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동료에 대한 믿음을 배신으로, 선의를 악의로 갚았음을 고백하는 아트리스의 얼굴이 선하기만 하다는 건 불공평했다. 나디사는 아트리스가 하는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대부분의 말은 그녀의 마음에 닿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그토록 알고 싶었던 진실에 한 발자국 다가섰는데도 그녀의 눈에 박히는 건 아트리스의 떨리는 손과 목소리였다.
“그래서, 언젠가 네가 방해된다면…….”
“저기.”
신관 중 하나가 그녀의 친부라는 것도, 친모의 죽음도 관련이 있는 자가 첫 번째 신관인 랍이라는 것도, 그녀가 주제넘게 신관의 자식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죽일 거라는 것도. 하나같이 버거운 사실들이지만 그보다 더 버거운 건 아트리스의 숙인 고개였다.
그녀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저도 모르는 피해를 받았다. 하지만 가해한 자가 있다면 그건 아트리스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서 사죄해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니란 말이다. 동조했다는 죄로, 일조했다는 죄로 그녀가 알던 사람을 무릎 꿇리고 싶어서 이곳으로 왔는가.
그녀는 단순히 말해서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사실인지 확인했으니 아트리스의 역할은 끝났다.
“아트리스, 정말 내게 미안해?”
“……그래.”
한 대 맞을 각오를 한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알고픈 진실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아트리스는 그들의 손과 발로 쓰인 탓에 친모인 티사 레나이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숨겨진 이야기의 윤곽이 잡힌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누구를 쳐야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지는 명확해졌다.
아비가 신관. 저에게 잘해 주지 못해 안달인 록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지만 나디사는 고개를 저어 그 잔상을 지워 냈다. 함부로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었다가 만일 그게 아니라면. 혼자서 만든 짐작과 상상은 위험했다. 그게 자신을 어떻게 바꿀지 모르니까.
게다가 나디사는 알게 된 진실들이 자신을 바꾸기를 원하지 않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진실의 뒤를 쫓지만 그 진실이 자신에게 영향 주지 않기를 바라다니.
샤포드에 있는 한 정다운 부부의 딸로 살고픈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자신의 생에 물음표를 단 의문만을 해소하고 나면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갈 거였다.
“그럼 내 앞으로 가까이 와, 아트리스.”
아트리스는 그녀의 말을 거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조종당하듯이 서투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해가 떨어지고 나타난 달빛이 그의 뒤에 있으나 햇볕만큼 잘 어울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잘 몰랐던 거 같다. 그의 눈동자는 금색보다 밝은 갈색 눈동자였다. 그게 금색이 아니어서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걸 그는 모르겠지.
“아트리스.”
그녀와 근접한 앞자리에 다시 앉은 아트리스는 마음 졸이는 얼굴을 했다. 어떤 남자와 다르게 가까이 앉으라고 해도 최대한 멀찍이 떨어지는 것이 참 그답다 싶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데.”
“……나디사, 네가 괜찮다면.”
“응.”
“계속 네 동료로 있고 싶어.”
그녀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제 감정을 되짚어 봤다. 하지만 백 번을 생각해도 자신은 아트리스의 삶을 동정했다. 신전의 입김에 낀 이들이 물어뜯고 싸우는 건 바라지 않는다.
아트리스가 택한 자리가 그녀의 동료라면 기꺼이 박수를 보낼 수 있었다. 지금의 그녀는 사람을 미워하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사랑하던 사람도 떠나고, 미워하던 사람도 떠나고. 하면 곁에 있어 주겠다고 하는 사람을 좋아해 보고 싶었다.
아트리스는 그녀의 침묵이 거절인 줄 알았는지 눈을 마주치곤 쓸쓸하게 웃었다.
“그게 용납이 안 된다면……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그저 아트리스 메놈으로 떠날 수 있게 해 줘.”
“나를 감시하려고 숨어든 사람이 아니라?”
“그래. 그것도 어려울까.”
“아트리스.”
“응.”
“욕심이 많네.”
정곡을 찔린 아트리스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미소도 짓지 못하는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표정 없는 얼굴의 나디사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나도 고백 하나 할까, 아트리스.”
“……고백?”
“히아신은 파르난의 사람이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감싸 줬어. 고발하지도 않았고, 그 남자랑 같이 밤도 보냈지.”
담백한 그녀의 고백은 아트리스의 눈빛이 타오르는 걸 거들었다. 숨겨 둔 비밀을 탈탈 털어 낸 나디사는 힘없이 시선을 떨궜다.
