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혓바늘이 돋아난 것처럼 표면이 거친 손수건이 그녀의 이마를 닦아 냈다. 그 덕에 의식이 돌아온 나디사는 떨어지던 장면이 떠올라 후다닥 눈을 떴다.
“여기가.”
몸이 냅다 날고 보는 그녀에게 반기를 들 듯 말을 듣지 않는다. 적에게 당할 가능성을 생각하자 심장이 오르내리며 그네를 탔다.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손가락을 움직여 보려는 순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움직이지 마.”
무사히 탈출하고 있어야 할 라넌 샤스의 목소리였다. 나디사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숙련된 손길로 그녀의 손과 발을 주물러 주고 있던 라넌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언제부터 몸이 이랬지?”
“…몸이 어떤데요.”
“피가 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차갑군.”
나디사는 얼음처럼 느껴지는 손을 무리해서라도 까닥여 보였다. 다행히 힘을 주니 움직이긴 하지만 어디를 보아도 검은 하늘은 적응되지 않는다.
“저건 번개인가요.”
하늘을 쩍 가르는 붉은색 번개가 예사롭지 않았다. 나디사에게서 물수건을 거둔 라넌이 말했다.
“본다고 달라지는 거 없어. 커다란 망령에게 잡아 먹혔으니 여기는 배 속쯤 되려나?”
웃기려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진지하게 하는 말인지 구분할 수 없었던 나디사는 통증이 낫는 느낌에 윗몸을 들었다. 속에 난 불을 라넌이 꺼 준 듯했다.
“약을 먹였어. 이거 갖고 있어. 이제 너도 필요할 테니.”
얼떨결에 가루약이 든 병을 받은 나디사는 떠나는 라넌의 등에 대고 아까 하지 못한 말을 뱉었다.
“감사합니다.”
“물에 타서 먹어. 바보처럼 그냥 먹지 말고.”
확실히 라넌은 망령의 손길에서 탈출할 수 있는 상공에 있었다. 이리로 다시 돌아온 것은 저 때문인가. 약이 든 병을 쥔 나디사는 조심해서 몸을 일으켜 봤다. 가슴을 누르던 통증이 사라지고 나니 머리가 개운해졌다. 잡생각에 시달리던 건 몸이 나빠서였을 수도 있겠다.
“네가 자는 동안 한 바퀴 둘러봤는데 어디를 가나 똑같아. 하지만 내 라드가 하는 것을 보면 그 망령을 부리는 여자도 이 안에 있는 게 분명해.”
간략한 상황 요약을 들으며 나디사는 주머니에 받은 약을 집어넣었다. 희망이 있다는 소리였다.
“찾아보겠습니다.”
“부디 그래 주길 바라.”
라넌이 여기 있지 않았다면 그녀는 혼자서 죽어 갔을 거였다. 사람 간 떨어지게 쳐 대는 붉은 벼락에 맞았을지도 모르지.
본인의 라드와 걸을 준비를 하는 라넌을 바라보던 때에 로마가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어깨가 눌리도록 코를 비비적거리는 걸 보니 죽을까 봐 걱정했나 보다.
“걱정했지.”
저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해야 하는 듯해서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녀가 로마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진정하는 사이 라넌이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 바퀴 날아서 주위를 돌아보려고 했는데 이 벼락 때문에 나는 것은 힘들겠어. 걷다가 유인하는 방법을 쓰자. 어쨌든 저쪽도 우리를 죽이려고 애를 쓰는 듯하니.”
“네.”
“지원은 기대 말자고. 우리는 나갔을 때 아군이 전멸하지만 않았으면 하고 기도나 올리자.”
그녀의 말과 표정은 쌀쌀맞았지만 저를 위하고 진정시키려고 하는 듯하게 들렸다. 물 자국이 남아 있는 이마를 가만 매만지던 나디사는 주머니 속에 든 약병의 무게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가자.”
출발하기 시작한 라넌의 뒤를 쫓아서 갔다. 벼락 말고는 들리는 소리가 없었지만 나디사의 마음은 오전의 숲길을 걷는 양 평온했다.
라넌의 옆에서 느낀 첫 평온이었다.
말없이 언덕을 넘어와 삼십 분을 걸었을 때였다. 어쩌다 나오는 언덕 빼곤 색깔, 하늘, 무엇 하나 달라지는 게 없는 땅. 앞을 보고 걷기만 하는 게 무료해질 무렵 라넌이 고개를 뒤로 꺾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연히 나디사의 시선도 위로 떠나갔다.
빨간 벼락이 치는 하늘은 예술적 관점에선 아름답다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라넌은 그녀와 다른 것을 본 모양이었다.
“하늘이 달라.”
“어떤 점이요.”
“점점 땅으로 오는 것 같지 않아?”
