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남들은 보기 싫고 미운 사람이 죽어도 장례식에 참석만 하면 눈물이 난다던데. 나디사는 그 말이 순 거짓말 같았다.
라넌의 라드는 먹지도 눕지도 않고서 죽을 날만 기다렸다. 말로만 듣던 라드의 충성심을 그런 허무한 방식으로 확인하고 싶진 않았다. 이기적이지만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남은 비상식량들을 전부 그 앞에 쌓아 두고 온 참이었다.
라넌의 시체는 로마의 등에 태워서 이동하고 있었다. 죽은 사람을 싣고 다니는 꺼림칙한 상황이어야 될 텐데 나디사의 마음은 잔잔한 호수 같았다.
눈물이 날 줄 알았다. 나디사는 모래 알갱이가 나올 것 같이 건조하기만 한 눈을 끔뻑거렸다. 버석한 햇볕이 라넌의 금발 위로 내리쬐어서 그런가. 전쟁도, 죽음도 이름 모를 딴 나라의 일이었나 싶다.
알을 낳은 지 얼마 안 된 새 둥지를 지나던 나디사는 떨어지지 않게 라넌을 고정하는 일에 열중했다. 몸을 밧줄로 묶어 두었는데도 굳이 가서 한 번 보고, 두 번 확인한다.
그러는 중에 그녀가 깨어났으면 해서 그랬다. 환영을 만드는 남자도 있고 망령을 부리는 여자도 있으니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도 간혹 생기지는 않을까.
히아신 생각은 안 하련다. 그녀를 죽인 사람들과 한패인 남자를 떠올리는 건 배신자나 할 짓이었다. 그를 걱정하거나 그리워하는 저가 아주 밑바닥인 것 같았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나디사는 라넌의 차가운 손과 발을 주무른 다음에 감긴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디사.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서쪽으로 추측되는 방향에서 불어오는 목소리가 저를 불렀다. 덩달아 휘둥그레진 로마와 눈을 마주쳤다.
“가 보자.”
일찍이 숲에 찾아온 누가 해 둔 것처럼 나뭇가지 허리가 휘어져 있었다. 커튼 같이 쳐진 잎을 손으로 밀치며 달려간 나디사는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물러섰다. 눈이 부셔서 멈칫멈칫 나아가던 나디사의 걸음은 커다란 돌 앞에서 최후를 맞았다.
“내가…….”
꿈을 꾸는 건가. 로마가 같이 와서 구경하는 걸 보니 꿈은 아닌 듯하면서도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함부로 손을 대었다가 깨질까 싶어 나디사는 뒷짐을 졌다.
“이건 진짜일까요.”
그녀의 시야에 담긴 건 한 여인이었다. 손을 배 위에 가지런하게 모으고 자는 그 얼굴이 공주처럼 생겼다. 공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나디사는 금발과 그녀가 입은 옷으로 공주임을 대강 짐작했을 뿐이었다.
두고 가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데려가자니 이게 적의 속셈 같고. 한숨이 길어진 나디사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신이 산다는 하늘은 맑고 예쁘기도 하다. 전쟁이라는 게 누굴 죽이고 죽이기만 해서는 끝이 나질 않는구나. 한쪽이 졌다고 하기 전까진 끝나지 않는 것이 전쟁인데 나디사는 벌써 손발을 다 들고 싶었다.
“진짜 모르겠어요…….”
보고 싶은 사람도 많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많다. 그녀가 원하는 대답은 바람도 들려주지 않는다. 나디사는 떠밀리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손등으로 창백한 그녀의 뺨을 만졌다.
망령을 만질 때와는 느낌부터 달랐다. 붉은 뺨과 살아 있는 사람이 내는 달큼한 숨은 라넌과도 달랐고. 망령도 아니고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무례하지만 그녀의 팔과 다리를 걷어 파르난의 문양은 없나 꼼꼼히 보았다.
살아도 있고, 파르난의 사람도 아니니.
“데려가야겠죠.”
찾은 게 아니지만. 나디사는 그녀를 안아 들기 전 마지막으로 라넌을 보았다. 지금이라도 그녀가 일어나서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 명쾌하게 말을 해 주면 좋겠다.
그러나 망령이 잠재운 그녀는 다시는 깨지 않았다. 나디사는 그제야 조금 울고 싶어졌다.
* * *
“전부 태워!”
“다시, 이거! 언제 들어올지 몰라!”
시체를 들고 치운 손으로 힘을 합쳐 성문을 닫았다. 밖에 남은 아군과 적군은 라드군이 처리하는 것으로 회의에서 합의를 보았다.
“으아아악!”
“한 놈 더 떨어진다!”
