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저녁의 숲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여러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라드 두 마리와 사람이 지나갈 수 없는 비좁은 길의 연속. 해서 사람이 먼저 걷고 라드들은 뒤를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나마 단서가 되던 핏자국은 어느 순간에 끊겨 버렸다. 나디사는 족히 한 시간을 걷는 내내 라넌의 뒤통수만 보고 있었다.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딴 곳으로 생각이 빠져나간다.
제 출신을 알고 있는 첫 번째 신관. 그건 자신의 출생 이야기에 그 남자가 관련이 있다는 뜻일 테지.
“나디사 마로닌.”
친모의 끝이 좋지 않았으니 그 이야기가 아름다울 거라고 기대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부모를 비롯한 남은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할까 걱정이었다.
“마로닌.”
제 눈썹이 처지는 것도 모르고 있을 때 그녀는 무언가에 부딪혀 강제로 걸음이 멈춰졌다.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지?”
지쳐 보이는 얼굴의 라넌이 목소리 끝을 높였다. 실책도 이런 실책이 있나. 목숨을 내놓고 들어온 상황인데 산책 나온 양 풀어져 있었다. 자세를 바로 추스른 나디사는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합니다.”
“그게 네 마지막 유언은 아니길 바랄 뿐이다.”
그 말을 끝으로 남은 거리를 가늠해 본 라넌은 다그치기를 포기한 듯했다. 적진 한가운데로 온 것도 아닌데 어깨가 굽을 만큼 싸한 기운이 몸에 붙어 온다. 라넌이 예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안 나디사는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길은 여기서 끝나는데. 저 앞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라넌은 제 감을 믿어 보기로 했나 보다. 걸리적거리는 수풀을 치우며 걷는 라넌의 모습은 저와 비교가 안 될 수 없었다.
“뒤를 감시해.”
“네.”
알맹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한 나디사는 로마의 목줄을 잡고서 후방을 감시했다.
스스, 사사. 수풀이 우는 소리만이 빽빽했다. 숲을 뒤지는 라넌의 얼굴은 군인의 귀감으로 삼을 만큼 절실하고 진지해 보였다.
자신은 무슨 문제가 생긴 건지 그녀처럼 나서지 못하겠다. 감시자나 방관자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단서를 찾기 위해 흙을 파내던 라넌은 일이 잘 안 풀리는 듯 가다가 멈추어 서기를 반복했다.
“왜 그러지.”
“무엇이 말씀입니까.”
“지금 일을 나 혼자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드나? 심지어 나보다 계급도 낮은 네가 말이야.”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넌이 조금 상냥해졌다고는 해도 그녀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 법이었다. 저 표독스러운 눈매로 자신을 노려보면 발과 몸이 굳고 만다.
밤 사냥에 나선 들짐승의 발소리가 드문드문 들리는 숲에서 라넌은 천천히 장갑을 벗었다.
“그 늙은이가 뭐라고 했나 보지?”
“…아닙니다.”
“아니면 근무 태만이라는 건가? 차라리 그 노인이 네 출생의 비밀이라도 밝혔다고 하지 그래.”
정확한 지적을 하는 라넌의 말을 경청했다. 무어라도 알고 저런 말을 하나 싶었지만 라넌은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단칼에 잘라 냈다.
“그게 아니면 움직여.”
대화할 의지가 없음을 밝힌 라넌이 손가락으로 출발의 신호를 보냈다. 라드들이 길을 막지만 않았서도 그녀를 따라가려고 했다. 적군을 발견한 것처럼 라드는 발톱을 땅에 박아 넣었다.
“앞에 뭔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알아. 집중하기나 해.”
“네.”
“느낌이 안 좋더니.”
라넌의 말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길이 끊긴 모양이 상당히 부자연스럽다. 기억은 선명하지 않으나 저번에 왔을 땐 길이 끊기거나 막힌 곳이 없었다.
사냥한 노루를 들어 올리던 히아신에 대한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가던 차였다. 건너편에서 까만 짐승 같은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로마!”
“바람을 불게 해.”
라넌과 연결되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말을 했다. 영민한 라드들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나무 꼭지까지 떠서 날개를 펼쳤다.
“지금!”
머리 위에서 험하고 거센 바람이 불어왔지만 주인들은 다리가 부러질세라 버텨 냈다. 바람이 시야를 가리지 않게 팔을 들고 서 있던 라넌이 그 난장판 속에서 외쳤다.
“저기 있다.”
