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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60화 (160/210)

160화

새의 지저귀는 노래가 헐떡이는 나디사의 뺨을 상기시켰다. 파릇파릇한 땅이 내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승리를 만끽하는 양 팔을 벌린 그녀의 뒤로 로마가 따라 나왔다. 저도 기쁜지 콧소리가 간드러진다.

그러나 숲으로 나오게 된 나디사 일행이 자유를 누리는 것도 잠시. 빠져나온 토끼 구멍 같은 굴의 모습이 닫히고 있었다. 로마와 얼싸안고 있던 나디사는 당연히 따라 나왔어야 할 사람의 얼굴을 애타게 기다렸다.

같이 탈출구로 뛰어오던 라넌과 길이 엇갈린 것인가. 로마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걱정을 덜어 보려 했으나 구멍의 크기가 작아진다고 느낄 때까지 아무런 조짐이 없었다.

“왜…….”

무언가 잘못됐다. 자신만이 출구로 나오고 그녀는 다른 길을 택했을지도. 안에서 길이 엇갈렸다면 라넌은 다른 곳에 떨어졌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면 라넌을 찾기 위해 다시 들어가야겠다.

“로마!”

바깥 공기에 심취해 있던 로마가 굴로 들어가려는 그녀의 옷자락을 물었다. 목숨 걸고 빠져나왔는데 다시 뱀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게 싫을 만도 하지. 하지만 동료이자 지휘관인 라넌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 고집 센 로마의 머리를 밀어 낸 차였다.

- 우우으

별안간 출구 구멍에서 흘러나온 울음소리에 로마의 작은 귀가 떨렸다. 어두운 길을 걸어 나온 그림자는 목이 길었다. 라넌의 라드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나 다가오는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라넌 경!”

출구에서 한 발자국 나왔을 때는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고, 두 발자국 더 걸어 숲으로 들어왔을 때는 눈가가 뜨거워졌다.

라드의 입에 물려 있는 그녀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상태였다. 배에 난 자상은 당장 치료가 필요한 듯싶었다. 아주 잠시 서 있었을 뿐인데 피가 바닥을 적셨다. 생각할 시간이 많지 않은 나디사가 달려 나가 라넌을 받아 안았다.

제 주인을 땅에 내려놓은 라드는 본격적으로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꼬인 머릿속에서 응급약을 기억해 낸 나디사는 가죽 가방을 열어 비상약 덩어리를 끄집어냈다.

“조금만, 참으세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옷가지를 조금 들춰 냈다. 구멍이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상처가 그녀의 배에 생겨났다.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말이 이런 뜻이구나. 설마 이것도 망령이 만든 망상인가 싶어 뺨을 잠깐 꼬집어 보았다.

우으으으

곡소리 버금가게 우는 라드와 숨이 간당간당한 라넌. 약 뚜껑을 열어 라넌의 배에 부었으나 효과를 기대하긴 어렵겠다.

힘이 쫙 빠져 털썩하며 주저앉았지만 그녀는 발악하듯이 약병 입구를 눕혔다. 창궐하는 돌림병 같은 피라도 지혈해 볼 참이었다.

“나디사 마로닌…….”

희망에 응답하는 것처럼 라넌이 눈을 떴다. 약을 흡수하지 못하는 상처를 손으로 눌러 보려던 차에 일어난 일이었다.

“라넌 경!”

물속에 있다가 건져진 사람처럼 라넌의 말 한마디에 감정이 숨을 쉬었다. 도움 안 되는 약병을 세워 두고 나디사는 그녀의 맥박이 뛰는 자리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날아서 공주의 성까지 돌아가고, 그다음엔…….

“아니, 나는 두고…… 왕가의 사람들, 찾아.”

“예?”

“너라도, 찾, 으라고.”

의무, 실리만 쫓는 냉정하다 싶던 인사였지만 자기가 죽어 가는 순간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납치된 왕가의 쌍둥이를 찾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만 자신은 그녀를 두고 날아갈 만큼 비정하지 않았다.

임무가 목숨보다 우선시될 순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녀의 생각을 비웃듯이 라넌의 입가엔 농담조 비슷한 웃음도 떠오르지 않았다.

“살아서, 왕국이 망하는 걸 보느니 죽는 게 낫잖아…….”

“찾겠습니다. 하지만 몸을 먼저…….”

“나디사.”

라넌은 바닥에 너부러져 있던 손을 들어 배지를 움켜잡았다. 겉면이 닳아 빠진 그 배지는 오래간 그녀의 망토에 달려 있었다. 심장 모양을 한 배지가 톡 떨어졌다. 라넌이 하려는 행동이 무언지 알고 싶지 않았다. 손톱 밑에 피가 낀 손으로 배지를 전해 주는 것까지 죄다 자신의 망상이길 바랐다.

