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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70화 (170/210)

170화

노란 달빛이 땅에 키스하는 밤, 히아신의 자리는 어느 늙은 부엉이의 옆이었다. 말 상대 없이 따분한 밤을 맞이하게 된 히아신은 얼굴에 붙어 있는 가면을 벗어 던졌다.

찌지지직, 하고 떨어져 나간 피부 가면을 쥐고서 불필요한 감정을 정리했다. 고독이나 슬픔은 자신과 맞지 않는다.

돌아온 왕국에 히아신 아스의 자리는 없었다. 히아신이 부리던 라드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 먹이를 주러 가는 척하며 확인한 차였다. 배신자 디디는 그의 최면이 듣지 않았다. 영혼으로 묶인 새 주인이 생긴 것이었다.

전쟁 중이라 바빠 그런지 히아신의 부재를 의아해하는 이가 없었다. 그의 얼굴을 아는 발톱의 사람들도 원래부터 없는 사람 대하듯 하는 모양이다. 공을 세운 나디사는 동료고 귀족이고 할 것 없이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다. 그의 빈자리가 느껴질 리 없었다.

히아신이 없어지고, 오로지 그만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가 없는 세상을 그만이 안쓰러워하고 아파하고 있었다. 자신의 맨 얼굴로는 설 자리가 없어 죽은 사람의 얼굴을 빌려 쓰면서 말이다.

이전에 느껴 본 적 있는 감정이 그의 눈알을 찔렀다. 외면당하는 외로움. 상대는 모르는 아픔. 이런 감정을 다룰 자신이 없는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슴을 식혔다.

바라보는 방향은 나디사의 천막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을 들락날락거리는 수많은 사람 중에 그놈도 있었다. 아트리스 메놈. 그녀와 사이가 좋은지 눈만 마주치면 다가와 다정한 담소를 나눈다. 눌러놓은 외로움이 도약하는 건 바로 그런 순간들이었다.

“나는 안 보고 싶어?”

그래서 그는 변변치 못한 남자처럼 그녀의 초상화에 대고 말을 건다.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이라는 힌트를 줘 봤지만 둔한 나디사는 거리를 두는 눈빛만을 보내왔다. 그가 바란 혹시,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나를 잊었구나.

그 짧은 새에.

그녀의 삶엔 그가 없는 것이 나아 보였다. 그녀는 저 아래 세상에서 사탕과 따듯한 저녁이 있는 하루를 보내고 있을 거였다.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을 것들을. 그녀의 허락 없이는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것들을.

그것이 슬펐다. 그가 그녀의 앞에 맨 얼굴로 나타나지 못하는 건 수치심 때문이었다. 짜잔, 하고 등장했는데 나디사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면 어떡하지. 안으며 반겨 주기는커녕 다른 사람들 옆으로 뛰어간다면. 제 동료들을 죽인 파르난과 같은 사람이라고 비난한다면.

근사한 옷을 입고서 그녀의 저녁 식사에 초대되기를 원했을 뿐이었다. 저곳도 아니라면, 대체 그가 서 있을 곳은 어디란 말인가.

파르난에서는 나를 배신자라 하고, 그녀도 나를 살인자라고 한다면. 나는 어디에.

하루 종일 남의 얼굴을 덮고 있던 히아신은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말렸다. 그러나 그의 휴식을 방해하는 발소리가 오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채로 걸어온 그 그림자는 나디사의 천막 앞을 서성였다.

히아신은 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예정된 약속이었는지 얼마 안 가 나디사도 천막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세수를 마쳐 물기가 맺힌 그녀의 얼굴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심장을 뛰게 했다.

언제 우는 얼굴을 했는지 간사하기도 하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미소가 차오르는 스스로가 한심해 죽겠지만 그는 사랑이란 운명을 피할 길이 없었다.

“나디사는 밤에도 아름답네.”

사내의 마음을 모르는 그녀는 이와 같은 밤 인사에 얼굴이 찌푸려졌을 거다.

‘마음을 정했다면 이것을 받게.’

망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디사를 찾아온 건 소매와 윗옷이 반듯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었다. 미소를 거뒀다.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다.

‘정말 할 생각인가.’

‘네.’

‘공주님이 알고 있는 것과 왕세자의 명으로 일한 사람들에게서 물어 알아낸 것이네. 거기에 자네의 역할도 적혀 있어. 그다음 왕궁에서 모여 제대로 원정대를 꾸릴 생각이네.’

‘알겠습니다.’

‘이걸 찾고 있다는 것도 비밀로 해야 할 걸세. 마지막으로 묻지.’