공교롭게도 나디사는 보지 못했다. 바람에 쓰러지고 휘어지는 나무들만이 보일 뿐. 라넌은 아무런 말 없이 허벅지에 차고 있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바람에 머리채 잡힌 나무 사이로 던지려는 자세였다. 그 순간 눈이 어두운 나디사조차 알아차릴 정도로 허공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라넌 경.”
“조용히 해.”
바람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마치 베일을 벗겨 내는 것처럼 허공이 투명한 껍질을 벗었다. 한 사람의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윤기 나는 검은색의 머리칼이 처음, 다음으로는 상대의 손이 보였다.
“이런….”
어린아이 목소리 같기도 했으나 이윽고 드러난 건 성년의 여자였다. 평범한 여자는 아니었다. 수백 마리의 하얀 식탁보 같은 것이 여자 주위에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긴 했다. 하얗고 투명한 그것에 눈, 코, 입이 달려 있었다. 절규하는 표정을 짓는 그 망령의 손에 든 건 그들이 애타게 찾던 왕족들이었다.
“조용히 가려 했는데 들켜 버렸잖아. 저 바람 좀 그쳐 줄래. 우리 아이들이 싫어해.”
“망령의 게르나로군.”
라넌이 이름을 말하자 여자는 기쁜 듯이 실실 웃어 댔다.
“나 그냥 보내 주면 안 될까? 얘네들 보기보다 무거워. 여기까지 끌고 오느라 힘이 들었단 말이야.”
여자의 말만 들어 보면 잘 지나가던 사람을 괴롭히는 줄 알겠다. 왕자와 공주가 흰자만 보인 채로 망령의 손에 들려 있지만 않았어도 여자의 말이 우스웠을 것이다. 떠보는 여자의 말투가 거슬렸는지 라넌은 손을 위로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라드가 날갯짓을 멈추었다.
“로마.”
나디사도 라넌과 같이 로마의 바람을 멈추게 했다. 숲에서 조용히 살다가 봉변을 당한 수풀들이 진정하고 땅에 가라앉는다.
베일을 벗겨 낸 망령의 게르나.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는 그녀는 당당하게 보내 주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라넌은 반대편에 들리지 않게끔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전투 준비해.”
“네.”
적을 눈앞에 두자 마음속 상념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검집을 잡는 그녀의 행동을 보더니만 여자의 앳되던 인상이 달라졌다.
“그런 선택을 한 거야? 나는 싸우기 싫었는데.”
라드군이 앞에 있는데도 자신만만한 그녀의 표정이 불길하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늘 그녀의 편이던 바람이 이별을 앞둔 연인처럼 싸늘했다.
높은 긴장감에 시달리던 나디사는 망령들이 손에 손을 잡는 것을 보며 걸음을 물렸다.
“이상해.”
“나디사.”
여자가 씩 입꼬리를 올려 웃는 순간 라넌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뒤로 뛰었다.
“올라타!”
망령이 저들끼리 합쳐지고 있었다. 나디사는 당장 로마를 불러들이며 위로 뛰어올랐다. 퍽, 소리를 내며 로마의 등에 걸쳐진 나디사는 조종석에 똑바로 앉기 위해 팔을 쭉 뻗었다.
“윽!”
로마가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렸는지 곧장 날아올랐다. 안장을 잡고 버틴 나디사는 바람에 잡힌 팔을 움직여 더 위쪽을 잡았다. 로마에게 천천히 날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안장 위쪽을 잡고 대롱대롱 매달리게 된 나디사는 턱을 내려 아래를 보았다.
흙내와 풋내가 나는, 그녀가 알던 숲이 아니었다. 저를 잡으려고 쫓아오는 까만 손은 망령의 것이었다. 그 망령이 숲을 덮었다. 제 눈이 잘못된 줄 알았다.
“라넌 경!”
“계속 위로 올라가!”
완벽한 탑승 자세로 비상하고 있던 라넌도 뻗치는 어둠을 요리조리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디사는 빠져나가기 힘들었다.
발목을 건드리는 그것은 낮게 나는 로마의 꼬리까지 잡았다. 아무래도 나디사가 떨어지지 않게 천천히 난 것이 문제였나 보다.
꼬리가 잡혀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굶주린 개미 떼처럼 이동하는 망령의 손은 로마의 기다란 목까지 올라왔다.
“아!”
로마를 놓쳤다. 나디사는 떨어진다는 느낌보다 끌려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으.”
무분별하게 힘을 사용한 대가는 때를 가리지 않고 온다. 그때가 지금이었다. 버틸수록 강도를 높이는 통증이 그녀의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하아….”
쓰러지기 직전. 이게 죽음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태에서 토한 숨은 어떤 이의 이름과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