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그전과 대접이 달라졌다. 치료소에 간 동료들 병문안을 위해 천막 밖으로 나온 나디사는 쏟아지는 관심에 낯이 뜨거웠다. 그야 그녀의 천막에 권력자들이 드나들며 공주가 깨어나면 가장 먼저 그녀를 보아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하기 때문이었다.
그 황당무계한 소문은 나디사가 라넌의 유품 격인 배지를 전달하면서 크기를 부풀려 갔다. 심장의 수장인 라넌이 죽는 상황에서 파르난의 왕자와 싸워 이긴 사람이라나 뭐라나. 전쟁이 준 두려움을 대신 이겨 줄 만한 영웅이 필요한 때였다.
제 식사에만 고기가 든 것을 보면 신전 쪽 입김도 들어간 듯했다. 현 신전은 재정비 과정을 거치는 중에 록을 수장으로 앉혔다. 첫 번째 신관인 랍이 살아 있으나 그는 왕자의 실종과 함께 모든 실정에 대한 권한을 잃었을뿐더러 그 본인조차 의욕이 없어 보였다.
여하튼 과거가 어떻더라도 파르난이란 공동의 적이 나타난 이상 그도 협조적인 태도로 나오는 터였다.
“저, 이것을. 안 가져가신 보급품이거든요.”
“제가 가지러 가려고 했는데. 여기까지 가져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우,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그 많던 파르난의 적을 쓸어 버리는 데에 라드군의 공이 컸고, 거기에 라드군 수장 격인 인물의 목숨과 맞바꿔 공주가 돌아왔으니 서사는 대강 짜인 셈이었다. 하지만 종전을 시키겠다는 기대 어린 말까지 나오자 이 뜨거운 관심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이러한 판국에 자신의 라드가 두 마리인 것까지 밝혀진다면 집중도가 더 생기면 생겼지 사그라들진 않을 거다.
귀족들은 공주의 의식이 돌아오면 인원을 꾸려 수도에 있는 본성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마지막까지 살아 있는 왕족인 공주와 왕세자의 안위를 위해서도 있거니와 그곳의 수비는 왕국 최고이니 말이다.
해서 이곳에 있는 보급품을 적당히 나누어 갖고 떠날 작정이었다. 남은 건 공주의 의식이 돌아오는가인데 그거야 밤이며 낮이며 신관들이 매달리고 있으니 곧 성과가 있으리라고 본다.
병문안 신청을 마치고 돌아온 나디사는 제 라드들을 묶어 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긴 비행과 전투로 몸이 지친 로마와 비교적 활발해 보이는 디디가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꼬리를 세우는 것이 사랑스러웠다.
“쉬고 있었지.”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이 일시적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불편하지 않을까. 플란 종족은 다르다며 같은 라드군 내에서도 그녀를 반겨 주는 분위기였으나 불과 몇 달 전까지 밑바닥 발톱이었던 그녀에게 감당 못 할 짐을 지워 주는 것 같아 입 안이 썼다.
비늘 갈기 시기인 라드 두 마리의 가운데에 앉자 도마뱀류의 동물이 내는 물비린내가 심했다.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정신이 없다가도 이렇듯 혼자 있으면 마음을 비트는 기억이 머릿속에서 짖어 댔다.
라넌이 죽는 모습 같은 것 말이다. 영혼이 거두어진 그녀의 눈빛과 죽음을 인정하듯 지은 미소.
차갑게 느껴지는 세상 속으로 그녀의 시체를 짊어지고 떠났던 그날의 따뜻한 날씨. 남들은 목숨 걸고 공주를 구해 온 줄 알지만 그녀는 라넌의 뒤를 따라갔던 기억밖에 없었다.
죽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내가 그 찬사를 받아도 되는 걸까.
공주에 관해서도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수차례 증언했다. 록에게도 그에 관해 말을 해 두었지만 잘 처리될지는 모르겠다.
라드의 몸통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서 바람을 느꼈다. 사람을 위해 산다지만 이 순간 그녀에게 위로가 되는 건 말 없이 부는 바람이었다. 호흡이 느린 라드의 몸통이 부푸는 느낌과 바람이 박자를 맞춰 그녀의 몸을 건드렸다.
천막 아래서 오지 않던 잠이 그녀에게도 허락됐다. 몸이 무거워 팔이 들리지 않았다.
“나디사. 여기 있어?”
저를 찾는 목소리에 머리 위로 걸어 다니던 바람이 흩어졌다. 잠이 덜 깬 나디사는 라드의 몸을 짚고서 상체를 일으켰다.
