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코제나 공주의 태도는 흠잡을 데 없이 왕족다우나 나디사의 눈엔 불안정한 소녀같이 보일 때도 있었다. 허약한 체력을 지닌 몸이었고, 태어나면서부터 공주의 영토 밖으로 나간 적 없는 정신은 말할 것도 없이 연약했다.
나디사의 기준에는 한참 못 미치게 연약한 사람의 말이지만 코제나 공주는 제가 본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도 제 말을 믿어 주리라고 생각지 않았는지 팔을 걷어붙였다. 흰색 레이스 뒤에 숨겨져 있는 팔목을 뒤집어 보여 주었다.
“그자들이 나를 고문했다.”
죄를 고백하는 듯한 공주의 눈이 붉어졌다. 나디사는 침착하려고 했으나 공주의 손목에 난 상흔은 일개 병사가 봐도 기함을 할 것이었다. 제 손으로 손목을 그은 듯한 자해의 상흔. 공주는 보일 만큼 보였다고 판단했는지 슬쩍 부드러운 레이스로 손목을 덮었다.
“신체적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이건 내가 낸 것이야. 한계까지 몰아붙였지만 나에게 알아낼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금방 포기하더군. 그리고 버렸다.”
자신은 버려진 그녀를 구한 것일 테고. 그날의 기억이 생생한 듯이 눈가를 떤 공주는 거칠어진 호흡을 조절했다.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손이 이불을 쥐어짰다. 두려움을 이겨 내려고 애쓰는 공주의 말은 그래서 더욱 가치가 있었다.
“그들이 계속해서 찾는 것이 있었어. 왕세자께서도 그걸 미리 알고 찾고 있던 것일까 싶긴 하지만.”
못 알아듣는 표정을 짓자 공주는 중얼거리던 것을 멈추고 저를 바라봤다. 연약한 공주가 아닌 듯이 강단이 있는 자세와 표정이었다.
“수비타 왕국의 보물을 말하는 것이다, 경. 그게 뭔지는 모른다만.”
자세를 고쳐 앉은 공주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그걸 찾아볼 생각이야. 그러다 보면 동생을 데려간 파르난의 이들과 마주칠 수 있겠지.”
차분히 손을 모은 공주는 미친 사람이라고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제정신인 듯 보였다.
“경과 믿을 수 있는 몇 사람을 추려서 원정대를 꾸릴까 한다.”
“그 보물을 찾아오란 말씀이십니까.”
“전쟁 중이니 동생이 살아 있다는 것과 방금 내가 말한 내용들은 함구해야겠지.”
그거야 당연히 비밀로 해야지. 떠들고 다닐 성격도 아니고 말을 들어 줄 사람도 없었다. 공주는 두통이 오는 것처럼 손바닥으로 머리를 감쌌다.
“목숨을 걸어야 하니 경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걸 알아. 하지만 들어준다면.”
“…….”
“나도 경이 원하는 것 하나를 들어주겠다.”
일국의 공주가 하는 약속의 무게를 모르지 않는다만. 새삼스레 나디사는 그녀의 나이가 다시 보였다. 동생이 살아 있다고 믿는 어린 공주의 간절함을 허사로 만들면 어쩌나. 마음은 아니라고 말하는데 입이 그 말을 뱉는 걸 거부하는 듯했다. 공주도 그녀의 혼란함을 다 아는 듯이 손을 저었다.
“지금 답하지 않아도 좋아. 몇 사람에게도 말을 해 두었다. 단칼에 거절한 이도 있고. 경처럼 망설이는 사람도 있었지. 그렇지만 답은 조금 미뤄 두어.”
“그럼 언제쯤 답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자정에 사람을 보낼 거야. 그 사람에게 답을 해 주면 된다. 믿을 만한 사람이니 안심해도 좋고.”
거기까지가 공주가 준비한 말이었나 보다. 볼 일을 마치고 잠잠해진 공주는 폭신한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떠나라는 뜻임을 안 나디사는 보는 이가 없음에도 고개를 까닥였다.
뛰는 듯한 걸음걸이로 뒤돌아 나가자 그녀가 올 것을 안 것처럼 문이 열렸다. 나디사는 문 밖으로 나오는 그 짧은 새에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쾅, 발뒤꿈치가 턱을 넘자 문이 닫혔다. 나디사는 불타 버린 항구에 덩그러니 남은 배처럼 복도를 지키고 섰다. 아낌없이 퍼부어지는 햇살이 좋았다.
영악하기도 하지.
수많은 가닥의 말들. 하지만 나디사의 마음에 꽂힌 말은 한 가지로 추려졌다.
경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하나 들어주겠다. 구체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언지도 모르면서 그런 말은 놓치지 않는다.
