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라울.”
탕탕탕탕, 무슨 재주로 구했는지 알 수 없는 숟가락으로 철창을 쉼 없이 두드렸다. 식사 때마다 라울은 저 소리에 두통이 도졌다. 도통 체면이라는 게 없는 저 왕자는, 아니, 사기꾼이자 협박꾼은 종일 라울의 피를 말리는 방법만 연구하는 듯했다.
“아직도 못 구했어?”
“…….”
“라우울.”
“하…….”
“한숨 쉬지 말고. 나도 빨리 나가고 싶어서 그래.”
우리에 갇힌 짐승 대하듯 철장 밖으로 손을 내민 히아신은 제 앞에서 수갑을 풀고 편하게 지냈다. 일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 알 수 없으나 라울은 끝내 상황을 받아들였다. 저 미친 왕자에게서 벗어나려면 작은 단서라도 던져 주고 떠나야지.
“……봤어.”
“어디서?”
그러나 시계를 봤다고 하면 좋아할 줄 알았던 히아신이 무심한 눈으로 대꾸했다. 목을 따기 전에 위치를 말하라고 난리를 칠 줄 알았더니만. 그 냉소적인 반응이 당황스러워 라울이 그 침울한 녹색 눈동자를 설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왜 표정이 그래? 겨우, 그쪽이 원하는 걸 찾아다 줬더니.”
“이상하잖아. 어떻게 라울 같은 사람이 그렇게 빨리 찾아낼 수 있어?”
“뭐?”
“그래서 나는 기한을 넉넉히 줬던 건데.”
“그럼 왜 얼굴 볼 때마다 찾았냐고……!”
“그렇다고 재촉을 그만둘 수 없지. 그게 내가 맡은 일이잖아.”
“하!”
미쳐 돈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일까. 라울은 제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다가 곧이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한 번 더 이런 왕자와 엮이면 제 손을 자르겠다고 다짐한 라울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을 찰나 갑자기 그의 뒤에서 손이 튀어나왔다.
“라울.”
“으악!”
철창에 기대 서 있던 라울은 소스라치듯 놀라 비명을 질렀다. 말끔한 얼굴을 가진 히아신은 그에게 부탁해 매일 같이 세수 도구와 새 옷 등을 얻어 내었다. 갇힌 신세에 누가 본다고 그러는 거냐고 물어봤자 미친 답변이 돌아올 것 같아 내버려 두고 있긴 했다만.
“너, 아니, 그, 이렇게 나오시면 제가 곤란해진다니까요.”
“어디 있는데.”
“그…….”
라울은 팔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히아신의 협박에 이기지 못해 애먼 곳을 뒤지고 다니던 것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가까운 장소였다.
“그, 감옥을 감싼 외성에 경비병이 머무는 초소가 하나 있는데. 그 안에 있더라고요…….”
“하.”
그건 신이 주신 우연이었다. 밤이고 낮이고 시계를 찾느라 기운이 떨어진 라울은 산책 겸 감옥 주위를 돌아다니다가 미처 담뱃불을 챙겨 오지 않은 걸 알았다.
불을 얻어 보려고 경비 초소로 들어갔는데 서랍 위에 시계가 보이는 것 아닌가. 마침 경비병도 없어 한번 들춰봤더니 히아신이 말한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아니면 어쩌나 싶어 그 위치만 확인하고 돌아온 라울은 생각에 깊게 잠긴 히아신을 슬금슬금 피해 자리를 옮겼다. 철장 앞으로 이동한 라울은 거목처럼 서 있는 히아신의 뒷모습에 조용히 욕을 날렸다.
“라울.”
“어, 어?”
“어디 가.”
철창 뒤로 튈 준비를 하던 라울은 거짓 미소를 지었다. 선 채로 죽은 것처럼 우두커니 있는 히아신에게 친절히 대답했다.
“내, 내가 위치도 알려 줬으니까 혼자 가 보시는 게…….”
“누가 봐도 함정인데. 나 그래도 혼자 죽기는 싫어서 그래.”
“…….”
“응? 같이 가자.”
우아하게 뒤돌아 저를 바라보는 히아신의 은발은 흰 눈같이 아름답고 청결했다. 저 머리칼이 저만큼 아름다울 수 있도록 기름과 비누를 해다 바친 기억이 떠오른 라울은 이를 악물었다. 웃는 얼굴에는 경련이 일어날 정도였다.
“예.”
그 말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정말로 이게 함정이어서 이참에 히아신이 콱 죽었으면 한다는 거였다.
* * *
그리 쉽게 죽을 순 없지. 못 해 본 게 많았다. 나디사랑 손도 못 잡아 봤고, 입맞춤도 안 해 봤는걸.