다만 이는 라드군과는 합의 본 일이 없는 사항으로 가장 높은 지휘관이 된 왕실군의 지시 사항이었다. 구하고, 죽이라고만 했으니 라드군은 그 명을 착실히 따르는 것일 뿐.
아군을 발견하면 입으로 물어와 약속된 지점에 떨어트렸다. 적군과 생과 사를 나누고 있던 이들이 갑자기 하늘을 날게 되고, 또 갑자기 떨어지게 되니 심장이 터질 만도 하다만. 라넌이라는 지휘관을 잃은 지금의 라드군은 수레 끄는 말과도 같이 쓰이는 것에 불만이 컸다.
“방금 그 사람이 마지막이랍니다.”
첫 번째 신관이 한 라드의 입에 물려 들어오고 두 번째 신관은 치료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신관들의 수장은 다 돌아왔는데 왕실과 라드의 수장은 소식이 없었다.
잔당을 해치우는 데에만 족히 삼 일이 걸렸다. 라드군들은 라넌이 마지막으로 첫 번째 신관을 구하고 숲으로 떠났다는 소식에 수색을 강행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소강이 된 상태에서 시체를 치우고 있는 잔병들과 하늘에 떠서 교대로 수색 중인 라드군은 임무가 끝나지 않았다.
언제 기습할지는 신도 모르기에 전쟁은 끝이 아니라 휴식 상태였다. 왕가의 사람이 사라졌단 소식이 돌면 병사들의 사기가 눈에 띄게 떨어질 것이었다. 누가 죽어 가는 왕세자라도 데려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랬으나 그럴 의욕이 남은 사람이 이 땅에 없으니 문제였다.
“아트리스. 교대하자.”
“괜찮아.”
“교대 시간은 지켜야 해. 너 식사도 안 하고 지금 몇 시간째…….”
“네가 내 몫까지 먹어 줘, 마벤.”
아침과 달라진 게 없는 땅을 훑는 아트리스의 표정은 그를 잘 아는 마벤도 말리기가 어려웠다. 배급이 시작된 식사의 상태가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왕실 허락 없이 창고를 열어 쑨 것이나 다름없는 곡물 스튜를 만들어 냈다. 허기를 달래는 용도에는 제격이지만 그 밖의 맛과 식감은 기대할 수 없었다.
“나디사는 돌아올 거야.”
아트리스가 이러는 이유는 지나친 동료 사랑이었다. 히아신은 없지, 나디사도 없지, 최근 들은 건 라넌을 따라갔다는 말들뿐이었다. 전쟁에서 만나는 게 반가울 일은 아니지만 비로소 아군으로 볼 줄 알았던 나디사가 실종된 것이었다.
나디사는 저희 중에 제일 잘 날았다. 높이 날고 빠르게 간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부탁하듯이 말했지만 마벤 자신조차 검은 머리의 시체를 보면 다른 길로 도망가고만 싶었으니.
“저기 한 번 더 수색하고 올게. 네가 여기서 대신 자리 좀 맡아 줘.”
“일은 너 혼자 하니.”
소식이 끊겨 애타는 게 저 혼자인 것처럼 구는 것도 재수 없었다. 전쟁이 시작되고부터, 아니, 시작되기 전부터 철부지처럼 구는 아트리스를 보좌했지만 돌아오는 건 이런 냉대뿐이었다.
이젠 그를 말리는 것도 지친 마벤이 라드의 목줄을 당겨 뒤도는 차였다. 햇볕을 정면으로 맞받아친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의 시야가 물 찬 듯이 흐릿해졌다. 그리고 뜨거운 눈물이 끓어올랐다.
입이 굳어 말도 안 나오는 그녀를 밀치고 누군가가 소리쳐 주었다.
“라넌 경이다!”
목격자의 증언대로 숲이 끝나는 지점에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은 한 손엔 칼을, 한 손엔 라드 목줄을 쥐고 있었다. 삼 일간 시체를 만들고 보고 했던 사람들보다 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걸어오는 여인의 검은 머리칼은 기름기 없이 처져 있었다.
“나디사!”
다른 사람들이 라넌을 보고 뛰어갈 때 그녀와 아트리스는 나디사의 이름을 불렀다. 시체에 발이 걸려 넘어질까 아래를 보고 걷던 나디사가 홀쭉해진 얼굴을 든다. 제게로 달려오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본 그녀는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마벤, 아트리스.”
울음을 거부하는 얼굴이 못나게 찡그려진다. 돌아왔다는 그 기쁨은 달려온 마벤이 그녀를 끌어안고 나서 더 진해졌다.
“왜 이제 와!”
마벤의 흐느끼는 목소리와 아트리스의 옷에 밴 화약 냄새가 더불어 나디사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
“돌아왔어.”
이게 꿈이 아니길 빌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