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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63화 (163/210)

163화

겨울엔 툭하면 정신을 잃었던 듯한데 여름이 지나는 오늘은 몸도 마음도 끄떡없었다. 나디사는 스튜를 한 숟가락 뜨다가 말고 저에게 질문을 던진 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게르나라고 했습니다. 망령을 다루는 사람이라고.”

“그래, 그리고 또.”

“같이 그 여자가 만든 어떤 어두운 곳에 떨어졌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금목걸이를 한 어떤 남자의 질문이 찌르고 들어왔다.

“마지막 유언 같은 건 없었나? 샤스 가문이 얼마나 상심이 크겠어. 하, 어쩌다가 이런 일이.”

마지막 유언이라는 말에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스튜가 탁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천막에 방문하는 사람의 수가 치료소보다 더한 것 같았다.

나디사는 식사를 다 하지 못할 것만 같은 예감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때 그녀의 옆에서 불친절한 얼굴로 버티고 서 있던 마벤이 공손하게 목을 숙였다.

“록 님.”

침대 자리만 빼놓고 사람이 남은 채우고 만 천막 안으로 록이 방문했다. 치료소에 있어야 할 사람이 천막을 걷고 나타나자 한순간 뒤숭숭하던 분위기가 돌변했다.

그새 안색이 누렇게 뜬 록의 눈이 나디사에게서 머물렀다. 엉덩이가 무거운 귀족들은 일어서는 둥 마는 둥 하며 그를 맞이했다.

“록 님.”

“공주님 상태는 어떱니까.”

나디사만을 보고 있던 록은 핏발 선 시선을 돌렸다. 스튜 그릇을 들고 멍하니 있는 나디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의 살벌해진 언사에 당황스러워했다.

“여기서는 뭣들 하는 겁니까.”

“예?”

“쉬라고 마련한 자리에 쳐들어와 이게 뭣들 하는 것이냐고요.”

“아니, 그게…….”

왕자의 편에 섰던 고위 귀족들이 공주만 데려오고 왕자는 왜 데려오지 않은 거냐고 두 시간째 따져 묻기는 했다. 시체가 산처럼 쌓여 이걸 태워야 하나 아니면 적군의 시체는 내버려 둬야 하나 회의했다 들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공주의 영토이니 저들을 태워 주자는 주장이 우세했다. 시체 썩는 냄새가 다른 병을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의견에서였다.

그 결론 하나 내놓고 공주의 병문안을 갔다 온 이들이 이번에는 나디사에게 몰려온 것이었다. 첫 번째 신관이 돌아왔다는 소식에도 밖을 내다보지 않았던 록이 그녀의 천막에 온 것도 치료소에 있느라 귀환 소식을 늦게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오세요. 그건 추후 공주님께서 깨어나시면 해결할 문제이니.”

데려온 군사의 절반 이상을 잃고 제 고향으로 돌아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린 귀족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헛기침하며 일어났다. 공주의 성 가장 안쪽에서 여인들과 대피해 있었단 사실을 아는 록에게 뻗대기가 힘들었을 것이었다.

“그럼, 우리는.”

마벤은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휙 돌렸다. 몸 보전할 시간도 없이 들이닥쳐서 묻고 따지더니만. 마음 같아선 떠난 자리에 침을 뱉어 주고팠다. 눈꼬리를 내린 마벤은 그 뚱뚱한 남자들이 나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가진 것 중에 가장 깨끗한 의자를 내놓았다.

“여기 앉으시지요.”

천막 앞에 서서 무심히 귀족을 배웅하는 그의 눈이 맹견 같았다. 속 시원하다고 속삭이는 마벤 때문에 나디사는 웃음이 나왔다.

돌아오고 나서부터 마벤이든 아트리스든 그녀의 옆을 지키지 못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안달했다. 그리사와 시네라는 치료소에 있다고 들었는데, 심각한 부상은 아니라지만 그쪽에 관심을 쏟는 것이 낫지 않을까.

“록 님.”

저를 부르는 소리에 그의 뾰족한 눈꼬리가 풀렸다. 그 급작스러운 변화에 의자를 빼던 마벤의 손이 실수로 미끄러졌다.

“아, 나디사.”

도착하고 나서 나디사는 자신이 데려온 게 정말로 공주가 맞다는 얘기만 동료의 입으로 전해 들었다. 그에 관해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나 그걸 누구에게 이야기해야 좋을지 판단이 서지도 않고.

“괜찮아.”

“아, 네.”

“아니야, 봐 보자.”

“정말로…….”

마벤은 흔쾌한 태도로 한 걸음 물러나 주었다. 의자에 새처럼 날아와 앉은 록은 그녀의 손목을 다급히 잡아당겼다. 감추고 싶었던 손바닥을 돌려본다. 검을 잡다가 생긴 굳은살 박인 부분을 엄지로 조심스레 쓸어 만졌다. 그 상냥한 손길은 문드러지는 진흙을 대하듯이 조심스러웠다. 나디사는 굳은살 위로 바람이 스치는 줄 알았다.

