사람들이 나를 비난할 때. 그냥 맞도록 내버려 둘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불을 지르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나디사는 파르난의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꾸 히아신의 모습이 대입돼서 그렇다. 그 남자가 죄를 지어 벌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이런 모습은 아니길 바라기에. 이런 미련한 감정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너를 도운 게 아니야.”

그러나 불신하는 남자의 눈동자를 보며 나디사는 할 말을 잃었다. 그를 도운 셈이 된 그녀는 변명할 수밖에 없었다.

“너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봤었다.”

“…….”

“그리고 죽였어.”

얼굴이 똑같았으니 제 형제나 다름없는 사람이었을 텐데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가 울거나 자신을 욕하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는 마음이 저들에게는 없었다.

그 남자도 그랬을까, 하는 생각은 위험했다.

“저 자입니까?”

때가 지나 나타난 고문 담당이 그를 감옥으로 데려갔으니 그게 마지막이었다. 남자는 끌려가는 순간이 되자 제 발로 걸어 감옥에 들어갔다. 그 안에서도 담담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와 똑같이 생긴 동료, 어쩌면 형제일지가 모른다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에도 차가운 그 남자의 세계. 히아신은 그곳으로 돌아가 행복했을까.

* * *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드는 건 한계가 있었다. 다른 사람의 얼굴을 빌려 썼으니, 그 사람의 동료와 상사가 말을 걸어오는 건 당연하나 히아신은 그들이 누구인지 무얼 하는 사람인지 모른다. 이러다가 들키는 건 시간 문제라서, 다쳤다는 핑계로 빠져나와 나무 위에 올라와 있기 일쑤다.

식량 배급소에서 훔쳐 온 사과 하나를 깨물어 먹으며 히아신은 다리를 뻗었다. 오전 휴식 중인 그의 귀에 반가운 이름이 들려온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 라드군이 범인을 잡았다는군.’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지.’

‘어떤 라드군인데?’

‘왜 공주님을 구한 그 라드군 있잖아.’

사과를 무는 소리에 그녀의 이름이 묻어났다. 히아신은 나디사를 찬양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저 멀리서 걸어오는 오늘의 주인공을 응시했다. 달빛 아래서 봤을 때보다 더 눈이 부시는 아름다움을 간직했다. 이리로 오는 그 걸음걸이조차 백조처럼 우아하고 멋있다. 나뭇잎 밑에 몸을 숨긴 자신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위치로 올라섰다. 조금만 더 낮게 내려오지. 너무 올라가 버리면 부끄러워서 더는 올려다볼 수가 없을 텐데.

라드를 끌고 들어오는 그녀는 주변의 쑥덕거림과 열띤 시선이 불편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모습은 더한 오해를 불러왔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으니까. 그녀의 오만 떨지 않는 모습에서 겸손함을 찾았다.

가장 집착적으로 그녀를 응시하는 시선은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지켜보던 그녀가 시야에서 벗어날 때쯤 히아신은 주머니를 더듬었다. 거기에는 아버지가 주고 간 선물이 있었다.

- 이걸 마시게 한다면 그 아이는 너만을 바라보게 될 거야. 마치 인형처럼.

사랑의 열병을 나타내는 보라색의 물약을 무시하고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걸 손에 넣고, 주머니에 넣은 건 자신의 선택이었다. 히아신은 화풀이하듯 과즙이 흐르는 사과를 씹었다. 주머니에서 손을 뗐지만 그 기이한 열기는 끈질기게 그의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 * *

나디사는 제 부대로 돌아와 어제 만난 남자를 찾으려고 했다. 이름을 듣지 못하고 왔다는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찾자고 하면 못 찾을 것도 없으나 그녀는 지금 새로운 문제에 처해 있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나를 쳐다보는지 알고 있어?”

“지금을 즐겨, 나디사.”

화재 사건 때문에 새벽 출정이 실패로 돌아가고, 1조였던 사람들끼리 모여 새로운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지난밤의 화재 사건으로 비상 회의가 열리고 만 것이었다.

기습을 당한 것도 복구가 안 되고 있는데 이곳을 떠나겠다는 결정이 난 날에 화재 사건이 일어나다니. 이곳에 남아 잔당을 소탕하자는 자와 한시라도 빨리 수도의 왕성으로 돌아가자는 의견이 갈렸나 보다.

공주는 두 진영의 의견을 듣고 결정을 내리는 중이니, 어느 쪽으로 결정이 날 건지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저기.”

마벤과 동료들 옆에 서서 낯선 눈길을 피해 보려 했으나 적극적으로 말을 건네는 이까지 피할 순 없었다. 그는 나디사가 원래 수줍음 많은 성격이라고 생각했는지 손을 내밀었다.

“하나만 묻고 싶어서요.”

“네.”

“경의 라드엔 날개가 하나 더 있다는 게 사실인지.”

적절한 답변이 떠오르지 않아 눈만 굴리고 있는 그녀의 옆구리를 마벤이 콕 찔렀다. 관심 가지고 물어봐 준 사람을 무시할 거냐고 눈짓으로 묻는다. 나디사는 못마땅한 시선으로 마벤 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영광입니다.”

마주한 것 자체가 영광이라며 악수를 나누고 사라진 그는 곧 제 무리로 돌아가 무어라 떠들기 시작했다. 소문은 부풀려지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 부풀려진 소문이 수명을 다해 빵 터지기 시작하면 나디사의 인생은 천국으로도 지옥으로도 갈 수 있었다. 어느 길이든 쉽지는 않다.

지옥은 분명 뜨거울 테고, 천국은 분명 구름처럼 가벼울 테니까. 진짜인 줄 알고 발을 디디고 춤을 추었다간 아래로 떨어지고 마는, 만져지지 않는 구름 위와 같을 거였다.

마벤은 부럽다고 하지만 그녀는 사람들이 선망하는 눈빛에 구워지는 느낌이었다. 실체를 알고선, 제 병든 몸을 보고선 다들 피하고만 말 텐데. 라넌이 준 약으로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을 뿐인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하루빨리 꺼졌으면 싶었다.

“아무래도 떠나는 게 맞겠죠.”

그리사는 팔짱을 끼며 전혀 다른 소리를 했다. 와하하 하며 떠드는 무리들을 한심한 표정으로 훑어본 그는 혀를 쯧 찼다.

“여기 더 있어 봤자 답도 안 나와요. 기습을 대비해 봤자 그것들은 하늘에서 내려온다고요. 수비하기가 더 용이한 왕성으로 가야지.”

여기에 더 묶어 두었다간 불을 지를 것 같은 그리사의 눈빛을 보며 마벤이 놀리듯 말했다.

“그랬다가 여기에 있자는 결론이 나면 어쩌려고 그래.”

“어쨌으면 좋겠는데요.”

“너의 탈영?”

“하.”

마벤은 나디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호쾌하게 웃었다. 아트리스와 동료들이 함께 웃는 것을 본 마벤의 미소가 더 깊어질 무렵이었다. 말을 타고 오는 공주의 전령이 보였다. 그는 손으로 가위표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사는 회심의 미소 지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뜻이 담겼다. 공주의 명령은 변함이 없었다. 이어지는 기습이 불안하다고 느끼는 것이었다.

이곳을 떠난다.

그게 하루아침 만에 얻어 낸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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