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양피지를 베개 밑에 넣어 두었다. 알아차리라는 뜻으로 기침 소리, 발소리를 내며 걷는데 그 인영은 꿈쩍 않는다. 그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지금 밖에 있는 사람.”
책상에 올려진 편지 칼을 들었다. 막판에 뛰듯이 걸어가 천막 밖의 인영을 치려 하는데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웬만하면 도망을 치거나 들어와 공격하지 않나. 그런데 왜 가만히 있지.
마치 그 남자인 것처럼.
“……히아신?”
작은 목소리라서 자신밖에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편지 칼을 등 뒤에 놓고 천막을 잡았다. 인기척이 느껴졌을 텐데도 무반응인 인영을 마주하는 게 두려운 건가. 가슴이 무섭게 뛰었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천막을 드는 그녀의 손에 기대감이 없었을까. 하지만 기대는 달고 현실은 차갑다. 휑한 밖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디사는 편지 칼을 든 손을 툭 떨어트리고서 걸어 나왔다. 천막을 어지러이 흔드는 바람이 초가을에 맞게 차가웠다.
여름이 길고 긴 수비타 왕국은 가을 같지도 않은 가을을 보낸 뒤에 겨울을 준비할 터였다. 실체 없는 바람을 쥐어 보려고 주먹을 쥐었다.
내가 잘못 본 걸까.
들고 온 편지 칼을 주머니에 넣고 머쓱하게 코를 긁었다. 그녀가 예견한 불안은 이 광경을 다른 사람이 보지 않아 다행이라고 돌아설 때 일어났다.
“윽!”
“나디사 마로닌?”
영리한 남자는 나무 위에서 그녀를 덮쳐 왔다. 뛰어 내려와 그녀의 목을 조른 뒤에 챙겨 온 편지 칼을 주머니서 쑥 빼냈다.
“그걸로 찌르게?”
다행이었다. 나디사는 사태가 급박한 그 순간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이 정체 모를 남자는 빌어먹을 만큼 힘이 세지만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그녀는 라드를 다룰 줄 알고, 그 라드는 내일 있을 일정 때문에 천막 뒤편에 두었다는 걸.
“로…… 큭!”
“오, 안 되지.”
끽, 졸린 목에서 피 맛이 났다. 의도를 알아차린 남자가 그녀의 목을 누르며 머리채를 뒤로 잡아당겼다. 하필 그 순간 통증이 재발한 것도 우연이었을까. 라드와 연결된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는 자에게 이건 너무 가혹했다. 마지막 수단으로 바닥에 떨어진 편지 칼을 어떻게든 주워 보려고 했다.
“이런, 귀여운 생각을…….”
귀가 뜨거울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말을 하던 남자의 입이 강제로 다물렸다. 이어서 뜨거운 물이 그녀의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남자는 잠든 것처럼 흐느적거리더니 그녀의 머리를 놓아주고, 목을 놓아주었다. 뒤로 넘어가는 남자를 느끼며 나디사는 날렵하게 어깨를 틀었다.
“이런.”
전쟁에서 다양한 시체를 봤지만 얼굴이 칼에 뚫린 걸 정면으로 본 건 처음이었다. 비위가 강한 편이었으나 이런 건 두 번 볼 게 못 된다.
“이럴 땐 보통 욕을 하던데. 익숙하신가 봐요, 시체가.”
시체에 박힌 건 사슴의 뼈를 자를 때 쓰는 칼이었다. 남자와 거리를 두고서 있던 나디사는 제 어깨를 만져 봤다.
오후쯤 갈아입은 새 셔츠에 핏물이 들었다. 비릿한 냄새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의 얼굴은 밤이 가려 주고 있었다. 그러나 정의감이 투철한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어 줬을 때 나디사는 눈을 비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보통 고맙다는 말도 해 주죠. 나 같은 사람한테.”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그 남자였다. 천막 앞에서 한 번, 그리고 먹이 당번으로 한 번. 얼굴을 이루고 있는 선들은 흐릿하나 그 독특한 인상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남자는 감사 인사를 바란 것이 아닌 듯이 칼을 반쯤 빼내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그 과정이 꽤나 악랄했는데, 이미 시체가 된 자의 눈알이 튀어나오는 장면을 지켜보는 건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아, 실수로.”
“……네.”
그러나 그는 실수라는 말만 할 뿐 계속해서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시체에게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죽은 마당에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 남자의 성격도 히아신만큼이나 좋지 않은 듯했다.
“자주 뵙는 것 같습니다.”
해서 남자의 관심을 끌 것이 필요했다. 자신도 그와 대화를 해 보고 싶었던 참이기도 하고. 이 세상에 히아신과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 또 있다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좋아요, 대화를 하죠.”