오늘치 입맞춤과 손잡기를 못 했다는 뜻이지만 말이다.
하루도 안 빼놓고 그걸 해 주어야 하는데 여기에 갇혀 있어서 아주 고달픈 신세였다.
더욱이 시계를 찾고 있는 것을 알고 함정을 파 둔 모양이었다. 하지만 조금 깨지고 다치면 어때. 단조로운 가락의 노래를 부르며 라울을 따라가던 히아신은 굽은 그의 어깨가 한 곳에 멈추어 선 것을 보았다.
이래도 걸려 볼 테냐고 자신하는 함정이었다. 기꺼이 그곳으로 걸어 들어간 히아신은 안내를 맡은 라울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라울.”
“어, 예?”
“내가 들어갈게. 너는.”
데려다준 수고비는 받지 않아도 되니 그냥 보내 주었으면, 하는 눈빛이 애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히아신은 그런 눈빛쯤은 대수롭지 않은 심장을 가진 이였다.
“망을 봐.”
실망이 넘쳐 말도 못 하는 라울을 지나쳐 갔다. 시선이 어찌나 따가운지 뒤통수가 가려울 정도였지만 히아신의 발길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스치듯 초소의 문고리 상태를 확인한 뒤 잡아당겼다.
기강이 해이해진 것인지 초소 안을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감옥 근처를 경비하는 사람 두엇을 두는 게 정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이건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를 위해 준비된 아름답고 편안한 함정이었다. 그걸 몰라서 들어온 게 아닌지라 그가 알고 싶은 건 왜였다. 왜 함정을 파는가.
그가 심심해서 라울을 협박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방법이야 찾으면 많겠지만 저쪽은 숨겨 둘 것이고, 이쪽은 찾아야 하는 지겨운 술래잡기가 늘어질수록 곤란한 건 이쪽이니.
“안녕, 공주님.”
시계는 라울이 말한 대로 서랍 위에 올려져 있었다. 가짜를 올려 두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으나 시계 안쪽에 넣어 둔 나디사의 초상화가 그대로였다. 이런 걸 감쪽같이 베껴서 그려 넣을 만한 감성을 가진 자가 파르난에는 없었다.
차가운 시계 끝으로 입술을 톡톡 치듯이 건드렸다. 이유를 알고팠다.
그 왜를 알기 전에는 움직일 수 없다는, 꽤 정상적인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이런.”
아버지가 용서해 주실 리는 없고, 그냥 이렇게 죽여 버리게 하려고 하는 건가. 제 앞에 나타난 검은 연기를 보며 히아신이 시계를 손에 가두었다. 매몰차고 차가운 기운이 그의 앞에 도사리고 있었다.
실타래처럼 뭉치고 얽히던 검은 연기는 어느 순간부터 거울의 모습을 했다. 단순히 저를 비추고만 있었던 거울 속 모습이 찬란한 숲으로 바뀌어 가면서 손가락 마디에 든 힘이 풀렸다.
뎅, 손에서 풀려나 떨어지던 시계가 목줄 덕에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목숨보다 귀한 시계가 떨어지는 것도 신경 쓰지 못하는 히아신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히아신은 다가가 그 검은 연기를 한 움큼 쥐어 보였다. 거울 안에 보이는 숲, 그리고 그 길을 걷고 있는 여자가 그의 뇌에 문제를 일으켰다.
“나디사.”
지친 표정으로 걷고 있는 나디사와 그 뒤를 따르는 로마. 그리고 사람이 그 로마의 등에 타 있었다.
“라넌 샤스…….”
피부 상태나 자세를 보아하니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라넌이 죽었다는 건 크게 충격적이지 않았으나 나디사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그의 신경을 긁었다. 하고 많은 표정 중에 저 표정. 정처 없이 떠도는 듯한 얼굴에 히아신은 손톱을 물었다.
나디사에게 가 봐야 한다. 설령 함정일지라도.
그러나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장면이 그의 주의를 끌었다.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사람은 그가 잘 아는 형제였다.
“게르나.”
망령의 게르나. 이 조잡한 함정을 준비한 것도 게르나일 터.
히아신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진 그 순간 무언갈 발견한 나디사가 헐떡이며 뛰어갔다. 게르나가 준비한 장면은 그곳에서 끝났다.
“나디사.”
듣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말을 걸 정도로 그는 미치지 않았다. 나무 뒤에서 게르나가 의미심장하게 웃는 모습이 노파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시계, 그리고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 일러주기까지. 이것도 그 빌어먹을 계획의 일부겠지만 자신이 무얼 어쩌겠는가.
바람처럼 소리 없이 그녀에게 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