살아남은 지 얼마나 됐다고. 나디사는 웃는 얼굴로 그 복도를 걸었다.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도 더 따스하게 느껴졌다.
* * *
“나디사.”
“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니지, 잔 거야?”
나디사는 햇살을 가리고 싶어 빌려온 책을 얼굴에 덮고 있었다. 마벤이 온 줄 알았다면 일찌감치 치워 두었을 텐데.
“따듯해서. 그런데 왜 왔어?”
“너는 몇 조니. 그거 물어보려고.”
꾸려 둔 짐 더미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나디사는 느릿느릿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 안에서 잡힌 양피지 조각을 끌어내 마벤의 눈앞에서 펼쳤다.
“음, 1조.”
“나도야! 발톱은 전부 1조인가 보네.”
“잘 됐다.”
“우리 다 같이 날아 보는 게 얼마 만이람.”
입을 가리며 하품한 나디사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그 꼴을 본 마벤은 충분히 쉬라고 한 뒤에 서둘러 떠나갔다. 새벽에 출발하는 일정인 1조는 공주가 머물게 될 왕궁을 순찰하고 짐을 나르는 임무를 맡았다.
뒤따라오는 2조는 공주와 귀족의 호위를 맡는 일정이었고. 수비와 공격, 두 가지가 다 뛰어난 라드군을 한꺼번에 옮기지 말고 둘로 쪼개 나누자는 취지였다.
공주와 독대 이후 진이 다 빠진 나디사는 피곤이 가시지 않아 마른 손으로 세수를 했다. 천막 앞에 쌓아 둔 짐들 위에서 졸기나 했다니. 누가 볼까 봐 후다닥 일어난 나디사는 마침 이쪽으로 다가오는 라드군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나디사 경.”
“네.”
“1조 아니십니까?”
“맞습니다.”
“미리 라드를 천막 앞에 두십쇼. 나중에 다 같이 빼낼 때 빼려고 하면 복잡할 겁니다.”
“아…… 예.”
저보다 높은 몸통에 있는 라드군인데도 친절하게 다가와 높임말을 써줬다. 경, 이라는 호칭도 붙여서.
돌려줄 수 없는 타인의 배려는 성가시고 민망했다. 나디사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라드를 묶어 둔 뒤편에 달려갔다. 식사 시간이라서 라드와 당번밖에 없을 것이 뻔하지만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면 이곳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디디는 어쩌지. 주인 없는 라드가 그녀를 따라온다면 말들이 많을 것이다.
디디를 날려 보낸다고 해도 잘 찾아올지 미지수였고. 뒤에서 몰래 따라오라고 하려니 그조차 가슴이 아프고. 답을 찾지 못해 갑갑한 목 단추를 풀면서 걸어가던 나디사는 라드 앞에서 서서히 멈추어 섰다.
그 순간에 남자도 그녀를 보았다. 그 남자였다. 히아신과 인상이 비슷한 남자. 하필 그가 식사 당번이었는지 디디와 로마에게 고기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껴 고개를 돌린 남자는 단숨에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바뀌었다.
“안녕하세요.”
“네.”
사교성이 없는 나디사는 다음에 다시 오려고 했다. 하지만 발길을 돌리려는 걸 아는지 남자는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키우는 라드가 두 마리인 경우도 있나요?”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질문에 나디사는 가던 걸음을 돌렸다.
“둘이 친해서…….”
조잡한 변명이었다. 조만간 들키는 건 시간 문제려니 했는데 남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친해서.”
비꼰다는 듯한 느낌도 들지만 처음 보는 사이에 그럴 이유가 뭐란 말인가. 끝난 대화의 여운을 곱씹던 나디사는 이상하게 그의 뒤통수가 얄미워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한데 라드군이 아닌 사람이 당번이 되기도 합니까?”
“아니죠.”
그런 경우도 있다. 사람이 부족해서 내가 한다. 이건 예상한 답변이 아니었다. 뻔뻔한 미소를 장착한 남자는 남은 고기를 털어 빈 양동이를 만들었다. 속이 빈 양동이를 덜렁 든 남자가 뒤돌았다.
“얘들 편애하는 거예요, 제가. 더 먹으라고.”
“……제 라드들에게요?”
“네.”
“왜죠.”
“얘들이 제일 예쁘게 생겨서요.”
생김새만 비슷한 느낌인 줄 알았더니 하는 말까지도 어쩜 히아신 같은지. 의심스러운 마음이 안 들 수가 없으나 정말 히아신이라면 왜 정체를 숨길까. 그 오만한 남자가.
눈짓으로 작별 인사를 한 남자는 그녀의 옆을 스쳐 갔다. 빈 양동이를 들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디사는 문득 울고 싶어졌다.
히아신의 미소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