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라드군으로 지낸 세월이 길다고 하더라도 라넌 샤스에게 파르난의 사람들은 얼굴 볼 일 없는, 머나먼 이웃 같았다. 엮이면 안 된단 소문만 무성한 집단이 무서울 게 무어냐 싶었다. 그러나 티사 레나이의 망령을 준비한 걸 보니 단순히 나쁘다고 말할 수준을 넘어선 듯했다.
상대를 기습하는 것까진 무조건 이기려는 전쟁의 습성상 그럴 수 있다고 여기는 한편. 사람의 아픈 과거를 끌어내 싸우게 하는 건 악마나 하는 짓이 아닌가.
일말의 동정심까지 거두게 할 만큼 악랄한 것들. 마음 같아선 티사의 망령을 꺼내 온 이들을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았다.
“나디사!”
설상가상 나디사 마로닌의 정신이 실오라기에 붙은 촛불처럼 위태위태하다. 티사에게 원망을 비치던 그 당당한 태도는 어디로 가고 오랜만에 보는 친모의 얼굴에 제대로 홀려 버렸다.
이리 오라는 그녀의 말도 무시당한 참이었다. 고로 이 싸움은 그녀가 단시간에 끝장을 내야만 했다.
과거에 잡혀 아까운 목숨을 날려서야 되겠는가. 그나마 나디사 마로닌의 등장으로 뭐가 과거이고 뭐가 현재인지는 뚜렷하게 알게 된 셈이었다.
“비켜.”
티사와 나디사가 한자리에 있는 건 신께 수백 번 빌어도 불가능한 일이니까. 지시를 무시하고 있는 나디사에게 열이 받기는커녕 조금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티사 레나이가 저한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했으면서 말이다. 그거 닮은 망령 하나 나타났다고 저런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하다니
그 부분마저 티사와 닮았다는 걸 저 아이는 아마 모르겠지. 그러니 그 말을 해 주지 않는 건 티사를 대신해서 하는 자신의 소심한 복수였다.
“윽!”
망령이 염소 고기를 썰 때나 쓸 법한 칼로 그녀를 누르고 있었다. 자세가 떨쳐 내는 순간 어깨를 찔리기 좋았다.
“젠장.”
그나저나 어둑한 공간에 무슨 장치를 해 두었는지 힘이 쭉쭉 빨려 나가고 있었다. 티사의 얼굴을 한 망령에게 칼을 맞다니. 올해 운세가 바닥이라는 생각을 하는 차에 힘 빠진 팔이 차츰 아래로 떨어졌다.
- 아아아악!
“티사!”
망령의 가슴을 기다란 검이 뚫고 나왔다. 뒤에서 찔러 온 것이 분명한 검에 꿰뚫린 망령이 몸을 비틀었다.
아아아!
망령이 지르는 괴상한 비명을 듣다가 이쪽이 쓰러지게 생겼다. 이게 티사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라넌은 어질러진 마음을 수습하지 못했다.
“라넌 경! 괜찮으십니까?”
검을 든 나디사가 촛농처럼 흐르는 망령을 폴짝 뛰어넘었다.
“잠시, 당황을 해서.”
뎅그렇게 선 그녀가 자신을 걱정할 때가 아닌 듯싶었다. 녹아 버린 망령을 보는 표정이 궁지에 몰린 짐승 같았다. 목이 뜯긴 짐승 하나가 저를 구하겠다고 달려든 꼴이다.
“그, 죽을, 것 같아서.”
낳아 준 어머니 얼굴을 한 망령을 벤 것에 이유를 댄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게 티사가 아니라는 건 저나 그녀나 알지만 정말 실수를 한 건 자신이었다. 그 망령이 죽는 순간에 티사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잘했어.”
그 말로도 부족하다는 걸 아는 라넌의 손이 나디사의 어깨를 꽉 쥐었다가 놓았다.
“네 덕에 살았다.”
그 작은 접촉이, 찰나의 손길이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위안으로 바뀌었다. 어둠이 익숙한 세상이지만 동료의 숨소리를 들으면 걸어 볼 용기가 든다.
“저기, 저쪽이 출구인 것 같아. 빛이 나.”
“다치셨습니까?”
나타난 빛은 보지도 않고 제 상처를 본다. 옆구리에 베인 상처가 있는 모양인데 언제 다쳤는지는 그 망령만이 알겠지. 이 정도는 약만 잘 바르면 되는 터라 맨손으로 상처 부위를 눌렀다.
“너는. 다친 데는 없고?”
“저는 괜찮습니다.”
“나보다 실력이 낫구나.”
“치료를…….”
“여기서 치료를 했다가 돌아가신 내 어머니까지 나오겠어. 무서워서 더 못 있겠다. 나가자.”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출구로 걸어갔다. 그런데 나디사 마로닌은 미적거리며 발걸음을 내딛다가 말았다가 한다. 땅에 떨어진 목줄을 잡으려고 허리 숙인 라넌은 그 어설픈 걸음 모양이 의아했다.