샛노란 하늘 아래 서 있는 금발의 남자는 긴장되어 있던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신전 사람인 줄 알았더니만 그녀의 동료인 아트리스였다.
찾아 헤매던 것처럼 그는 눈을 마주치자마자 바로 선 채로 다정하게 웃었다.
“여기 있었어?”
“응, 여기는 라드가 있으니까 라드군 말고는 못 들어오잖아.”
그녀의 말에 섞인 뉘앙스를 읽은 것인지 아트리스는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짓다가 주저 없이 흙바닥에 앉았다. 편히 다리를 올리고 앉는 그를 참 오랜만에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 주느라 바빴고, 그다음은 마벤의 격정적인 인사가 이어졌으며, 다친 그리사와 시네라에게 면회 신청을 해 놓고 기다리던 터라 그의 안부에 대해선 늦은 감이 있었다. 조만간 여섯, 아니지, 한 명 빠진 발톱 부대원들이 다 모이게 생겼으니. 그때 아트리스도 보면 되겠다 싶은 참이었다.
“히아신은 어디에 있는지 물어도 돼, 나디사.”
수비타에서 흔히 보이는 물방울무늬의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갔다. 히아신이 애지중지 애벌레 한 마리를 아끼며 나비가 될 때까지 키우겠다고 하던 것이 생각이 났다. 저 나비를 히아신이 보냈나. 잊을 만하면 별별 생물을 이용해서 저에게 편지를 보내는 느낌이 든다.
“히아신 이야기는 천천히 할게.”
“그래. 지금 알아도 탈영으로 신고해 봤자 어디 처벌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아트리스는 제 의견을 저돌적으로 말하면서도 예의를 차리는 사람이었다. 한데 지금의 아트리스는 성격이나 인상이나 물렁물렁했다. 전쟁이 와서 모든 걸 놓은 사람처럼 풀어진 자세로 앉아 있던 그의 시선이 갈수록 깊어졌다.
“라넌이 죽고 그 뒤를 누가 있는지 말이 많나 봐. 다친 사람도 많고 죽은 사람도 있고. 또 부담스럽다고 멀리하는 사람도 있고. 파르난의 왕자가 나타나서 수장을 죽였으니 다음 순서는 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치를 보고 있어.”
그리하여 공주의 임명이 있어 강제로 하기 전까진 나서고 싶지 않다는 입장일 거다.
그러니 나디사의 등장은 책임을 피하고픈 이들에게 특별했다. 공주의 비호까지 더해진다면 그녀가 높은 지위까지 올라갈 가능성도 있으니 말이다.
“이건 히아신의 라드지.”
“응.”
“너를 따르는 것 같은데.”
누구도 다치지 않고,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말을 하면 좋을 테지만 불행하게도 그녀는 혀가 둔했다. 살면서 때로는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는 것만 배우는 중이었다.
“그래, 나디사. 너도 나한테 하지 못하는 말이 있겠지.”
“곧…… 해 줄 수 있겠지.”
“그런데 말이야.”
이쯤이면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안 보는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봐야 되지 않은가. 그러나 못 본 사이 웃음만 늘어 버린 아트리스는 연기 놀이를 하듯 자세를 바꾸었다. 저건 맹세와 복종의 자세였다.
왼쪽 무릎을 꿇고 앉은 아트리스가 엄숙히 고개를 숙였다. 새빨간 노을빛이 고개 숙인 그의 금발 위로 떨어졌다. 당황스러운 안색의 나디사는 떼기 힘든 입을 열었다.
“음…… 갑자기 왜 그래.”
무언가 아트리스가 의심쩍다는 생각은 해 왔으나 그 일에 대해 넘기고 무시한 건 자신의 연약함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동료만은 믿고 싶다는 마음에 외면했다. 의심은 몸에 해롭기에. 그러나 그 해로운 과정 없이 건강하기만을 바라는 자신의 마음은 상처받기 쉽게 변한다.
지금이 그런 순간 같았다. 죄를 고하듯 목소리를 낮춘 아트리스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손을 뻗으려는 순간 진실의 입이 열리고 말았다.
“신관의 사생아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어. 오로지 나의 가족과 나의 안녕 때문에.”
그의 금발에 닿으려던 나디사의 손은 목표한 곳에 닿지 못했다. 노을빛이 끔찍이 어울리는 금발의 남자가 굵은 눈물을 떨어트렸다. 땅에 떨어지는 건 전부 그가 삼키고 숨겨 온 감정일 것이었다.
“그래.”
긴 이야기가 될 듯싶었다. 이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부디 나디사는 자신이 웃고 있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