“그런데 지금도 나는 그 남자가 보고 싶어.”
“…….”
“이런 나도 동료로 받아 줄래, 아트리스?”
아트리스의 그늘이 자신을 깔아뭉갤 듯이 덮쳤지만 나디사는 그걸 거부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포옹을 시도한 아트리스가 그녀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제 어깨로 끌어당겼다.
그의 몸에 밴 비누 향은 작은 성에 사는 발톱이던 시절 많이 맡았었다. 그때의 히아신이, 아트리스가 그리웠다.
의문점이 많을 텐데도 아트리스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안아 주었다. 두 마리의 라드가 사람을 가리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달빛은 아트리스보다 그 남자가 잘 어울렸다. 그 생각이 나는 걸 보면 자신은 한참 덜떨어진 게 아닐까.
그래서 멍청한 자신을 탓하고 말지, 어리석은 남은 비난하고 싶지 않은 밤이었다.
* * *
나무 뒤에 숨어서 하얀 천으로 덧난 상처 부위를 감싼 히아신은 밝디밝은 콧노래를 불렀다. 몇 분 뒤면 꿈에 그리던 그녀를 보게 될 거였다. 히아신은 횃불을 들고 다니는 경비병 두 명이 지난 후 천천히 나무에 올랐다.
걸으며 감시를 하는 거지 나무 위까지는 감시하지 않으니까. 떠오른 달처럼 환하게 웃은 히아신은 사람이 없는 순간만을 노려 나무에서 나무로 뛰어갔다.
나뭇가지에 구름이 걸쳐 있으니 하늘을 밟고 다니는 듯한 기분이었다. 설마 아버지가 자신을 불쌍히 여겨 풀어 준 것일까. 그런 생각도 감히 할 만큼 가벼운 기분과 발이었다.
갑자기 자신이 사라져서 나디사는 죽도록 슬프고 외로웠을 거다. 같이 있고 싶다는 말을 증명하기 위해 역경과 수모를 견디고 돌아왔다는 걸 안다면 어떨까.
히아신은 저가 한번 최면을 건 상대는 어디에 숨어 있든 찾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최면을 걸었던 디디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다시 최면을 걸어서 자신의 라드로 만들어야 되니까.
그런데 찾아보니 자신의 디디가 왕실군 내부에 있는 것 아닌가. 그 착한 나디사 마로닌이 디디까지 잊지 않고 챙겨 준 모양이었다.
“곧 갈게, 내 사랑.”
디디의 근처로 온 것을 느낀 히아신은 나뭇가지에 발을 걸치고 서서 그녀의 초상화를 바라봤다. 뚱한 눈빛을 한 소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고개를 들었다. 콧노래가 끊기지 않게 유념하며 히아신은 다음 나뭇가지로 천천히 떨어졌다.
탁, 마지막 나뭇가지에 도착한 히아신은 태양을 피하는 것처럼 손으로 달빛을 가렸다. 날이 나빴다. 따듯한 햇살 아래서 나디사를 보기를 원했는데. 그 여자의 새초롬한 눈매와 입술은 뜨거운 태양이 더 잘 보여 주는데.
하룻밤 더 기다렸다가 내일 볼까. 그런데 나디사의 향을 맡은 지 오래된 심장은 그걸 허락하지 않는 듯이 불쾌하게 뛰었다. 진정하라는 뜻으로 제 가슴을 두드린 히아신은 웃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디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재수 없는 금발과 사랑스러운 눈매와 입술을 가진 여자가 있었다.
그가 혹시 못 볼까 봐 자세하게도 비춰 주는 달빛은 그의 시선만큼이나 차가웠다.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힘이 빠져 간신히 나무에 몸을 기댔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을 노려보는 시선 하나만큼은 델 듯이 뜨거웠다.
그녀가 어떤 남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나누는 날이 있더라도 마지막엔 자신의 차지가 된다면. 제 사랑은 평범한 남녀 간의 사랑과 다를 줄 알았다.
그런데 훤칠한 남자의 품에 안겨 우는 그녀에게 동화된 듯이 자신도 울고 있었다. 자신의 뺨을 지나치는 눈물을 거칠게 닦은 히아신은 웃음이 나왔다.
뭐지, 이건. 왜 내가 울고 있는 걸까.
자신이 없는 사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야지, 다른 남자의 품에 있을 수도 있지. 지금 이거 가지고 질투라도 하는 거야. 달빛에 비춘 발끝을 그늘로 숨긴 그 순간이었다.
잊고 살고 싶은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서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