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56화 (156/210)

156화

긴장된 나디사의 마음을 모르는 것처럼 라넌은 일말의 주저함 없이 풋, 하며 웃었다. 조금 통쾌해 보이기까지 한 그 미소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글쎄. 내가 무얼 안다는 걸까. 네가…… 내 오랜 친구의 딸일지도 모른다는 것?”

라넌은 제 입으로 밝히게 된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표정이 굳어 버렸다. 지난 세월을 알지 못하는 나디사는 그녀와 티사의 관계가 어떤지 짐작할 수 없었다.

진실을 말해 두는 것이 도리어 악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찰나 라넌이 예상 밖의 행동을 했다.

적이 부른 벼락이 치는 땅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라넌은 시선을 무시한 채로 그녀에게 담배 하나를 권유했다.

“하겠어?”

“……아니요.”

“그래. 그럼 나도 묻겠어. 네가 진짜 티사의 딸인가?”

“아마도요.”

“아마도, 는 너무 애매한 답인데.”

모르긴 몰라도 그간 라넌 샤스는 출생의 비밀을 밝히기 싫은, 매우 위험한 경계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고 있던 짐을 놓은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진 것은 왜일까.

크게 기대하진 않았지만 정말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라넌을 보아서 그런 걸까. 저 사람에게 밝혀도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는구나. 나의 걱정만큼 그렇게.

제가 만든 담배 연기를 응시하는 라넌의 시선은 먼 과거에 있는 듯했다. 그녀의 담배 끝이 타들어가는 걸 지켜보고 있던 나디사는 하고 싶은 말을 마저 했다.

“그 사람의 딸로 살아간 세월보다 다른 사람의 딸로 살아간 세월이 깁니다.”

“그래서 아마도, 라고 말하고 다니나.”

“그럴지도요. 그것보다 라넌 경.”

“왜.”

“혹시 알고 계십니까. 티사 레나이 씨가 왜 자살하셨는지.”

사사로운 감정 없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위해 선택한 호칭이 라넌의 표정을 싸늘하게 했다. 그녀에게 불만 많은 시선을 보낸 라넌은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나도 알고 싶군. 네가 그 티사 레나이 씨의 딸이 아닌가. 내가 너한테 묻고 싶은 거였는데.”

“라넌 경도 모르신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때 다 피지 않은 담배 한 개비를 바닥에 버린 라넌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벼락이 우는 지점을 노려보는 그녀의 눈빛이 비정해졌다.

“아무래도 산 사람한테는 들을 수 없는 모양이니. 언젠간 만나면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어.”

말을 마친 라넌이 보여 준 미소는 그녀답지 않게 시원했다. 그녀에게 물으면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한 물음이 더 많은 물음을 안고 온 기분이었다.

“저 번개는 수상해. 계속 같은 패턴으로 치고 있어. 시간, 모양. 저 벼락 하나만 똑같아.”

그렇다. 라넌 샤스와 저 사이에는 이 정도의 이야기가 적당했다. 그녀는 현재 티사의 동료가 아니었고, 자신도 현재 티사의 딸이 아니었으니. 그걸 확인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그녀가 알지 못한다고 하면, 그녀에게는 더 궁금한 것이 없는 것처럼.

남은 감정 처리는 저 자신이 해결해야 할 몫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지나간 일에 발목 잡히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고야 마는 것. 그게 미련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 미련이 밉고 싫지 않았다. 어떤 여자의 다른 얼굴을 보았다. 그것만으로 미련의 가치는 충분했으니 말이다.

* * *

이런 감정은 처음인 것 같았다. 붉은 하늘로 오르는 동안 라넌은 첫 비행을 하는 그때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티사 레나이와 똑같이 생긴 여자가 말했다. 아마도 그녀의 딸인 듯하다고. 그러나 정작 티사에 대해서는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니 자신이 오해한 것만큼 애틋한 관계는 아닐 거다.

다시금 그걸 깨닫는다.

죽은 사람에게는 끝이 있지만, 산 사람에게는 죽기 전까지 끝이 없다는 걸. 티사는 미움과 후회를 갖고 죽었겠지만, 그게 라넌 자신에 대한 감정의 끝이었겠지만. 본인이 낳은 딸에게도 애정을 받지 못하는 그녀를 생각하자 감정적인 사람이 아님에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 오랜 세월의 증오가 까고 보니 그리움이었다는 걸. 해명 없이 저를 이 세상에 두고 떠나 버린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다는 걸. 나디사 마로닌이 말하는 걸 들으며 그러한 생각을 했다.

