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손써 볼 틈도 없이 라넌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로서는 라드 위에서 내려와 한 바퀴 돌고 있는 사이 없어진 셈이었다.
“라넌 경.”
그녀의 목소리가 무겁고 칙칙한 땅바닥으로 흘러 들어갔다. 라넌이나 저나 함정에 빠졌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머리에 두통이 일었다.
로마의 목을 안다시피 해 뛰어갔으나 보이는 거라곤 어둠, 또 어둠뿐이었다.
만에 하나 로마마저 없었다면 졸도하고도 남았으리라. 들어왔던 통로로 다시 나가 보려고 했으나 문이 닫힌 것인지 길이 사라지고 없었다. 까만 무언가밖에 없는 공간에 버려진 기분이 아주 끔찍했다. 라넌의 이름을 한 번 더 부르려고 배에 힘을 준 차였다. 시선을 느낀 뒤통수가 근질거렸다. 뒤에 누군가가 있음이었다.
사람의 기척을 감지한 로마가 날뛰지 않게 목줄을 쥔 채로 등을 돌렸다.
“아…….”
개죽음당할 수는 없다는 마음 하나로 버텨 냈건만 이 말도 안 되는 풍경은 무어란 말인가. 라넌에게는 미안한 소리였겠으나 그녀가 다치거나 아픈 모습으로 나타나는 게 덜 놀라웠을 거다.
어둠에 치인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름다운 별 밤이었다. 나디사는 어정쩡하게 검집을 쥐고 있던 손힘을 풀었다. 발바닥이 간지러운 듯하여 밑을 내려다보니 들쭉날쭉 자란 검푸른 풀이 있었다. 이런 풀, 이런 밤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 않은가.
“하.”
여기는 적이 그녀를 속이고자 만들어 낸 공간이었다. 그러니 꿈에 나올 법한 장소가 눈앞에 있다는 건 제 그리움을 들켰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잊을 수 없는 그때의 밤이 펼쳐진 풍경과 자그마한 붉은 지붕의 집.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창에서는 희미한 불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건 속임수야.”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속아 넘어갈 것 같았다. 따듯함을 뭉쳐 만든 듯한 그 집으로 향한 나디사는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눈이 매웠다. 어떻게 속임수라지만 바람의 냄새마저 똑같이 만들 수 있을까.
마음이 과거에 잠겨 어수선해진 그 시각.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디사의 손은 문고리를 잡았다. 당기는 그 찰나까지 엄청난 망설임이 들었으나 막상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풍기는 스튜 냄새를 맡았을 때에는 잠잠히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왔어?”
쓰러지지 않으려고 문고리를 움켜잡았다. 어제 보고 오늘도 본 양 웃고 있는 히아신이 있었다. 빵을 반죽한 것인지 뺨과 옷 군데군데가 희었다. 인사 없이 저를 떠난 사내로는 보이지 않는다. 과거에 살던 그 남자를 그녀의 눈앞에 똑 떼어 내다가 붙인 것 같았다.
“안 들어와?”
“…….”
“나 추워. 문 닫아 줘.”
정녕 저 바깥에서 낮잠이라도 든 것일까. 공주고 전쟁이고 피고 뭐고 다 그녀가 꾼 한낱 꿈이었을까. 로마는 집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하고 앞에 엎드려 있었다. 문을 닫지 않고 천천히 안으로 발을 들이는데 환영 같은 사내가 말까지 걸어 온다.
“안 그래도 지금 부르려고 했는데. 내가 보낸 마음을 읽은 거로구나.”
이게 무엇이든 신중하자 싶어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빼 둔 의자에도 앉지 않고 뚱한 얼굴로 그를 지켜만 보았다. 히아신은 말을 하다가 말고 무언가 생각난 듯이 뛰어가 화로에서 구운 빵을 꺼내왔다. 이어서 노란 찬장에서 접시를 찾는 그의 모습에 눈가가 떨렸다.
“내 뺨에 뭐가 묻었…… 아하.”
제 뺨을 손등으로 문지른 히아이 희게 묻어나는 가루들을 발견했나 보다. 드디어 나디사가 저를 빤히 바라보는 이유를 알았다며 히아신은 닦기를 멈추었다.
“이따가 닦아 줘, 나디사가.”
고유의 말투와 목소리도 따라 할 수 있는 것일까. 히아신을 볼 일은 두 번 다시 없다 생각하고 살아서인지 두려움과 반가움이 티격태격하다가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두려움은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했고, 반가움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느라 바쁘셨다.
