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턱으로 미끄러진 땀이 마를 때까지 계속된 웃음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나디사는 그 웃음소리로 남자가 히아신이 아니라는 걸 파악했지만 히아신 흉내를 내는 그것은 연기를 그만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왜 그래, 나디사. 무섭게.”
“속지 않으니 그쯤 해.”
“나야, 히아신. 우리, 꽤 달콤한 사이였잖아.”
말하는 사이사이 웃음을 섞어 넣는 게, 마치 그녀의 기분을 긁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평정심을 잃게 하는 것이 목적일지도 모른다. 분위기를 바꾼 그것은 히아신의 매력적인 미소를 베껴 낸 것처럼 똑같이 해냈다. 공격의 의사가 없다는 듯이 식탁 의자를 꺼내 앉은 그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여기 마음에 들지 않아? 네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가장 아름다운 곳을 가져왔는데.”
“로마.”
“오, 네 도마뱀은 저기에 있어.”
로마를 타고 날아갈 속셈을 알아차린 것처럼 그의 손가락은 조롱하듯 뒤를 가리켰다. 제 뒤에서 얌전히 있던 로마는 허공에 묶여 있었다. 강력한 힘에 눌린 양 날개가 잡혀 움직이지 못했다.
“내가 원하는 건 이야기야, 나디사.”
기만을 놓지 못한 그 남자는 식탁 위에 놓인 촛대에 불을 밝혔다.
“히아신 흉내는 그만해.”
“흉내라니? 나는 진짜인데.”
그러나 말을 하면서도 자신을 비웃는 태도는 사라지지 않는다. 제 그리움에 달라붙으려는 미련한 마음을 싹 비웠음에도 그와 닮은 얼굴이 그녀를 색다른 지옥 불로 데려가려는 듯했다.
뜨거움을 못 느끼는 양 촛불에 손가락을 댄 남자가 발끝을 까닥이며 말했다.
“이런 곳이 아니라 조금 더 낭만적인 곳이었다면 나와 같이 있었을 거야? 속상하네….”
“기만하지 마. 나는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정말로 히아신이 맞는데. 너도 알잖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처음엔 너도 의심했으면서. 정말 히아신인지 아닌지. 그 남자라면 충분히 나타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잖아.”
실수였다. 그가 무어라 도발하든 간에 등을 보인 그 틈에 검을 찔러 넣었더라면 지금쯤 라넌에게 갈 수 있었을 터다. 보여 주어선 안 될, 마음속 연약한 부분을 보였기에 남자가 이리 기고만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 쓰라렸다. 번뇌, 고통, 이별의 슬픔 따위는 알지도 못하는 망령에게 미끼를 던져 주고 만 것이.
“네가 히아신이라면 나와 이러고 있지도 않았겠지…….”
“그래? 나라면 어떻게 하는 건데?”
남자의 연기는 훌륭했다. 그걸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의미 없이 내뱉은 말에 돌아온 대답이 차갑게 그녀의 뺨을 꼬집는 듯했다. 그녀도 실수했지만, 상대도 실수를 했다. 그리움이라는 망상 속에서 만난 적은 생각지도 못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묻지. 네가 히아신이라면서.”
“……나도 궁금한 건 있잖아.”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은 하나가 더 있다. 이 남자는 비록 망상이라고는 하나 자신에게 위해를 끼치기 위해서 이러고 있을 터. 한데 저를 공격하거나 독을 먹인다는 등의 행동을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그저 하는 거라곤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것뿐이었다.
진짜 히아신처럼 보이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인지는 불분명했다.
“나한테 알려 줘, 나디사.”
그의 눈동자에 비친 호기심이 너무도 뚜렷하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이 자리는 그녀를 해하고자 마련된 게 아니라 제 궁금증을 풀고자 하는 거겠지.
그녀의 기억을 엿보고, 연극 공간 같은 곳을 준비해 두고, 어떻게 말을 걸고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내려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디사는 목이 타는 듯했다. 히아신에게 물으면 될 것을, 그에게 묻지 않고 뒤에서 캐내듯이 이러는 것을 보면 혹여 그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답을 찾지 못한 나디사는 땅만 보고 서 있었다. 눈치 빠른 남자는 그새 의자에서 내려와 그녀의 앞까지 걸어왔다. 놀리는 기색이 다분한 남자는 턱을 괴고 앉은 자세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다시 돌아오겠다고 너한테 약속이라도 했었지?”