하늘이 가까워지고 있다. 평범한 하늘이어도 기함할 것인데 저건 벼락이 치는 하늘이었다. 아무래도 그 여자는 그들을 튀겨 죽일 생각인가 보다.
나디사는 방법을 찾고자 라넌과 눈을 마주쳤으나 그녀는 생각보다도 더 침착하게 이 상황을 대하고 있었다.
“죽기 직전엔 나타나겠지. 내가 죽기 전에 죽이면 돼.”
“…대단하십니다.”
“왠지 비꼬는 걸로 들리는데.”
라넌은 더 나아가 봤자 소용없겠다며 꽉 죈 라드의 목줄을 놓아주었다. 라넌은 그 자리에서 흙냄새가 나지 않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디사는 어디에 앉아야 좋을지 몰라 멀찍이 서 있기만 했다.
“그래. 너 자는 동안 내가 보초를 섰으니. 이번엔 네가 서.”
“제가 몇 시간이나 잤습니까.”
“글쎄. 재 보지는 않았지만 하루?”
하루라면, 꽤 오래 기절해 있었다. 저뿐만 아니라 라넌의 목숨까지 위태로울 뻔했다는 생각에 질끈 눈이 감기려는 찰나 라넌의 말이 가슴을 찔렀다.
“자책할 시간에 약이나 더 먹어 둬. 기운 떨어질 시간 됐어.”
“… 아까 먹이셨다고.”
“하루에 한 번은 먹어. 비싼 약이니까. 앞으로 네가 버는 봉급의 많은 부분을 그 약에 투자하게 될 거야. 진정한 라드군이 된 걸 환영한다.”
그렇게 비아냥거리듯 말하곤 라넌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물병을 그녀에게 던졌다. 정확히 받아 낸 나디사는 물병에 적힌 그녀의 이름을 눈으로 읽었다.
상시 가지고 다니는 비싼 약과 물. 이걸 라넌도 복용 중이라는 뜻이었다. 부담스러운 챙김을 받게 된 나디사는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 나왔다.
“동료가….”
보답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래도 입은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사라져서. 두고 떠난 라드가 있는데 저랑 연결되면서부터…. 저도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원래도 통증은 있었지만요.”
라넌은 그녀의 말을 끊지 않고 듣다가 리듬 타듯 손바닥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생각에 잠긴 듯한 멍한 눈이 된 라넌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희 종족에 내려진 게 축복이자 특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저주일 수도 있지.”
“…그렇습니까.”
“여기를 나가게 되면 그 동료가 버리고 갔다던 라드는 죽여라.”
이럴 걸 각오는 했다만. 라넌의 비정한 말에 씁쓸함을 감출 길이 없다. 그것이 크게 보면 맞는 말일지라도 저를 따르는 디디의 목에 칼을 꽂는 건 불가능했다.
“그건 타고난 재능으로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야. 너희 종족이 능력은 뛰어난 반면 수명이 짧은 건 알고 있지.”
“…하지만.”
“본인 몸 하나 못 챙기면서 남을 위하는 것도 물려받은 건가? 아니면 그것도 종족의 특성?”
차게 비웃는 라넌의 말에 가시가 있었다. 그 가시에 묶인 나디사는 말이 없어졌다. 라넌이 변한 이유를 그녀가 은연중에 말하는 듯했다. 물려받는다는 말. 알고 하는 말인 듯했다. 하지만 라넌은 감질나게 거기서 입을 닫고 일어섰다.
“네가 약을 먹고 나면 둘로 나뉘자고. 나는 저쪽, 너는 저쪽으로 걸어가. 만일 우리 둘이 만나게 된다면 같은 곳을 돌고 있는 거겠지. 신호는 라드의 울음소리로 한다. 그걸 들으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라넌의 말에 답하지 않고 끄덕이기만 한 나디사는 물병을 입 쪽으로 기울였다. 한 손으로 라넌이 준 약을 끄집어내던 그녀는 어디선가 바람의 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마음이 말하는 걸 업어 온 바람의 소리.
지금이 아니면, 물을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라넌 경.”
“벌써 다 먹었나?”
“티사 레나이를 아십니까.”
안장주머니를 열어 비상식량으로 보이는 것을 꺼내던 라넌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표정이 변하는 장면을 놓치지 않은 나디사의 입술 모양이 지금 눈앞에 있는 라넌과 똑같을 것이었다. 금기를 깬 기분이었다. 겨울부터 이어져 온 그녀와의 암묵적인 금기를. 밑바닥에서 서로를 찌르고만 있었던 그 금기를.
“네가 그걸 왜 묻지?”
마음에 차지 않은 답변이지만 어차피 한 번쯤은 거절당하지 않을까 했다. 나디사는 히아신과 같이 있는 사이 그를 닮아 버린 것 같다는, 말 같지도 않은 생각을 해 버렸다.
“아시잖습니까. 제가 왜 묻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