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나디사.
손길과 비슷한 한낮의 햇살이 그녀의 뺨을 스친 때였다. 간지럽게 저를 깨우는 것 같은 느낌에 눈을 뜬 그녀는 햇볕이 만들어 준 잔영에 가슴이 뛰고 말았다.
내리쬐는 빛이 언뜻 히아신처럼 보였다.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화들짝 일어난 순간 그녀의 뺨을 기다린 듯이 디디가 핥아 내었다.
“디디.”
말로 이름을 내뱉자마자 심장이 반응을 해 왔다. 두 마리의 라드가 저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인식하자마자 조금 전까지 아무렇지 않았던 심장이 깨질 것만 같았다.
저를 걱정스레 쳐다보는 두 마리의 라드에게 웃어 보인 나디사는 문득 여기가 어딘지 싶었다. 광활 하늘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당한 웃음이 픽 흘러나왔다.
지금껏 공중에서 기절해 있었단 말인가. 나디사는 제 몸이 나을 때까지 곁을 지키고 있던 라드들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준 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구름에 가려진 장소는 그녀가 돌아가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공주의 성이었다. 연기에, 비명에, 난리도 저런 난리가 없다.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저 연기 속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이 아무리 어렵게 돌아가기로서니 저가 군인이라는 걸 잊기라도 했단 말인가. 떠나간 남자나 찾고 자빠진 자신이 미워지려 했다.
“로마. 준비하자.”
마음을 먹은 그녀는 로마의 목을 안고 따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누구랑 다르게 로마와 디디는 그녀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으니까.
그렇듯 나디사의 하강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그녀가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바람의 힘이 붙어,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여러 소리를 차단해 주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처럼 아래로, 그저 아래로 떨어지는 일 또한 설레고 두렵긴 매한가지였다. 이제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앞에 무엇이 있더라도, 무엇을 감당하게 되더라도, 그녀가 그 여자의 딸인 이상, 그리고 플란 종족의 피를 타고난 이상 결국 하늘에서 떨어지는 걸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을.
그렇게 위험한 남자에게 사랑을 느낀 것도 어쩌면 같은 맥락일지도 모른다. 위험하고, 아름다운 것에 달려드는 게 종족의 운명일지도. 그렇다면 히아신이 그다지 억울해할 필요도 없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비슷한 운명을 짊어지고 사는 것이니까.
피와 비명이 들끓는 전장으로 떨어지는 동안 나디사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심장의 통증은 자신의 일부 같았다. 사람을 죽게 하는 이 통증이, 이 바람이, 이 추락이 그녀를 살게 한다.
바람과 함께 날아온 그녀는 로마와 디디의 날개를 펼치도록 했다. 지상으로 가까이 가자 제 편이 아닌 적들이 한눈에 보였다.
검은 연기의 창이 히아신을 떠올리게 했지만 그녀는 우물쭈물 지체할 수 없었다.
“저기 봐!”
“이런, 젠장.”
적지 않은 수의 사람이 강한 바람을 만들어 내는 그녀를 주목했다. 라드 두 마리가 하늘에서 바람을 일으키자 아군은 미소를, 적군은 비소를 지었다.
“거기, 피해요!”
제 쪽으로 검은 창이 날아오는 것을 감지한 그녀가 로마의 목을 안아 위로 들었다.
“조심하라고!”
아군의 말이 도움이 됐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창을 피하는 로마의 몸이 뒤집힌 채로 한 바퀴 돌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머리에 피가 몰린 것을 본 디디가 날개 끝을 세우며 날아갔다.
“디, 디!”
로마는 오랜 시간 합을 맞춰 와서 통제되는 반면 디디는 연결이 약한지 단독 행동이 잦았다. 디디가 그녀의 명과 다른 뜻을 이행할 때마다 피가 반대로 도는 느낌이 전해졌다.
신음 한번 없이 그녀는 입에 고인 피를 퉤 뱉었다. 눈이 핑핑 도는 순간에도 사람의 머리를 발톱으로 쥐고 흔드는 디디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 주인을 닮아도 너무 닮았다고.
애초에 자신만만하게 추락한 것부터 무리의 연속이었다. 적을 코앞에 두고 쓰러질락 말락 하는 그녀의 머리를 받쳐 드는 발톱이 있었다. 처음 맡아 보는 피 냄새였다. 비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는 냄새였다. 말똥과도 같은 오물이 붙은 발톱이 무심하게 그녀의 머리를 밀었다.
“윽!”
그 냄새에 속이 뒤집힌 나디사는 별수 없이 엎드려 헛구역질을 했다.
“오랜만에 봤는데. 내가 없으니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까랑까랑하게 상대를 누르는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다 싶었다. 누구인지 알면서도 나디사는 고개를 들어 여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라넌과 그녀의 라드였다. 냉정한 눈빛을 하고 있지만 주인이나 라드나 피를 뒤집어쓴 탓에 어디가 눈이고 코인지 분간이 안 갔다. 아마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라넌인 걸 알아보지 못했을 거다.