‘…….’

‘그래도 할 텐가?’

시녀장일 게 틀림없는 여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오전에 나디사가 왕실의 부름을 받고 사라진 적이 있었다. 경비가 삼엄해 쫓아 들어갈 생각은 잠시 접어 뒀었다.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낀 그는 느리게 침을 삼켰다. 나디사는 저 제안을 거절해야 한다. 그의 감은 대체로 맞았고.

‘네, 그러겠습니다.’

나디사는 실망스럽게도 시녀장이 건네는 양피지 뭉치를 받아 들었다.

임무를 마친 시녀장은 주위에 듣는 이가 없는지 확인하듯 여러 번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조심조심 걸어갔다. 나디사 또한 천막 뒤를 살피는 등 주의를 기울였다.

불안한 히아신은 발끝을 떠는 것도 모자라 입술을 손톱으로 누르고 있었다. 나디사가 그 일과는 연관이 없기를 바란다.

그가 알기론 그의 아버지는 그 보물을 찾는 데에 목숨을 걸었다. 어느 날 어쩐 일인지 수비타 왕국에서도 같은 보물을 찾는다는 소식에 히아신과 여러 첩자를 보내온 것이었다.

아버지가 집착하고 있는 물건. 그게 무언지도 모르는 어린 공주가 찾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건 평범한 관심은 아닐 거다. 아버지가 심어 둔 관심일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드는 합리적인 의심. 나에게 이걸 보게 하는 이유가 무얼까.

- 히아신.

하여간 눈치 빠른 불청객이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지만 히아신은 두 귀를 막았다.

- 저 아이의 천막에 지금 당장 불을 지를 수도 있어.

저가 어떤 말에 웃고 우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히아신은 죄 없는 달을 노려보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억울해 죽지 싶다.

“걱정하지 마요, 아버지. 저 여자를 죽인다면 나도 아버지의 계획을 망치고 같이 죽어 줄 테니까.”

- 이건 어떨까.

사람을 꿰고 낚는 데엔 따라올 자가 없는 아버지의 말이었다.

- 저 아이가 너를 사랑하도록 만들어 준다면.

* * *

설치된 천막이 넉넉지 않은 건 당연한 터라 둘 혹은 셋이서 한 천막을 나누어 썼다. 사정이 이런지라 나디사의 천막에도 한 명이 더 있었다. 저린 팔 때문에 치료소에 다녀온다고 한 뒤부터 소식이 없지만. 어쩌면 시녀장이 손을 쓴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공주가 보낸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게 시녀장일 줄이야. 그 어린 공주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만.

나디사는 내일 새벽 출발 일정을 잊고서 촛대에 불을 켰다. 환하게 퍼지는 불빛 아래에 양피지를 펼쳤다.

의욕이 넘치는 공주가 단시간 동안 알아낸 내용을 적어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알아냈다고 해 봤자 공주에게 보고하는 형식이었을 테고 그렇다는 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그들도 진술했듯이 자세한 내용이 적힌 문서는 왕세자가 보관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양피지에 있는 내용 중 유의미한 것은 보물이 있다고 추정되는 장소 정도였다.

국경과 맞닿아 있는 한 눈 덮인 산맥에 지금은 무너져 쓰지 않는 신전이 있었다. 무슨 신을 모신 신전인지는 알 수 없으나 보물의 행적을 적어 둔 문서가 거기서 끊겼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추정일뿐. 사라져 버린 왕국의 보물에 대한 소문은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었다. 일개 왕국의 백성인 그녀도 다른 사람들과 생각 자체는 똑같았다. 왕세자가 사람들의 신임을 잃은 것에는 보물을 찾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다른 업무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었다.

공주도 죽은 제 동생을 찾고자 허황된 보물에 눈이 먼다면. 나라 안팎으로 혼란한 때에 중요 인력을 빼돌려 보물을 찾게 한 걸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양피지를 돌돌 만 나디사가 내뱉은 한숨에 촛불이 꺼질 듯이 흔들렸다. 손에 든 양피지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은연중에 욕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게 아무런 쓸모가 없더라도. 왕관을 쓸 예정인 공주의 약속은 쓸모가 있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준다는 말.

갓 따온 사과처럼 매혹적인 말을 들은 나디사는 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만약…… 언젠가 히아신이 돌아오는 날에.

“누구냐.”

천막 밖에 서 있는 그림자는 말이 없었다. 체격이나 키가 남자였다. 볼일이 있다면 자신이 왔음을 알릴 텐데.

상처로 가득한 그녀의 손이 말고삐를 잡듯 양피지를 세게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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