“파르난, 사람들을…… 조심해라. 뒤도, 아래도, 앞도, 잘…… 보고.”

자신의 손바닥에 착지한 뱃지가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수명이 다한 그녀의 눈빛은 그 꺼져 가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는 듯했다.

입가에 검붉은 핏자국을 묻히고서 라넌은 그 배지를 전해 주는 게 좋은 일이라도 된 양 웃었다. 풀잎을 베고 잠이 들려는 그녀의 몸을 저도 모르게 천천히 흔들었다.

“잠들지 마세요.”

“…….”

“라넌 경.”

사람이 죽는 것을 보는 건 이골이 났다 싶었는데. 이건 아니었다. 잠든 라넌의 손을 잡으며 나디사는 섣부른 판단을 잠시 미뤄 뒀다. 잠이 든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으나 마음은 배로 조급해졌다.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시잖아요. 조금 자고 일어나서 해 주세요.”

왜 친모와 닮은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고 못살게 굴고 싶었던 건지. 그런 주제에 왜 지금은 이 배지를 준 건지.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제 곁에 있는 나디사의 존재가 신경 쓰인 건지. 그것도 아니면 라드의 울음소리가 망자의 발걸음을 잡아 둔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라넌의 목소리가 애달픈 숲길을 돌아다녔다.

“조용히, 좀, 해. 지금은 너무 피곤해…….”

“조금 쉬시고 나면 같이 이동하겠습니다. 깨워 드릴게요.”

“너한테, 하고 싶은 말 같은 거.”

“…….”

“미안하지만, 없어. 네 기억에서 빨리, 잊히고 싶어. 하나도 좋은 기억 같은 건, 없잖아.”

그러니까 네 기억에 남을 만한 말 같은 건 하지 않아. 라넌이 말하지 않은 뒷말이 제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떠날 사람이 하는 사과 같은 거, 그녀 같은 성격엔 치사하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할 말을 남기지 않고 싶다는 그녀가 비겁하지 않게 느껴져, 더더욱 잊을 수 없게 된다는 걸 모를까.

“내 가문에는, 가문 묘비 말고 바람에, 실어 달라고. 혹시 전해 줄 수 있다면 말이야.”

유언치고는 초라한 말이었다. 칼바람처럼 사는 내내 자신을 할퀴고 후련히 떠나 버리는 라넌의 손을 붙들었다. 그러나 그쯤 쓸쓸한 마지막이 아니길 바란 나디사만 모르는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라넌은 자신의 라드에게 두 가지 소망을 빌었다. 할 수 있다면 그 어둠 속에서 죽고 싶진 않다고. 그리고 제 손을 잡아 주는 나디사를 보고 싶다고. 나답지 않은 욕심을 부리자면 말이다. 이 아이를 정면에서 마주 본 적은 없던 것 같아서. 이목구비가 얼마나 어떻게 닮았는지, 증오가 아닌 시선으로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다행히도 신이 허락했나 보다. 바람이 달라진 걸 느낀 그녀는 힘겹게 눈을 떴다.

아까까지는 들리지 않았던 맑은 새소리가 세상을 장식했다. 그녀에게 허벅지를 내어 주고 있던 이가 일어날 수 있도록 손을 잡아 준다. 응당 느껴야 할 고통이 없어 라넌은 손으로 상처 난 부위를 더듬었다. 말짱하다. 불로 지지는 듯하던 고통도 더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손을 잡아 준 사람은.

‘어서 와, 라넌.’

죽어서 자신을 맞아 줄 사람의 후보가 백 명이 있다면 그녀는 백 번째쯤이 아닐까. 가뜩이나 제 자식한테 하는 꼴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환한 꽃밭으로 그녀를 이끄는 손은, 미소는 이런 말이 생각나게 했다.

오랜만이야.

머릿속으로 떠올리는데 입으로 전달되는 기분. 얼떨떨함이 가시자 저 멀리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떠나보낸 이들이 한곳에 모여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티사.

돌아본 그녀는 드높은 담벼락에 피어난 꽃처럼 싱그러웠다. 사실 마지막에 그런 선택을 한 것에는 치졸한 마음이 있었다.

네가 보기에 미울 때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그 아이를 목숨 바쳐 지켰으니 용서해 줄 수 있냐고.

티사는 길을 잃지 않게 손을 맞잡아 줄 뿐이었다.

샤스 가문의 장녀이자 마지막 직계 자손인 라넌. 그녀의 마지막 미소는 세상을 훔친 것처럼 달콤하고 편안했다고, 훗날 나디사는 그녀를 아는 사람들에게 그리 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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