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눈으로 보는 장면이 다가 아니었다. 히아신은 그녀를 이해하고, 상황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무너졌다. 그녀의 마음, 그러니까 자신이 없는 동안 그 자리를 다른 남자로 채울 수밖에 없던 외로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지만 그의 이해는 손쉽게 실망감과 좌절로 변질됐다. 자신이 가진 애정으로 막아 보려고 해도 깎아 둔 사과의 색이 누래지는 것처럼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나고 식은땀이 나는 것을 그가 막을 수 있을까.
그는 일시적으로 청력을 잃었다. 포옹을 끝내고 다정히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표정이 어떤지, 목소리와 대화 내용은 무언지, 그것참 안타깝지만 듣고 보지 못했다.
그가 느낄 수 있는 건 뚜렷한 배신감과 의아함 뿐이었다. 배신감이라는 건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는 당연한 감정이지만 히아신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숭배했다. 오고 가는 사랑이 아니라 주기만 하는 사랑이어도 괜찮을 만큼, 그녀에게 버림받지만 않는다면, 그리해서 그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면 괜찮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질투라니, 배신감이라니.
그 배신감과 질투가 그의 정신을 갖고 노는 정도라서 잠자고 있던 의문이 끌려 나온 것이었다. 제 상태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없는 히아신은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다정하게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이 그의 눈물을 불렀다. 저가 이렇게 눈물을 쉽게 허락하는 사람인 줄 몰라 뺨이 눌리도록 손으로 막고 있었다.
나쁜 여자야. 나를 보내고도 살 하나 빠지지 않았어. 그리고 여전히 숨이 막히게 아름다워. 내가 받은 고문을 말해 줘도, 내가 며칠 동안 식사 같지 않은 식사를 했다는 걸 말해 줘도 저 여자는 아무렇지 않을 거야.
창작하는 것도 아닌데 유치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끝없이 탄생하고 있었다. 부끄러워진 그가 달려가 죽이고 있는데도 그 수가 늘어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 머릿속은 난장판이었다.
이런 얼굴로는 싫었다.
잘생긴 동료와 정답게 걸어가는 그녀의 앞에 나타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바란 재회의 장면은 이런 게 아니었다.
조금 더…….
- 평생 가도 그런 날은 오지 않아.
나쁜 말인 걸 직감한 그는 귀를 막았다. 그의 질투가 배신감이라는 갑옷까지 입게 된 건 틈틈이 등장하는 아버지 때문도 있었다. 우려대로 아버지는 말 안 듣는 아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 너는 파르난의 사람이니까. 저 아이의 소중한 것들을 무참히 짓밟을.
아니. 나디사에게 돌아가 그녀의 삶을 지켜 줄 것이었다. 그 작은 샤포드의 집도, 그녀의 못난 동료들도. 마음씨 따듯한 그녀는 그의 노고를 반드시 알아줄 것이었다.
- 널 그리워하지 않는 것 같은데. 사실 너라는 재앙만 없으면 아무런 고민이 없을 사람이지.
그러나 그녀는 그의 손을 따듯하게 잡아 주고, 뺨에 난 상처에 약을 발라 주고, 그리고…….
발악하듯 머릿속에서 소리치고 있던 히아신의 목소리는 갈수록 기어가고 있었다. 그의 믿음은 배신감과 질투로 얄팍해져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퍼붓는 말들은 독처럼 치명적이었다.
히아신은 팔과 다리를 늘어뜨린 채 나무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의 아버지 말이 틀린 것 없지 않냐는 생각이 드는 머리를 손으로 잡으며. 바람에 맡겨 흔들리는 두 다리가 그의 심정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녀의 따스한 미소 속으로 들어갈 것을 기대하고 달려온 그는 둘도 없이 외롭게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얌전히 누워 있던 디디가 달빛에 만들어진 그의 그림자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 떠 있는 그의 시선과 마주치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안녕.”
그러나 디디는 그를 처음 보는 것처럼 으르르 목소리를 깔 뿐이었다. 아무리 최면 상태였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복종하던 기운이 남아 있어서 저렇게 적대적이지는 않을 텐데.
설마.
진정한 주인이 생긴 건가.
- 너를 기다리는 건 아무것도 없구나.
