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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하늘은 여전히 안녕하신지-153화 (153/210)

153화

자신을 질타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녀는 떨고 있는 손을 등 뒤로 숨겼다.

“괜찮습니다.

전장을 잊게 하는, 말이 통하는 사람과의 대화가 위안이 될 줄은 몰랐다. 설령 그것이 라넌 샤스일지라도. 철과 피를 녹여 만든 것 같은 그녀를 마주 보니 저는 아직 한참 모자란 듯했다.

라넌은 전장에서 한 달 동안 먹고 지내라고 해도 그러자 할 사람이었다. 저를 못 미더워하는 그녀에게 정신을 차리라는 소리까지 듣다니. 조용히 관망하던 라넌이 입을 열기 전까지 나디사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죽음이 두렵나?”

라넌이 무슨 말을 하든 감당하겠노라 다짐하던 나디사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저 찬란한 금색의 눈동자는 죽음이 데리러 와도 흔들리지 않을 눈치였다. 어떤 면에서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두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겠죠.”

“왜. 죽을까 봐?”

돌아온 답변에는 노골적인 비꼼이 들어가 있었다. 라넌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말이 퍽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첫 전쟁에, 첫 죽음에 초연하지 못해 미안하게 됐다. 비뚠 마음이 올라오려는 찰나 라넌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관통했다.

“너는 날개가 있잖아. 나디사 마로닌.”

“…예?”

“너는 라드군이니 달리거나 눈을 감을 필요 없어. 죽음보다 빠르게 날면 돼. 그러면 아무도 너를 해할 수 없을 테니까.”

그녀의 두려움은 자신이 죽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남이 죽는 데서 오는 것이었지만,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이 다름 아닌 라넌 샤스였기에 나디사는 생소한 감정을 느꼈다.

둘이 아무 악감정은 없는 양 날고 있다는 것 때문인지. 비명과 창, 화살이 날아다니는 와중에 무심코 물었다.

“왜 저한테 잘해 주십니까?”

유연하게 허리를 굽혀 화살을 피한 라넌이 부자연스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머리 회전이 빠른 라넌은 답을 하기 싫은 질문을 회피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녀는 무심한 황금색 눈동자로 디디를 가리켰다.

“저 라드는 주인도 없는데 왜 너를 따라다니지?”

질문에는 질문으로. 나디사는 그녀에게 한 가지를 배웠다. 말 못 할 사정이 한 두 개가 아닌 나디사는 졌다는 걸 인정했다. 그것 보라는 듯이 비웃은 라넌은 라드의 목줄을 세게 당겼다. 지치지도 않는 화살 세례가 그녀의 옆으로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욕설을 들은 것도 같다.

“서로 대답하기 싫은 건 적당히 넘기자고. 이제 나는 너에게 더 물을 것이 없으니까.”

그건 꽤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러면 그전에는 많았다는 것인가. 저를 대하는 라넌의 감정의 색이 예전과 달라도 한참 달랐다. 퉁명스러움은 그대로지만 그리운 무언가를 보는 듯한… 제 착각이겠지만 말이다.

“찾았다.”

라넌의 외침은 방금 전의 어색한 대화를 싹 잊게끔 만들었다. 이제는 몸에 익은 착지 준비를 한 나디사는 어두운 밤 속을 빠르게 달렸다.

“저기야.”

* * *

공주의 성안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팽팽한 상태였으나 바깥쪽은 양쪽 다 큰 피해를 안고 사실상 휴전 중이었다. 적을 만나도 모른 척하거나 죽거나 죽고 있었다.

일시에 잿더미가 된 땅 위에 쓰러진 신관은 하얀 면사포처럼 보이기도 해서 눈에 잘 띄었다.

저 신관의 얼굴을 어디서 봤나 했더니만 그때였던 것 같다. 신관을 무슨 장식처럼 달고 다니던 그 늙은, 첫 번째 신관이라는 자였다.

첫 만남과 크게 다를 거 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주위에는 죽은 신관들과 죽은 파르난의 사람이 하나의 원을 이루며 쓰러져 있었다.

“라드군인가?”

피가 비치는 배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누워 있는 그가 말을 걸어왔다.

“라넌입니다, 랍.”

라넌은 하늘 위에서 그를 발견한 것이었다. 바깥에 남은 파르난의 잔당들은 이쪽으로 가까이 오진 않고 있었다. 성 바깥쪽의 적군들 반 이상이 라드군 손에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라넌이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면 자신의 착각일까. 죽음을 직감한 듯이 꺼져 가던 늙은 남자의 눈동자에 빛이 생겼다. 그 살아 있고자 하는 악착스러움이 나디사는 어쩐지 달갑게 다가오지 않았다. 겉으로는 그가 아군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라넌…!”