“쓰러져도 여기서 쓰러지지 마.”
그녀에게 당한 것이 많은 나디사는 질 수 없다는 마음이 들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넌의 라드는 공을 차듯 발을 움직여 누운 그녀가 머리를 들어 올리도록 도와주었다. 질 바엔 죽는 게 낫다는 라넌의 시선에 놓인 나디사는 주먹을 쥐었다.
저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라넌의 도움을 받다니. 그러나 라넌의 관심은 그새 다른 곳으로 떠난 후였다. 눈가에 뭉친 피떡을 닦던 그녀는 혼자 날뛰고 있는 디디를 지그시 지켜봤다.
“그런데 저건 누구의 라드지. 왜 주인 없이 혼자 저러고 있는 거야.”
일말의 앙심을 풀지 않고 있던 나디사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관심에 당황한 차였다. 다행히 히아신의 라드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상황이 이래서인지. 디디에게서 눈을 돌린 그녀는 감정 없는 어조로 명했다.
“갈 데가 있는데. 지금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는 듯해.”
짧게 자른 금빛의 머리가 바람에 날렸다. 나디사의 코끝에 묻은 역한 피 냄새가 진해졌다. 전장 속에서 눈을 마주친 두 사람은 이곳이 어디인지 잊은 것처럼 서로에게 집중했다.
“왕자님, 공주님. 두 분 다 사라지셨어. 우리가 찾는다.”
그녀가 내린 명령을 토씨 한 톨도 안 틀리고 읊을 수 있을 만큼. 이것이 무엇일지라도 나아가 보기로 한 나디사는 입술을 움직였다.
“네.”
* * *
사고 친 왕자의 식사 담당은 억 소리 나게 돈을 준다 해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식사 담당인 그도 처음에는 그랬다. 아무래도 파르난에서도 악명 높은 왕자에, 먹여 주랴 치워 주랴 제법 손이 가는 일이니 말이다. 아버지도 그의 처분에 관해 이렇다 할 말도 없으니 저러다가 나중에 다시 돌아오면 보복을 당하는 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그렇다고 배신자인 그에게 굽신거릴 수도 없는 노릇. 어떻게 봐도 히아신의 식사 담당은 손해에 손해를 더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식사 담당을 하기로 한 날을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저번에 히아신으로부터 은밀한 제의를 받은 후로 그는 자신이 무어라도 된 양 우쭐하며 그의 식사 담당을 자처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하기 싫었던 일. 돈이라도 받고 남 주고 싶었던 일을 그가 한다고 나서자 모두가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해 주었다. 평판도 좋아지는 건 당연지사.
혹시 딴 주머니를 찬 게 아니냐는 말에 웃어넘겼지만 속으로는 식은땀이 났다. 얼굴 한번 보기 힘든 왕자였던 자에게 신뢰를 받는다는 느낌. 그 느낌이 지금껏 그의 인생에서는 없던 만족감을 주고 있었기에.
“자, 네가 사다 달라는 것.”
“고마워.”
땅콩사탕에 원수라도 진 사람도 아닐진대 그는 그것만 먹이면 얌전히 그의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파르난에서 구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바깥으로 나가서 구하자면 못 구할 것도 아니었다. 종일 식사는 하지 않고 사탕만 먹는 그를 배려해 그가 방문한 잠시간은 팔목에 묶인 수갑을 풀어 주기도 한다. 그거야 당연하게도 한쪽만이지만.
그것만으로도 고맙다는 듯이 싱긋 웃는 히아신은 오늘도 같은 질문을 했다.
“내 시계는?”
반복되는 질문이었지만 식사 담당의 답은 항상 정해져 있었다.
“오늘도 못 찾았어.”
“그래.”
그러면 히아신은 모든 의욕을 잃은 채로 벽만 바라보며 사탕을 집어 먹는다. 히아신과 대화를 나누고, 그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은 최고이지만 겨우 기분만으로 선을 넘을 수 없었다. 세상을 다 준다는 말도 아직 믿기지 않고. 조금 더 간을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식사 당번은 히아신의 건성으로 흘리는 대답이 불쾌했다. 제 인생사 이야기를 한 귀로 흘려듣는 것이 분명한 저 멍한 얼굴도. 그는 더 나은 대접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히아신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요즘 파르난에서 눈만 마주쳤다 하면 나누는 이야기를 해 보았다.
“아 참, 그 소식 들었어?”
대답조차 하지 않는 히아신의 눈은 그러든 말든 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고문이 고됐을 거라고 애써 생각한 식사 당번은 해서는 안 될 말을 입에 올렸다.
“수비타 군들 오늘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데.”