“저…….”

치료는 하지 않고 손만 보는 록의 행태가 심상치 않았는지 신뢰가 넘쳐나던 마벤의 눈이 점점 가늘어졌다. 치료는 언제쯤 시작되는 거냐고 물어보려던 마벤은 곧이어 벌어진 입술을 닫았다.

“록, 님.”

굵은 눈물 한 방울이 그의 뺨을 적시고 말았다. 흙바닥에 스며드는 그의 눈물이 두 여자의 시선을 갈 곳 없게 만들었다.

“어, 저는, 그…….”

더욱이 그에게 타박할 생각이었던 마벤은 낄 자리가 아닌듯싶어 한없이 먼 바깥을 봤다. 이 분위기를 누구에게 들켜선 안 될 것 같았다.

“저는 밖에서 망 좀…….”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인 나디사에게 확답을 받고 마벤은 새장에서 풀려나는 앵무처럼 필사적으로 천막을 빠져나갔다. 사라지는 마벤과 같은 심정인 나디사는 제 손을 잡고 울고 있는 록의 등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이 사람은 무엇에 우는 걸까.

내가 무사히 살아 돌아와서. 아니면 라넌이 죽어서. 그것도 아니면 무얼 알고 우는 걸까.

“나디사…….”

“……네.”

목이 멘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이 간지러운 느낌이 싫지 않았다.

“고맙다.”

“…….”

“고마워, 돌아와 줘서.”

무사하다는 것도 아니고, 돌아와 줘서 고맙다는 말이 어색한 나디사는 그의 목 뒤를 덮은 머리카락을 새삼스레 보았다. 남자들은 머리가 빨리 자란다더니 단정하던 그의 머리칼이 저만큼 자라났다. 나디사는 제게 휴식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었다. 남자가 우는데 저는 머리칼의 길이나 보고 있으니 말이다.

“저 무사해요. 아픈 데도 없고.”

“그래도…….”

“정말입니다. 이 손도, 아무렇지 않아요. 다들 그런걸요.”

마음이 여린 록은 남의 상처를 객관적으로 못 보나 보다. 그런 거라고 애써 이해한 나디사는 손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을 쥐고 있는 록은 그 지극히 당연한 요청을 거부했다.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든 나디사는 눈을 도르르 굴렸다.

“잠시만, 이거는 치료해 주고 싶어서.”

“어차피 또 생길 텐데요.”

“그럼 또 치료해 주고.”

록이 얼마나 비싸고 귀중한 인력인가에 대해서 모른다고 할 수 없었다. 라드군이 제 체력과 목숨을 깎아 힘을 쓰는 것처럼 그도 신력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닐 터다.

이 귀한 힘을 다른 데에 쓰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그의 손목을 살며시 잡았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왜?”

“더 필요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록은 그녀의 다정한 거부에도 씁쓸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나디사는 제가 말실수를 했나 싶었지만 그건 진심이었다.

“그래. 다른 사람 누구?”

록은 그녀의 요청을 듣지 못한 얼굴로 신력을 더 세게 불어넣었다. 제 손바닥에 작은 병아리 하나를 쥐었을 때와 똑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디사.”

“네.”

“나는 이러려고 이걸 배운 것 같다.”

“……무슨 소리신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고쳐 주고, 아프지 않게 해 주고.”

나디사는 그의 시선에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딴 곳으로 비꼈다. 이상했다. 좋아하는 동료들이 해 줬던 말과 다를 바 없는데 이상하게 그가 하는 말은 그녀를 기운 없게 만들었다.

“있지.”

“…….”

울기 싫어 입술을 말아 물자 그를 째려보는 듯한 표정이 됐지만 그는 그러지 말라고 지적하지 않았다.

“이 일이 끝나면, 나와 같이 어디 좀 가지 않을래.”

“어디요.”

나디사는 저도 모르게 퉁명스레 대답하고 말았다.

“어떤 사람이 좋아하던 장소가 있어. 너도 좋아할 것 같아서.”

그가 스스럼없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안다. 그 이유가 무언지 짐작은 가지만 나디사는 짐작에서 멈추었다. 더 나아가면 이 전쟁이 끝나도록 울 것만 같았다. 그 우는 이유도 모르고.

“네.”

우발적인 충동으로 약속을 한 나디사는 그가 마음 편히 치료를 마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의 깨끗한 손이 그의 마음을 좋게 한다면, 잠시지만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늦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기다리는 수비타 왕국의 오후가 두 사람을 각기 다른 의미로 쉬게 했다. 한 사람은 돌아와서, 한 사람은 돌아왔기에. 의미는 다르나 마음은 같은, 그런 오후의 평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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