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거들먹거리는 자세로 선 식사 당번은 제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시선이 만족스러웠다. 생긴 것과 다르게 착한 건지, 아니면 태생이 저쪽 사람인 건지. 파르난의 왕자인 주제에 땅콩사탕을 먹지를 않나, 바깥소식을 접할 때마다 고맙다고 하지를 않나.
지금도 보아라. 저 살아 숨 쉬는 두 눈동자를. 식사 당번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로 목을 가다듬었다. 시간을 끌수록 히아신의 표정은 가라앉다가 떠오르기를 반복했지만.
그는 히아신의 침묵이 두렵지 않았다. 팔 한쪽이 묶여 있는 몸이었으며, 자신의 한 마디면 고문 담당을 다시 불러들일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 무섭고 이름난 왕자가 제 손에 있는 것이었다. 식사 당번이라고 깔보고 천대하는 이 위치가 지금만큼 자랑스러운 순간은 없었다.
“왜 죽는데?”
그 좋아하던 땅콩사탕에 손도 대지 않더니만 히아신이 숨이 막힐 만큼 느리게 물었다. 제물이 된 양처럼 제 말만을 기다리는 꼴을 은근히 비웃어 주곤 식사 당번은 아는 것을 모두 꺼내 보였다.
“글쎄. 너 말고 왕자 중 한 명이 간다는 소문이 있더라고. 안 그래도 거기는 개판인 것 같은데 거의 끝났지, 뭐.”
“왕자 중 누구.”
왕자의 이름을 다 아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다섯 명이라고 들었는데 그중 하나는 죽었고, 하나는 여기에 있으니. 남은 건 세 명뿐일 텐데도 그처럼 하위직은 알지 못했다.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히아신에게 마땅히 할 말이 없어진 식사 당번은 괜스레 성질을 부렸다.
“아, 그런 게 있다니까 그래.”
귀동냥으로 몇 번 그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지 정확한 정보는 아니었다. 이걸로 히아신의 관심을 돌렸으니 됐다고 생각하며 다음 주제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그나저나 내가 말 했었나. 그…….”
“있지.”
그는 돌연 저를 바라보는 히아신의 눈빛이 바뀌었다는 걸 알았다.
“어?”
“그거 말고. 하던 말이나 계속해.”
시답지 않은 말은 말라는 어조에 그는 땀을 뻘뻘 흘렸으나 여기서 꼬리를 내릴 수는 없었다.
갇혀 있는 건 저쪽이면서 말이다. 본인이 아직도 그 잘나던 왕자인 줄 아나 보지. 아무것도 아닌 남자에게 겁먹은 자신이 한심한 그는 울컥 말이 나왔다.
“설마 이 꼴이 되고도 아직 그 인간들 편을 드는 건 아니겠지? 우리를 이 볕도 안 드는 땅에 몰아넣은 건 그것들이라고!”
평상시라면 하지 않았을 말들, 생각. 어디선가 들은 그럴듯한 말들로 무장한 그는 자신의 분노가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있지도 않은 배신감에 치를 떠는 그를 보며 히아신은 서늘한 웃음을 띠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라울.”
그는 제 이름을 히아신에게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빠르게 식어 갔다. 한 팔이 자유롭지 않은데도 그의 눈빛은 너 따위는 죽일 수 있다는 듯이 여유만만이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 히아신은 한계에 다다른 인내심을 내보였다.
“누가 간다는 건데. 그리고 왜 죽는 거야.”
그의 인내심이 끝장났다는 걸 알았지만 애초부터 가진 패가 얼마 없는 라울은 입이 무거워졌다. 마음이 급해진 그는 아침에 가져온 접시를 집어 들었다. 그게 가겠다는 의미임을 모를 리 없는 히아신은 기회를 주듯 질문을 바꿨다.
“어디 가게.”
“지, 지금 가 봐야 될 것 같아. 그 이야기는 다녀와서 해 줄게.”
“라울.”
“이봐! 그게 그렇게 급한 이야기가……!”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숨도 쉬지 못하고 있던 라울이 비명을 질렀다. 와장창, 하며 히아신의 손에 걸려 있던 수갑 하나가 박살이 났다. 멀쩡하게 고정되어 있던 그걸 힘으로 뜯어냈다.
벽이 뜯겨 나오면서 감옥이 난장판이 됐지만 바깥에서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 때문이겠나. 혹시나 이 귀중한 시간을 누가 방해할까 싶어 사람을 죄다 물린 그의 죄였다.
“으, 으아악!”
라울은 본능적으로 들고 있던 접시를 그의 쪽으로 던졌다. 그리고 잽싸게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발소리도 내지 않고 달려온 남자의 손이 그의 어깨를 무식하게 잡아 돌렸다.
“악!”