“여기 계셨습니까.”

라넌의 태도에는 감격의 재회나 기쁨 따위는 없었다. 사무적이고 건조한 그녀의 물음에 첫 번째 신관은 불안한 듯이 침을 삼켰다.

“두 분은 어디 계십니까. 왕자님과 공주님은요.”

“우선, 그, 록이나 다른 신관들을 불러서….”

“나디사 마로닌!”

듣기도 귀찮은 것처럼 꽥 소리를 질러 제 이름을 부른 라넌이었다. 끼어들 자리가 아닌 것 같아 뒤에 가만히 서 있던 나디사는 라드의 목줄을 놓고 그녀에게 달려왔다.

“네.”

“저 라드 두 마리 중에 한 마리. 여기에 두고 갈 수 있나?”

“아….”

“네, 아니요, 둘 중 하나만 말해 봐.”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그 두 개 중에 없었다. 곤란해하는 나디사의 얼굴을 읽고 라넌은 됐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시도해 보는 것으로 하고. 여기 라드 한 마리 두고 갈 테니 목숨은 지켜 줄 겁니다.”

“무어?”

“핏자국을 보니 두 분은 저쪽으로 간 것일 테고요. 맞지요?”

“라넌 경! 지금 네가 나한테 이러고도…!”

“저는 살아남을 거랍니다. 그게 당신에게는 불행한 일일 테지만.”

다툼 비슷한 걸 시작한 두 사람 사이에 선 나디사는 눈을 도르르 굴렸다. 호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서 누구의 편도 들고 싶지 않았다. 라넌이 말로 다 죽어 가는 노인의 숨을 막는 사이 나디사는 눈으로 점점이 떨어진 핏자국을 보고 있었다. 숲으로 이어진다. 히아신이 노루를 학살하던 그 숲이었다.

이것과 그가 관계가 있을까 생각하던 나디사의 귀에 라넌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

“그럼 갑니다.”

라넌은 저를 데리고 간다는 말도 일절 하지 않았지만 눈치를 봐서 지금쯤 따라가야 하는 타이밍 같았다.

디디가 착하게 굴기를 바라며 여기 있기를 명령하고 있을 차였다. 따라가고 싶은지 발톱으로 땅을 파는 디디와 머리를 맞대고 있는 그때에 꺼져 가는 목소리가 그녀의 몸을 꼭 매었다. 여름이 거의 끝나가는 듯하지만 아직은 텁텁하고 찌는 듯한 시기였다.

전장을 팔 빠지게 누비느라 그녀도 땀을 흘렸고. 그런데 그런 그녀의 땀을 식힐 만큼 속이 불편해지게 만드는 목소리는, 아마도.

“티사 레나이의 딸, 나디사 마로닌.”

죽을 날 받아 둔 노인 같은 그의 얼굴은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다 아는 그를 보는데 두렵기는커녕.

“네 라드에게 명을 잘해 두는 게 좋을 거야. 혹시라도 라넌 경과 허튼짓을 생각하는 거라면.”

“….”

“너는 평생 진실을 알지도 못하고 죽을 거다.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고.”

고로 자기를 살리지 않으면, 그녀가 그토록 알고 싶어 하는 진실은 수장된다는 협박일 테다.

이렇게 뇌를 강타하는 듯한 불쾌감은 처음이었다. 그 느글거리는 눈빛을 보자 그가 가지고, 협박의 도구라는 진실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얼마나 더럽고 저열할까.

“나디사 마로닌!”

오지 않는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그녀는 땅에 접착된 듯한 발을 뗐다.

헐떡이는 신관에게 고의로 인사하지 않으며 디디만을 두고 떠났다. 진실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사람이고, 이게 명령이어서였다.

그 사실을 그에게 달려가 알려 주고 싶었으나 라넌의 앞이라 그러지 못했다.

“이 숲에 대해 잘 알고 있나.”

“잘은 모르지만 알고는 있습니다.”

“무엇 하나 명확한 건 없군, 나디사 경.”

비웃음을 지으며 말한 라넌은 신관 쪽을 한 번 보다가 당당히 걸음을 내디뎠다.

“이 숲이 숨긴 게 무언지. 확인해 볼 차례가 됐네.”

이 핏자국. 나디사는 성년도 되지 않았다는 공주와 왕자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숲으로 들어가는 라넌을 바라보던 그녀는 뒤돌아 디디를 바라봤다. 두고 가지 말라는 듯이 우는 디디의 눈을 보며 웃었다.

처연하지 않게, 씩씩하게. 돌아온다는, 마지막이 아니라는 뜻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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