“왜.”
“아닙니다.”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나디사는 뒤에 두기 무서운 상태였다. 목줄을 손목에 감으며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을지 찾아볼 수밖에.
“나디사 마로닌.”
“네.”
“그건 티사가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그것보단 더 못생겼어. 그건 내 추억 속에 사는 예쁜 여자고.”
앞니로 입술을 깨물던 나디사 마로닌이 긴장을 탁 놓고 웃었다. 제 입으로 이런 실 없는 농담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마음 못 잡고 있던 나디사가 긴장을 푼 듯 보이는 게 다행이었다.
“얼른 나가자. 여기서는 며칠이 지났는지 몰라. 나는 나갔을 때 세상이 멸망하지는 않았을까 걱정이다.”
사람 아픈 곳만 콕콕 쑤시는 망령이 죽일 놈이지만 그래도 좋은 점 하나가 있었다. 티사의 망령이 죽을 때 말이다. 제 삶의 양식과도 같았던 집착도 뽑아 냈다.
죽은 사람을 또 죽이고 나타난 나디사 마로닌을 보고 알았다. 자신이 집착하고 지키려 한 것이 라드군이나 신념은 무슨, 기껏 자기 자신이었다는 걸.
출구로 나아가는 나디사를 한 발 뒤에서 바라봤다. 이상하지. 그리 애틋한 사이도 아니면서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싶다니.
티사와는 다르다. 더 아담한 체형이었고, 곱슬기 없는 생머리이며, 다리가 한 뼘 더 길었다. 왜 티사를 떠올렸나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는 것이 화풀이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어, 닮은 건 분위기와 눈밖에 없는 여자를 죽이고 싶어 했다.
그걸 지금에 와서 알면 무얼 할까. 후회를 풀고자 나디사 마로닌에게 잘해 준다고 하더라도 과거는 과거. 지나간 건 지울 수 없었다. 그저 이 마음을 안고 사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반성이었다.
“아…….”
출구로 걸어가는 라넌의 발밑에 압박이 가해졌다. 황급히 발을 든 찰나 라넌은 물이 끓듯 우글거리는 땅이 앞으로 돌진하는 걸 보고야 말았다. 그것이 나디사에게 가기 전에 두 손으로 검을 내리꽂았다.
“억.”
되려 땅에서 그녀가 꽂아 넣은 검이 쑥 올라왔다. 그대로 그녀의 배에 꽂혔다. 펌프를 튼 양 입에서 피가 흘러넘쳤다. 배를 뚫은 검을 천천히 뽑아 내려고 하자 그녀가 박아 넣은 검도 뽑혀 나왔다.
그러니까 거울 공격 같은 거였군. 소멸되지 않은 망령이 땅 밑으로 꺼진 것이었다. 탈출구로 뛰어간 나디사는 아직 이 소란을 모르고 있었다.
이 검을 놓으면 꿈틀거리는 땅속 어둠이 나디사에게까지 간다. 냉정하게 보자면 자신은 배가 뚫린 몸이었다.
“읏…….”
자결하듯이 깊숙이 검을 찔러 넣었다. 땅에 사는 망령의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망령을 죽이기 위해 검을 넣으면 제 배를 찌르는 것도 같이 들어온다.
땅속에 사는 망령의 팔과 다리가 육안으로 보일 듯 말 듯했다. 이처럼 저를 죽이려면 상대의 목숨도 앗아가는 부류의 마법인가 보다.
저 쓸데없이 용기만 가상한 나디사 마로닌이 뒤돌아보면 안 되는데. 구차하게 저 아이를 동무 삼아 죽고 싶진 않았다.
“라넌 경!”
반드시 살아남아서 해야 할 것들이 많았건만. 망령이 죽어 가는 게 빛을 불러오는가. 출구의 환한 빛줄기가 그녀의 몸을 감싸온다.
“출구인 것 같습니다!”
어둠에 잡히지 않은 나디사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빛이었다.
“가…….”
“네?”
뒤돌아보려는 나디사와 검을 내리누르는 동작에 시간 차이가 있었다. 와자작, 깨지며 사라지는 망령의 죽음이 어둠을 데려갔다.
“가.”
빛이 부르는 세상으로 달려간 나디사는 자신이 바란 대로 앞을 택했다.
아, 세상에, 실컷 분이 풀리게 괴롭힌 만큼 마지막엔 멋있으라고 티사가 주는 선물인가. 배에서 흘러내리는 피의 양이 장난이 아님을 느낀 라넌은 웃음이 터졌다.
바닥을 지탱하던 어둠도 깨져 간다. 라넌은 빛이 안아 주는 그녀의 뒷모습을 시선에서 놓아주었다.
깊고 긴 어둠이 그녀를 찾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