어깨가 빠지는 느낌이 드는 건 둘째치고 몸이 못처럼 벽에 박혔다. 감옥 밖으로는 겨우 한 걸음이 남은 상태였다. 눈으로 나갈 기회만 엿보고 있는 라울을 보며 히아신이 킬킬 웃었다.
“억, 으어!”
“라울. 나는 네가 정말 좋아. 여기서 땅콩사탕을 사다 주고, 이야기도 해 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었거든.”
“놔, 놔줘……!”
“그러니까 나한테 말해 달라고 했잖아. 어떻게 된 거라고?”
대답하라고 하면서도 손에 힘을 주는 것이, 이 미친 왕자는 그를 살려 보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라울은 살기 위해서 그의 손을 잡고 바동거렸다.
“제, 아, 악, 발!”
이러다가 숨이 넘어가겠다고 생각할 무렵 히아신은 목을 놓아주는 자비를 베풀었다.
“크억……!”
한 끗 차이로 목숨을 부지한 라울은 털버덕 주저앉아 왕자를 올려다봤다. 그의 자유로운 두 손과 발은 원한다면 언제라도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왜…… 지금까지 나를 속였지?”
뭉친 근육을 풀 듯이 팔을 돌리는 히아신의 대답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나는 너를 속인 적이 없어, 라울. 부탁은 한 적 있어도.”
수갑 자국이 난 손목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히아신의 눈이 슬픔으로 기울었다. 메마른 그 표정이 이 정신 없는 순간에도 라울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라울. 그나저나.”
그러나 얼마 안 가 표정을 말끔히 지운 히아신은 그에게 차가운 미소를 보였다.
“친구로 지냈던 시간은 이제 안녕이야, 라울.”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한 발자국 움직이지도 않고 네 이름을 알아냈어. 봤지? 여기를 나가지 못해서 잡혀 있는 게 아니야.”
라울은 짧지만 참회의 시간을 가졌다. 당최 자신이 저지른 짓이 무엇이었는지를. 웅크린 악어이니 저건 악어가 아니라고 믿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방금 우리는 협박하는 사람과 협박을 당하는 사람이 됐어.”
“뭐, 뭐라고.”
“열흘을 줄게. 넉넉한 거야, 이것도. 지금까지의 온정을 생각해서. 내 시계, 가져와.”
열흘이라는 터무니없는 날짜에 라울은 고개를 저었지만 히아신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열흘이야, 라울.”
시름이 깊어진 라울의 신음을 들으며 히아신은 타들고, 죽어 가는 땅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라울.”
목숨이 아까워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그의 머리 위로 건조한 말이 떨어졌다.
“그리고 이 땅을 선택한 건 우리잖아. 그걸 망각하진 말자고.”
그렇게 마지막 희망까지 단절돼 버렸다. 열흘. 그 죽음의 기간은 오늘부터 시작이었다.
* * *
밤이 가까워져 핏빛처럼 붉고 어두운 노을이 땅에 깔리고 있었다.
나디사는 한 병사가 버린 검을 들 수밖에 없었다. 툭하면 라드의 다리에 매달리는 이들을 베고 밀치는 데엔 검이 필요했다.
바람의 검이 성능은 더 훌륭하다고 할 수 있으나 지금은 로마와 디디의 날개가 절실한 전장이었다.
“그쪽은!”
“안 보입니다!”
나디사는 피가 굳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외쳤다. 손이 떨려 왔지만 사람이 반으로 갈리는 판국에 어디 가서 무섭다고 얘기하겠는가. 그사이 적군이 로마의 다리를 붙잡는 것을 본 나디사는 칼을 빼 들었다.
그것이 무섭다. 누군가를 죽이는 게 너무 쉬워서 무서웠다. 사람이 아닌 무언가를 죽이는 느낌인데. 신기하게도 죽이고 나면 사람인 게 보인다. 사람을 지키자고 든 검에 썰려 나가는 저들이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 왜 여기까지 왔는지, 그걸 깊게 생각할수록 검을 든 저 자신이 무서웠다.
“나디사 마로닌!”
잠시 정신을 놓고 있던 나디사는 저보다 더 심각한 몰골의 라넌과 눈을 마주쳤다.
“저기 수상한 자가 보여. 따라와라.”
왜 그 수많은 사람 중 저를 데려가려 하는지. 그런 원망조차 들지 않게 라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디사는 밀려오는 두려움을 무시하며 그녀의 자취를 따라서 위로 올라갔다.
죽기 직전이니만큼 부모님이 무척 보고 싶을 줄 알았다만. 그게 아니었다. 그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게 죄송스러울 정도로 나디사는 전장의 비정함이 두려웠다. 군인이 되겠다 하면서도 이러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여전히 나약한 그 샤포드의 소녀인 걸까.
“나디사 마로닌.”
“네.”
“정신 차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