잘 만든 조각상을 보는 기분으로 계속 보기만 했더니 장난기 가득한 미소로 히아신이 다가왔다. 나디사는 열어 둔 문 쪽으로 뒷걸음질하며 그를 피했다.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으니 히아신은 의아한 얼굴이었다.
“나랑 놀자는 거야? 술래잡기? 아니면…….”
“히아신.”
그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였다. 여기는 적진이고, 그는 적진의 중요한 인물처럼 말하곤 했으니. 그가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온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설령 자신의 살을 파먹는 짓일지라도 나디사는 그에게 말 거는 행위를 멈출 수 없었다.
“불러 놓고 왜 말이 없을까.”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따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 내린 히아신의 눈썹 끝이 위로 들렸다. 들켰다는 얼굴, 아니면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얼굴. 저를 조롱하기 위해 만들어 냈을 게 분명한 이 작은 집은 존재 자체로 상처가 됐다.
“오늘은 식사 못 하겠다. 나 열심히 만들었는데, 응?”
“……네가 정말로 히아신이라면.”
“내가 두 사람이라도 돼? 그러면 나디사는 좋아 죽겠지만, 나는 조금 피곤하겠어. 나디사를 두고 경쟁하는 나라니. 지금도 엄청 고달픈데 말이야.”
말하는 내용이 너무 히아신이 할 만한 것들 뿐이라서 듣는 중에도 헷갈렸다. 만약 이게 자신이 만들어 낸 환상이라면. 저가 그 나쁜 놈을 반 미치도록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여기서 서서 계속 얘기할 거야? 스튜에 아무것도 안 탔긴 했는데 먹기 싫다면…….”
“먹기 싫어.”
“그러면 차는?”
“그것도…….”
“이건 아무리 나라도 상처받는다. 나랑은 차도 먹기 싫어?”
제 기억을 훔쳐 이런 환영을 만들어 낸 사람이 있다면 맹세코 가만두지 않을 거였다. 분한 마음에 나디사는 손톱이 파고들도록 주먹을 쥐었다. 마지막을 머릿속에서 집어치우고 싶게 만들었으면서 그는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은 것처럼 웃고 다정하게 굴다니. 실제라면 때려 줄 것이었고 상상이어도 조금 아프게 해 줘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그는 퍼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나디사의 손을 잡았다. 살과 살이 닿고 나니 가슴은 용서라도 한 것처럼 고동치고 있었다. 한겨울에도 따듯한 이건 히아신의 손이 맞았다. 그 감촉이 남달라 나디사는 새끼손가락만 움직여 그의 손바닥을 굼벵이처럼 쓸어내렸다.
“거칠어졌다, 나디사.”
“너…….”
제 손에 피가 통하도록 주무르는 히아신을 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눈물을 허락할 바엔 싸우는 게 낫다.
열정적으로 손을 주물러 주는 히아신의 목에 저가 선물해 준 시계가 걸려 있었다. 힐끔힐끔 눈치 보듯 그녀를 보다가 시선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챈 히아신은 그 길로 곧장 제 목걸이를 풀었다.
“나 이거 간직하고 있었어. 나디사가 선물해 준 거지?”
“…….”
“안도 바깥도 매일 닦아. 보고 싶었어, 나디사. 이제 들어와. 우리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잖아.”
나디사는 소중히 가꿨다는 그의 말을 보증하듯 광이 흐르는 시계를 눈으로 더듬었다.
“그런데, 히아신.”
“응?”
“시계. 다른데.”
이름이 적힌 위치가 다르다. 그녀는 저 위치에 히아신의 이름을 적어 두지 않았다. 손목이 잡혀 문 안으로 끌려가던 나디사는 반대편 손으로 검을 쥐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름?”
어서 들어오기를 바라듯이 간절한 눈빛을 보내던 그가 픽 웃었다. 그 순간 표정이 보이지 않게 등을 보인 히아신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 속상하려고 그러네.”
“너, 왜 내가 해 준 이름하고 달라.”
“그러니까 무슨 이름.”
그녀는 장인에게 부탁해 시계에 히아신의 이름을 박아 두었다. 그 전의 시계에는 그의 어머니 이름이 박혀 있었고. 그런데 그가 찬 시계에는 그의 어머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응?”
원래의 히아신이라면 무슨 이름을 말하는지 알아먹고도 남음이었다. 고개를 양옆으로 절레절레 흔든 히아신이 시선을 바로 내렸다. 시계를 훑는 그의 건조한 시선에는 실수를 잡아내려는 집요함만이 남아 있었다.
“하, 하…….”
뒤이어 들려온 웃음소리엔 그만의 따스함이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