‘라넌. 너는 분명 좋은 부모가 되겠지.’

‘뜬금없이 찾아와 그게 무슨 소리야.’

‘좋은 집안에, 좋은 교육에, 훌륭한 남편을 둘 수 있잖아.’

사고만 치고 다니는 티사가 오랜만에 찾아와 한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 자신이 바랐던 것은 그녀가 변한 이유와 진심 어린 사과였다. 그 둘을 뺀 나머지는 들을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자식을 가질 나이가 되니 보이는, 창백한 피부와 제 잘못을 뉘우치는 눈빛. 그리고 주저하는 목소리 같은 것들. 동료들의 싸늘한 시선을 이겨 내고 저를 찾아온 것만 해도 그녀는 사과하고 있던 것이었다.

‘웃긴 소리를 하네, 티사.’

그 사과는 너무나 연약해 입으로 꺼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찬바람이 부는 라넌을 눈앞에 두고도 그녀는 마지막까지 힌트를 줬다.

‘나는 고아에, 마땅한 가족도 없잖아. 거기에 남편까지 없으면 아이를 키우는 건 아무래도 무리겠지. 그 아이도 힘이 들 테고.’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아무리 내가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말하는 거야.’

‘뭐?’

기억은 몇 번이고 꺼내서 다시 볼 수 있기에 그 대화가 길고 자세한 것 같지만 당시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던 순간이었다. 그녀에 대한 미움이 숨긴 이 기억은 오늘날에 와서도 라넌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 제게서 조언을 얻지 못한 티사는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자들에게 나디사를 맡겼겠다. 그녀의 바람대로 좋은 가정,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는지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티사의 분신처럼 아름답고 강하게 자라났다는 것이었다.

임신을 축하받을 수 없는 자리에 서서 죽음을 받아들였겠지. 친구라는 자신에게 진실을 전해 보려고 해 봤겠지. 하지만 그 시기의 자신은 티사를 더 쓸쓸하게 했을 뿐이었다.

너의 죽음은 무척 외롭고 추웠겠다. 너를 미워하던 나날 속에서도 그런 죽음을 바란 적은 없었는데.

하얀 벼락에 가까워지자 그곳에 있는 커다란 통로가 보였다. 자연 현상이 아니라 그들을 눈속임하기 위한 장치였을 터였다.

도착이 머지않은 라넌은 뒤돌아 나디사를 바라봤다. 무사히 따라오고 있는 그녀는 그 시절의 그녀가 살아온 것만 같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과거 그녀가 알던 티사의 빛을 흡수한 것처럼 저 여자는 눈이 부셨다.

증오에 몸을 담근 세월 동안 보지 못했던 것. 저렇게 빛이 나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 시절의 티사를 외면한 죄였다. 책임감 없는 소수 종족을 벌할 것이라고 했지만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저일지도 모른다.

벼락 중앙에 난 통로로 들어오고 앞길을 밝혀 주던 빛을 빼앗겼다. 어둠 위에 내려앉은 라넌은 라드의 목줄을 놓았다.

벼락 위에서 저희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그 만악의 근원을 찾느라 그녀의 고개가 돌아가는 사이 뒤따르던 나디사의 착지 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해.”

“네.”

“여기는 그 여자의 공간이다. 뭐가 나올지 몰라.”

꼬박꼬박 나디사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게 신경이 쓰였다. 어둠에 익숙해져 가는 라넌의 시야가 넓어진 그 순간이었다.

대답이 들려오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멈추어 선 나디사의 등을 보다가 조심히 허리춤에 찬 검을 쥐었다.

“나디사 마로닌.”

그러고 보니 그녀가 타고 온 라드가 보이지 않는다. 라넌의 부름에 답하듯 고개를 천천히 돌린 나디사의 입술 끝이 휘어져 있었다.

달라진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낀 라넌이 그녀에게 물었다.

“누구야.”

언제부터 갈라지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눈앞에 있는 나디사가 아니라는 것. 나디사의 얼굴을 닮은 그것은 사람 둘이 섞인 목소리를 냈다.

“네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게 될 얼굴이다, 라넌 샤스.”

망령의 게르나. 정나미 떨어지는 그 이름의 맞게 준비해 둔 것도 재수 없기 그지없다. 그러나 라넌은 웃으며 그 망령을 맞아들였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게 될 얼굴이 티사를 닮았다면, 그것은 그녀에게 나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