그의 마음을 떠서 생각으로 옮겨 둔 것처럼 말하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히아신은 떼 쓰는 아이처럼 제 귀를 틀어막았다. 이 말에 넘어가면 그녀가 진정 혐오하고 미워하는 파르난의 사람이 되는 거였다. 아버지의 말이 옳지 않냐고 되묻는 마음은 주인인 히아신을 설득하고 있었다.
서글펐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희망이 희망이었을 때가 더 삶이 빛났었다. 그 희망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발견했을 때 사람의 마음은 구원도 원하지 않는 저 아래로 떠나간다.
“거기! 누구냐.”
밝은 횃불 하나가 그의 발밑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순찰을 나온 사람이 디디의 수상스러운 반응을 살피다가 나무 위에 걸쳐진 그의 발을 발견했나 보다. 히아신은 싸우고픈 마음이 없어 다리를 올려 봤지만 이 남자는 포기를 모르는 청춘이었다.
“누구야! 사람을 불러오겠어!”
겁을 먹은 듯이 목소리를 키우는 남자는 젊은 청년이었다. 비틀거리듯이 일어난 히아신은 두 팔을 벌리고 땅으로 뛰어내렸다. 사뿐하게 착지한 그가 고개를 드는 찰나 젊은 청년은 날카로운 창끝을 그에게 들이댔다.
“진정해. 난 라드군이야. 잠깐 달빛을 보고 있었어.”
힘이 빠져 연기력이 부족했던 걸까. 히아신이 항복한 듯 두 손을 들고 있음에도 젊은 청년은 창을 내려놓지 않았다.
“진짜야. 동료들을 불러 주면….”
“그건 파, 파르난의 문양이잖아. 이 멍청이 누구를, 속이려고!”
그 말에 히아신은 고개를 떨궈 자신의 꼴을 봤다.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픽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디사를 본다고 새 옷을 얻어 갈아입은 것이었다. 가슴팍이 열어젖혀 있는 탓에 그의 문양이 환하게 보이고 있으니.
하면 남자의 기억을 지우고 최면을 걸어야 하는데 히아신은 의욕이 나질 않았다. 전쟁을 치르고 나서 겁이 많아진 청년이 놀라든 말든 그는 미친 사람처럼 킥킥거리며 웃었다.
나디사가 다른 남자랑 포옹하고 있었던 게 무슨 큰일이라고 이렇게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거지.
나디사 생각에 웃음이 멈춘 히아신이 불길했는지 젊은 청년은 조용히 창을 들고 거리를 좁혀 왔다. 이 기회에 파르난의 첩자를 잡은 공을 세울 생각에 흥분한 남자가 추진을 위해서 창을 뒤로 뺀 그 순간이었다.
“아악!”
퍼뜩 정신이 든 히아신은 앞을 바라봤다. 어둠의 그림자가 나타나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힘이었다. 창을 떨어트린 청년이 발로 마구 흙을 짓이기며 살아나고자 했으나 저 힘은 히아신조차 막을 수 없었다.
“거기 누구냐!”
밝은 횃불들이 그의 신음을 듣고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일이 복잡하게 됐다. 혀를 찬 히아신은 목 졸려 죽은 남자의 시신을 안아 들었다. 나무 위로 그가 올라간 그 찰나에 횃불들이 들이닥쳤다. 유일한 목격자인 라드들은 말을 할 수 없으니 그를 지목할 순 없을 거다.
달밤에 시신을 안고 나무 위를 달리며 히아신은 웃었다. 알겠다. 아버지의 의도가 무언지.
그의 현실이, 위치가 어디인지 확실히 알려 주려는 것. 파르난의 문양이 피에 새겨진 그는 절대로 저쪽의 세상과 동화될 수 없다는 것.
그것을 알려 주고 나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는 뻔했다.
파르난인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은 망치려고. 그래서 그 망쳐진 세상에서, 파르난이 주인인 세상에서 그녀를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의도를 다 알아내자 그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던 유혹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차가운 달과 시신, 그리고 그만이 한 나무에 멈추어 섰다. 파르난의 밖으로 나와도 그는 혼자였다. 그녀의 곁에는 경쾌하고 햇살 같은 사람이 맞았다. 히아신은 시신을 나무에 앉혀 두고 갑갑해 보이는 그의 웃옷 단추를 풀었다.
“미안해.”
그 사과는 진심이었으나 들리지 않을 거다. 그의 마음이 진심이어도 이 달밤은 들어 주지 않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