칼을 뽑아 든 남자의 뺨으로 시체에서 튀어나온 것들이 날아갔다. 남자는 찜찜하지도 않은지 웃는 얼굴로 그녀를 대했다.
“무슨 대화를 할까요? 정치? 날씨? 어제 먹은 고기가 매우 퍽퍽했다는 거?”
목소리는 비슷한 듯 아닌 듯. 하지만 나디사는 그가 무슨 대화를 원하냐고 물었을 때부터 직감이 왔다. 그녀가 궁금한 건, 묻고 싶은 건 하나였다. 혹시 히아신이라는 남자를 아느냐고. 그와 먼 친척이거나 잃어버린 형제일 가능성을 점쳐 보고 싶었던 거였다. 하지만 히아신은 본인이 최후의 해벗 종족이라고 말했으며, 그의 고향은 다름 아닌 파르난이었다. 애당초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뜻이었다. 나디사는 실수의 연속인 자신의 머리를 헤집으며 고개를 들었다.
“제가 하고 싶은 대화는…….”
남하고 이렇게 어색한 대화를 해 본 게 얼마 만인지. 나디사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도 안 되는 말들을 정리하고 정상적인 길로 가 보려고 했다.
“이름이 뭐죠.”
말로 뱉고 나니 이게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달빛이 들지 않는 그늘 밑에서 피 묻은 칼을 바지에 슥슥 닦던 남자는 당황한 듯이 웃었다.
“제 이름이요?”
“네.”
“제 이름은…….”
남자는 장난스럽게 말을 끌다가 말없이 뒤돌아보았다. 그리곤 재밌는 것을 본 양 감탄사를 질렀다.
“저것 봐요.”
“이름이 없습니까?”
“저기.”
이름을 숨기는 남자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집중력이 흐려졌다. 하지만 남자의 감탄사는 일리가 있었다. 검은 연기가 만든 탄내가 하늘을 덮고 있었다.
“로마!”
대기하고 있던 로마가 자신감 있는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하늘을 배회하는 연기 뒤로 큰불이 보이고 있었다. 붉어지는 불꽃이 달보다 더 밝아지는 그때에. 나디사는 인사하는 것도 잊고서 로마의 등에 올라탔다.
“불이야!”
누군가 자다 깬 목소리로 불이 났다고 알린다. 불이 난 것이 꽤 됐는지 양동이에 물을 들고 달려가는 남자가 보였다. 발톱이 사람 머리에 걸리지 않을 만한 거리로 날고 있던 나디사는 몸을 낮췄다.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어!”
남자의 손에서 양동이만 뺏어 들고 위로 날아갔다. 불이 난 시작점으로 다가갈수록 손등과 뺨이 화끈거렸다.
“세상에…….”
마주한 불의 크기는 로마가 주춤할 정도였다. 천막 열 개가 뼈대도 남기지 않고 타 버렸다.
“물을 더 가져와!”
“젠장! 사람은!”
양동이로 물을 날려 봤자 간에 기별도 안 간다. 새벽 출정인 라드군은 제 라드를 타고서 보탬이 되고자 왔다. 라드가 있으니 물을 적신 천을 덮는다면 도움이 되겠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는지 목소리 큰 누군가가 지시를 내렸다.
“천! 남은 이불 같은 것들!”
“빨래터에!”
알아서 척척 천을 가지러 움직이는 라드군과 근방의 호수로 움직이는 라드군으로 나뉜다. 나디사는 천을 가지러 가는 쪽에 합류하기 위해 왼쪽 손목을 당겼다. 목줄을 잡아 뒤로 이동하려는 찰나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보였다.
날아가며 유심히 그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보는데 머릿속에 반짝 비슷한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의 머리채를 잡은 남자와 쌍둥이라고 해도 믿겠다. 남자는 불을 끄는 사람들 사이로 허겁지겁 달려가고 있었다. 의심만으로 사람을 눕혀도 되는 걸까. 하지만 생각보다 라드의 발이 더 빠르게 내려갔다.
사람이 없는 천막 옆을 지나는 그 순간.
“아악!”
죽은 남자가 그녀에게 해 줬던 것처럼 위에서 습격했다. 발톱으로 내리누르자 남자는 버둥거리며 울부짖었다. 순간 불쌍한 마음이 들었지만 증거는 그의 몸에 남았다. 남자의 얼굴과 어깨에 불길한 파르난의 문양이 생겨난 것이었다.
방화범은 파르난의 사람. 몰려든 주위 사람들은 물을 나르다 말고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파르난!
그럴 줄 알았어!
저 밟아 죽여도 시원찮은 벌레 같은 놈들!
타당한 말들이었다. 성긴 발톱으로 누르고 있는 것도 그녀였으니. 그러니 슬픔을 느끼는 건 어떤 이에겐 배신이었다. 한 남자가 저와 같은 꼴을 당할까 봐 생긴 슬픔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