“…….”
“다시 돌아갈 거라고. 그렇지?”
만들어진 밤하늘에 속을 뻔한 나디사는 순간 눈이 뜨였다.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히아신과의 마지막 장면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 참이었다.
자신은 창문에 기대 서 있고 그는 한적한 거리에 있다. 다시 돌아올 것처럼 웃으며 손을 흔든 그 장면을 기억할 수밖에. 그렇다고 그걸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로 해석할 순 없었다. 히아신은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으나 모두에게 의심을 받는 것일지도 모르지. 돌아가도 그곳에서 즐겁지 않았겠구나. 아니면 제 누명을 벗기기 위해 이 사람을 보낸 거였나.
“응? 말을 해 줘. 궁금해서 그래.”
“알고 싶어?”
“무척.”
“알겠어. 그건 말이지…….”
히아신과 닮았지만 결국 그게 다였다. 히아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그를 건들지 못하겠다는 두려움과 정면으로 맞설 수 있었다.
쥐고 있었던 검을 그의 어깨에 꽂아 넣었다. 살을 파고 들어가는 느낌은 선명했으나 남자는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는다.
“이런.”
동작이 느려진 남자는 검이 꽂힌 부위만 눈으로 흘긋 바라보았다.
“당했네.”
초연한 말을 끝으로 남자의 몸이 돌처럼 굳어 갔다. 세월이 지나 가루로 부서지듯이 그의 몸을 이루고 있던 망령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아름다운 별 밤도, 아직 그곳에 있을까 궁금한 작은 집도, 포근한 언덕도. 보잘것없는 바람이 되어 그녀의 옆을 스쳐 가고 있었다. 다 떠나 버린 공간에 어두운 밤이 오자 풀려난 로마가 그녀의 옆으로 왔다.
“가자, 로마.”
그에게 검을 박아 넣었다. 그건 히아신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녀에게는 같았다. 히아신이 적으로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녀는 그에게 검을 박아 넣음으로써 간단하고 어려운 답을 내렸다.
한 줌의 바람으로 사라져 버린 그 기억은 지금처럼 그녀에게 어둠만 가져다줄 뿐이었다. 돌아갈 수도, 돌아가서도 안 되는 그 기억을 제 손으로 놓아준 것이었다.
기억에서만 살던 남자가 눈앞으로 나타났을 때, 그리고 그 남자를 제 손으로 찔렀을 때.
마음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까 위를 보았지…….”
무엇 하나 답이 없어 보이는 그 땅에서도 라넌은 답을 찾아냈다. 그녀처럼 위를 바라본 나디사는 모든 것이 똑같아 보이는 어둠에서 하나의 다른 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저기만 희미한 것 같아. 그렇지?”
로마는 등을 굽혀 뒤에 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래, 가자.”
답을 찾아 날아오르는 나디사의 머릿속은 이 어둠과 닮아 있었다. 유일하게 밝은 부분으로 들어간 나디사는 거센 바람을 느꼈다. 이곳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바람의 모양이 손처럼 변해 그녀의 옷가지나 머리칼을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더 빠르게.”
등 뒤에 히아신을 두고 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저의 진입을 방해하는 바람까지 그 과거로 돌아가 살라는 것처럼 잔인했다. 나디사는 그에 뒤지지 않는 속도로 날개를 펴며 달려갔다.
“거의 다 왔어, 로마.”
그 통로를 빠져나가는 끝이 다가왔을 때였다. 땅으로 떨어진 나디사의 시선에 빛나는 금발이 걸렸다.
“라넌 경!”
검과 검이 부딪히고 있었다. 라넌을 공격하고 있는 상대는 다름 아닌 나디사 자신이었다. 자신이 히아신의 망상에 시달리는 것처럼 라넌도 시달리는 듯했다. 다행히 라넌은 날아오고 있는 나디사를 발견한 듯이 깊게 팬 미간을 폈다.
왜 그녀의 상대가 자신의 탈을 쓰고 나타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상한 것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마음이 불안으로 기울어진 만큼 나디사의 착지는 불안정했다. 옆으로 구르듯이 땅으로 내려온 나디사는 뛰어내려 로마의 다리가 부러지진 않았는지부터 확인했다.
“나디사!”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본 그녀는 어둠의 편인 적의 얼굴을 보았다.
저건 자신이 아니었다.
“정신 차리고 이리로 와!”
티사 레나이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